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전쟁
연표
1376
['검은 왕자' 에드워드 사망]
플랜타제넷 왕가의 왕위 계승권이 불안정해지는 첫 신호탄.에드워드 3세의 장남이자 유력한 후계자였던 '검은 왕자' 에드워드가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며 후계 구도에 큰 불확실성을 남겼다.이 사건은 이후 랭커스터와 요크 가문 간의 피할 수 없는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에드워드 3세의 장자이자 상속인인 코너월 공작 에드워드(검은 왕자)가 1376년에 사망했다. 이로 인해 에드워드의 왕위 계승이 불안정해졌고, 당시 왕위 계승 원칙에 따라 형의 아들인 리처드가 우선권을 가졌지만, 미성년자였으며, 아버지의 직계혈족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에드워드 3세의 사망 시점에서 왕위를 상속할 후계자가 누가 될 지에 대한 상당한 불확실성이 있었다.
1399
[헨리 볼링브룩의 귀국 및 헨리 4세 즉위]
리처드 2세의 폭정을 틈타 프랑스로 추방되었던 헨리 볼링브룩이 귀국, 영국을 침공하여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랭커스터 왕조의 첫 왕인 헨리 4세로 즉위했다.이는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장미 전쟁의 전초전 격인 사건으로, 이후 요크 가문의 왕위 주장의 명분이 되었다.
1399년 고트의 존이 죽자 리처드 2세는 고트의 아들인 헨리 볼링브룩을 프랑스로 추방하고 그의 땅과 세력을 흡수했다. 1399년 5월,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의 군사 작전을 위해 영국을 떠난 시기를 틈타 헨리는 1399년 6월 작은 군대를 이끌고 영국을 침공했고,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많은 지지를 받아 리처드를 폐위시키고 랭커스터 왕조 최초의 헨리 4세로 즉위했다.
1450
[서필드 공작 처형]
헨리 6세의 주요 조언자였던 서필드 공작이 프랑스에서의 군사적 실패와 비밀 조약 논란으로 대중의 분노를 사 체포, 런던탑에 갇혔다가 강제 추방 중 처형당했다.이는 헨리 6세 통치기의 불안정성을 극대화시키고, 리처드 요크 공작의 반란에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1450년에는 서필드가 체포되어 런던 탑에 가둬졌으며 하원에서 탄핵을 받았다. 이에 헨리 6세가 개입하여 서필드를 5년간 추방시켰지만, 칼레에서의 강제 추방 중에 서필드는 체포되어 1450년 5월 2일에 처형되었다.
1453
[카스티용 전투 패배 및 백년 전쟁 종식]
프랑스 남부에서 벌어진 카스티용 전투에서 영국군이 치명적인 패배를 겪으며 칼레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 영토를 잃고 백년 전쟁이 종식되었다.이 충격적인 소식에 헨리 6세는 정신 붕괴를 겪어 왕국의 혼란이 가속화되었고, 리처드 요크 공작의 정치적 부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453년 7월 17일, 프랑스 남부에서 영국군은 치명적인 패배를 입은 카스티용 전투에서 모든 프랑스 영토를 잃었고, 칼레의 영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프랑스 영지를 잃음으로써 유럽의 권력 균형을 바꾸었고, 백년 전쟁을 종식시켰다. 아마도 이런 사실에 대한 반응으로, 헨리는 완전한 정신 붕괴를 겪었고, 그 결과 새로 태어난 아들인 에드워드를 알아볼 수 없었다.
1454
[리처드 요크 공작 총리 대리 임명]
헨리 6세의 정신 붕괴로 인해 국가를 통치할 수 없게 되자, 총리 회의가 설립되고 마가렛 왕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요크 공작 리처드가 총리 대리 겸 주요 고문으로 임명되었다.이는 요크 가문이 왕권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중요한 전환점이다.
헨리가 정신 붕괴를 겪자, 1454년 3월 22일 존 켐프 추기경이 사망하였으며, 헨리는 후임자를 지명할 수 없어 왕의 이름으로의 정부가 헌법적으로 불가능해졌다. 나라를 다스릴 수 있도록, 총리 회의가 설립되었고, 마가렛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1454년 3월 27일 리처드 오브 요크가 총리 대리와 주요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요크는 처유인 리처드 네빌을 총리로 임명하였고, 그의 대대적인 적인 헨리 퍼시, 노던버랜드 백작을 상대로 네빌을 지지했다.
