장세정
연표
1921
[가수 장세정 출생]
일제강점기 트로트 가수 장세정이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생후 두 달 만에 어머니를 잃고 조부모님 슬하에서 성장했다.
1921년 5월 28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으며, 생후 두 달 만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는 만주에서 독립단에 들어가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1936
[평양방송국 가요콩쿠르 1등 및 오케레코드 발탁]
만 15세 무렵, 평양방송국 개국 기념 가요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하며 오케레코드의 이철에게 발탁되어 가수로 데뷔할 기회를 얻었다.
평양 화신백화점 악기점에서 근무하던 중, 만 15세 무렵인 1936년에 평양방송국 개국 기념 가요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한 것을 계기로 오케레코드의 이철에게 발탁되어 가수가 되었다.
1937
[데뷔곡 〈연락선은 떠난다〉 대히트]
오케레코드사에서 '평양이 낳은 가희'로 홍보하며 발표한 데뷔곡 〈연락선은 떠난다〉가 대히트를 기록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1937년 초에 발표한 박영호 작사, 김해송 작곡의 〈연락선은 떠난다〉가 대히트를 기록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 곡은 항구에서의 이별을 다룬 노래로, 일제 강점기의 민족적 한이 표출되어 크게 사랑받았다는 평을 받았다.
1940
[군국가요 보급 활동 참여]
중일 전쟁 발발 후 전쟁이 확대되면서 가수들은 군국가요 보급에 동원되었다. 장세정도 〈지원병의 어머니〉 등 여러 편의 친일가요를 발표했다.
장세정이 데뷔한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한 후 전쟁이 확대되면서 가수들은 군국가요 보급에 동원되었다. 그녀는 〈역마차〉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기에 번안곡인 〈지원병의 어머니〉, 동명의 군국영화 주제곡인 〈그대와 나〉를 포함해 여러 편의 친일가요를 오케레코드사를 통해 발표했다.
1948
[광복 후 악극단 활동 및 〈울어라 은방울〉 발표]
광복 후 김해송이 조직한 KPK악극단에서 배우로 활동했으며, 조명암과 김해송이 해방의 기쁨을 표현해 만든 〈울어라 은방울〉을 발표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광복 후 김해송이 조직한 KPK악극단에서 악극 배우로 활동했으며, 1948년 봄에 조명암과 김해송 콤비가 해방의 기쁨을 표현해 만든 〈울어라 은방울〉을 불러 히트시켰다. 이 노래는 장세정 불후의 명곡이라는 평을 받을 만큼 높이 평가받았다.
1952
[한국 전쟁 중 대구 피난 및 음반 활동]
한국 전쟁 중 대구로 피난하여 오리엔트레코드에서 〈고향초〉, 〈즐거운 목장〉 등 음반을 발매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한국 전쟁 발발 후 대구로 피난을 내려와 오리엔트레코드에서 〈고향초〉, 〈즐거운 목장〉, 〈샨프란시스코〉 등의 노래가 담긴 음반을 발매했다. 특히 〈고향초〉는 본래 송민도의 노래였으나 장세정이 재취입해 널리 알려졌다.
1960
[한국 전쟁 이후 활동 위축]
한국 전쟁 이후 월북 작곡가 및 작사가의 노래가 금지곡이 되면서, 장세정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고 대중가수로서의 전성기를 마감했다.
한국 전쟁 이후 월북 작사가인 조명암과 박영호의 작품이 많았고, 김해송 역시 전쟁 중 행방불명되어 월북했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에 이들의 노래가 금지곡이 되거나 작가 이름 및 가사를 바꿔 부르는 편법이 동원되었다. 이로 인해 장세정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고, 대중가수로서의 전성기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1978
활동이 위축된 후, 말년에는 미국으로 이민하여 1978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은퇴 공연을 개최하며 공식적으로 가수 활동을 마무리하고 무대에서 물러났다. 이후 사망할 때까지 미국에 거주했다.
1988
[가요무대 로스앤젤레스 특별 출연]
은퇴 후 1988년 가요무대 로스앤젤레스 교포 위문 공연에 특별 출연하여 오랜만에 무대에 섰다.
1988년 KBS1 '가요무대'가 로스앤젤레스 교포 위문 공연 특집을 진행했을 당시, 특별 출연하여 오랜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 여전한 가창력을 선보였다.
2003
2003년 2월 1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묘소는 미국 할리우드 포레스트 론(Hollywood Forest Lawn)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