1455
[제1차 세인트올번스 전투 발발]
붉은 장미의 랭커스터 왕가와 흰 장미의 요크 왕가 간의 왕위 쟁탈전인 '장미 전쟁'의 서막을 알린 첫 번째 전투.요크 공작 리처드 군대가 헨리 6세의 랭커스터 군대를 대파하고 헨리 6세를 포로로 잡으며 요크파의 강력한 영향력을 입증했다.이 전투에서 랭커스터 가문의 핵심 인물들이 대거 전사했다.
1455년 5월 22일 런던 북쪽의 세인트올번스에서 요크파의 리처드 오브 요크 3세 군대와 헨리 6세의 랭커스터군이 맞붙어 요크파의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왔다. 헨리 6세는 요크의 군대에 포위되어 적군에게 포로로 잡혔고, 랭커스터파의 많은 정치적 적들 중에는 에드먼드 보포트, 2세 소메르셋 공작, 헨리 퍼시, 2세 노퍽 백작, 토마스 클리포드, 8세 클리포드 남작 등이 사망했다.
1459
[블로어 히스 전투]
워릭과 요크, 살리스버리가 런던 소환을 거부하고 군대를 소집하자, 살리스버리가 지휘하는 요크군이 랭커스터군의 습격을 받아 블로어 히스에서 승리했다.이 전투에서 랭커스터군 지휘관 오들리 남작이 전사하며 요크파의 기세가 더욱 높아졌다.
마가렛 왕비가 헨리를 위해 무장 지원을 적극적으로 모집하고 그녀가 직접 선발한 기사와 경호병들에게 은빛 백조 문양의 계몽 문장을 배포했다. 워릭이 합류하기 전에, 1459년 9월 23일 블로어 히스에서 살리스버리가 지휘하는 요크군 5,000명의 병력은 제임스 투셋 제5대 오들리 남작이 이끄는 2배 이상의 랭커스터군에게 습격을 받았다. 랭커스터군은 패배하였고, 오들리 남작은 전투 중에 사망했다.
[루드포드 브릿지 전투 패배와 요크파 망명]
럿포드 다리에서 워윅의 칼레섬 부대 안드루 트롤로프의 배신으로 요크군은 해산되었고, 요크와 그의 아들, 워윅, 살리스버리 등 주요 요크파 인물들이 망명길에 올랐다.이 패배로 랭커스터파는 '악마의 의회'를 소집하여 요크파를 탄핵하는 등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
인근 럿포드 다리(Ludford Bridge)에서 워윅의 칼레섬 부대 안드루 트롤로프의 배신으로 요크군은 해산되었다. 아일랜드 지사로 남아 있던 요크는 자신의 둘째 아들인 럿랜드 백작 에드먼드와 함께 더블린으로 도망쳤고, 워윅과 살리스버리는 요크의 상속인인 마치 백작 에드워드와 함께 칼레로 항해했다.
1460
[노스햄프턴 전투 승리]
워윅과 살리스버리, 에드워드가 런던으로 진군하여 랭커스터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이 전투에서 헨리 6세가 다시 요크파에 의해 포로로 잡히고 런던으로 호송되며, 요크 공작 리처드가 왕위 요구를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계기가 되었다.
요크 세력은 1460년 7월 10일 노서햄에서 랭커스터 세력을 만나 전투에서 승리했다. 험프리 스태퍼드, 제1대 백칙역 공작, 존 탈봇, 제2대 슈로즈베리 백작, 존 보몬트, 제1대 비콘트 보몬트, 토마스 퍼시, 제1대 에그레몬트 남작 모두 자신의 왕을 지키기 위해 전사했다. 한편 헨리는 요크파에 잡혀 런던으로 호송되었으며 요새의 항복의 요구를 강제로 받게 되었다.
[협약법 통과]
의회는 요크 공작 리처드의 왕위 요구에 충격을 받았으나, 헨리 6세를 대체하려는 욕구가 부족하여 타협안으로 '협약법'을 통과시켰다.이 법은 헨리 6세 사후 그의 아들 에드워드를 배제하고 요크에게 왕위를 넘기기로 결정했으나, 이 타협은 전쟁의 재개를 막지 못했다.
요크는 아일랜드에서 돌아와 10월 의회에서 영국 왕위를 요구하는 의미에서 왕좌 위에 손을 얹는 상징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이 행위는 의회에게 충격을 주었다. 1460년 10월 25일, '협약법'이 통과되었으며, 이는 헨리의 사망 후 그의 아들 에드워드를 배제하고 왕위를 요크에게 넘기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웨이크필드 전투와 요크 공작 리처드의 죽음]
랭커스터 왕가의 마가렛 왕비가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고 북진하여 요크군과 웨이크필드에서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이 전투에서 요크 공작 리처드와 그의 아들 럿랜드 백작, 워윅의 동생 토마스 네빌이 전사하며 요크파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여왕이었던 마가렛과 그녀의 아들은 랭커스터 가문의 소유인 하를렉 성으로 도망갔고, 거기서 해리 왕자의 이복 형제인 재스퍼 투더와 헨리 홀랜드, 3세 더크 오브 엑서터가 웨일즈와 서쪽 지방에서 병력을 모으고 있었다. 1460년 12월 30일 성을 떠나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요크, 럿랜드 및 워윅의 동생인 토마스 네빌이 모두 죽었다. 살리스베리는 다음 날 밤에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1461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와 에드워드 마치의 승리]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요크파가 패배한 후, 요크 공작의 아들 에드워드 마치가 웨일즈와 서쪽 지방에서 튜더 가문이 주도하는 랭커스터군을 모티머스 크로스에서 대패시켰다.이 전투 중 세 개의 태양이 뜨는 기상 현상(parhelion)이 나타나 에드워드는 이를 신의 축복으로 해석하고 '찬란한 태양'을 자신의 문양으로 채택했다.
영국의 에드워드 4세는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요크파가 패배한 이후, 리처드 요크 공작의 18세 아들인 에드워드 마치가 요크 공작국 상속인이 되어 왕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1461년 2월 2일, 그는 랭커스터군을 Mortimer's Cross에서 패배시켰으며, 헨리 5세의 유족인 캐서린 드 발루아의 남편인 오웬 튜더가 병사들에게 처형되었다.
[제2차 세인트올번스 전투와 헨리 6세 석방]
랭커스터군이 남쪽으로 이동하며 워윅이 이끄는 요크군을 세인트올번스에서 다시 한번 패배시켰다.헨리 6세가 랭커스터파에 의해 풀려났지만, 런던 시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에드워드와 워윅은 런던으로 빠르게 진군하여 에드워드가 에드워드 4세로 선언되는 계기가 되었다.
북부에서, 마가렛군과 랭커스터군의 승리 이후, 이긴 군대는 남쪽으로 이동하였고, 적 포로인 헨리 6세와 함께 워릭은 병력을 이끌고 로마시대 고도로 알려진 워터링 스트리트의 세인트올번스에서 적을 맞이하기 위해 움직였다. 워릭의 병력은 잘 방어 준비를 하였지만 결국 2월 17일 세인트올번스 2차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페리브리지 전투]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 간의 치열한 전투로, 워윅이 이끄는 요크군 선봉 부대가 랭커스터군과 부분 충돌을 겪었다.이 전투에서 랭커스터 지휘관 클리포드와 워윅의 친척 네빌 군주가 사망하는 등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워윅는 요크군의 선봉 부대를 이끌며 3월 28일 Ferrybridge에서 랭커스터군과 부분 충돌을 겪었는데,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으며 랭커스터가의 지휘관인 Clifford과 Warwick의 친척인 Neville 군주가 사망했다.
[토우턴 전투와 요크파의 결정적 승리]
영국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피비린내 나는 전투 중 하나로, 에드워드 4세가 이끄는 요크군이 랭커스터 주력군을 요크셔의 타우턴에서 결정적으로 격파했다.이 승리로 랭커스터 궁정의 중추 인물들이 대부분 사망하거나 망명했으며, 헨리 6세와 마가렛 왕비는 스코틀랜드로 도주했다.이 전투는 에드워드 4세의 통치를 확고히 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Edward는 다음날인 3월 29일, Yorkshire의 Towton에서 랭커스터 주력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후 벌어진 전투는 영국 내에서 역사상 최대이며 가장 피가 흘린 전투 중 하나이다. 이 전투는 Edward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주며 북부 지역의 랭커스터가의 권력을 깨트렸다. 랭커스터 궁정의 중추였던 인물들은 대부분 죽거나 나라를 떠나게 되었다. Henry와 Margaret, 그리고 그들의 아들 Edward 왕자는 북쪽으로 스코틀랜드로 도망갔다.
[에드워드 4세의 대관식]
토우턴 전투의 승리 이후, 에드워드 마치가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서 영국 왕 에드워드 4세로 정식 대관식을 치렀다.그는 자신의 지배를 받아들인 랭커스터파 당원들을 사면하며 통치 기반을 다졌고, 워윅 백작은 그의 후원을 받아 국내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으로 부상했다.
에드워드는 1461년 6월 28일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서 엄숙한 세례를 받고 영국 왕으로서 정식으로 선출되었다. 에드워드는 패배한 원수들의 애정을 얻으려 노력했으며, 타우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자신의 지배를 받아들인 많은 랭커스터 당원들을 사면했으며, 그들이 자신의 재산과 품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자 했다. 워릭은 에드워드의 후원을 받아 매우 많은 혜택을 누렸으며, 국내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이 되었다.
1464
[에드워드 4세의 엘리자베스 우드빌 비밀결혼]
에드워드 4세가 워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랭커스터 귀족의 과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비밀리에 결혼했다.이 결혼은 우드빌 가문을 독립적인 권력 집단으로 만들며 워윅의 통제를 벗어나게 했고, 왕과 '킹메이커' 워윅 사이의 심각한 갈등을 초래하여 결국 워윅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워릭은 1464년 10월, 4개월 전에 에드워드가 랭커스터 귀족의 과부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비밀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상당히 수치와 분노를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12명의 형제 자매가 있었는데, 그 중 일부는 저명한 가문과 결혼하여 우드빌 가문을 워윅의 통제를 벗어나 독립적인 권력 집단으로 만들었다.
[헥스헴 전투와 헨리 6세의 체포]
북부에서 랄프 퍼시 경이 이끄는 헨리 6세 지지 반란이 발생했으나, 워윅의 친척인 존 네빌의 요크군에 의해 헥스헴에서 결정적으로 파괴되었다.이 전투에서 랭커스터 계열 사령관들이 처형되었고, 숨어 지내던 헨리 6세가 체포되어 런던 탑에 감금되며 에드워드 4세의 통치에 대한 효과적인 반대가 제거되었다.
1463년 봄, 랄프 퍼시 경이 노어햄 성을 포위하면서 북부 인근에서 헨리를 지지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요한 랭커스터 계열군은 북엠버랜드를 통과하여 남하하였지만, 1464년 5월 15일 존 네빌의 요크군이 헥스헴에서 파괴시켰다. 3세 소머셋 공작 헨리 보우포트, 남쪽의 로스 및 헝거포드 남작 등 랭커스터 계열군 사령관은 모두 포획되어 처형되었다. 요크군은 타락한 왕 헨리를 리블 강 근처의 숲에서 포획하여 런던으로 끌려가 탑에서 가두었다.
1470
[워릭의 반란과 헨리 6세의 재집권]
에드워드 4세와의 갈등이 격화되자, '킹메이커' 워윅 백작은 프랑스 루이 11세와 협력하여 마가렛 왕비와 화해하고 헨리 6세의 복위를 목표로 영국을 전면 침공했다.이 침공으로 에드워드 4세는 플랑드르로 도주했고, 헨리 6세가 다시 왕위에 복위되었으나 실질적인 통치권은 워윅에게 있었다.
워릭은 헨리 6세를 왕위에 복위시키기 위해 루이 11세와 협력해 마가렛 아브뇽과 화해를 이루었다. 이에 따라 워윅은 딸 앤 마가렛과 헨리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웨스트민스터 공작 에드워드와 결혼시켰다. 북부 반란으로 불러온 산발적인 동요를 배치하고, 워윅과 클랜스의 연합 세력이 플리머스와 다트머스를 시작으로 1470년 9월 13일 전면 침공을 단행했다. 결국 에드워드, 그의 아우 리처드 글로스터 공작, 몇 백명의 수탁원들은 10월 2일 플랑드르로 도망쳤다.
1471
[바넷 전투와 '킹메이커' 워윅의 죽음]
플랑드르에서 돌아온 에드워드 4세가 워윅 백작의 군대와 바넷에서 격돌하여 승리했다.짙은 안개 속에서 아군 오인 사격이 발생하며 워윅의 군대가 와해되었고, '킹메이커' 워윅과 그의 동생 존 네빌이 전사하며 랭커스터파의 정치적 영향력이 영원히 소멸되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에드워드의 군대는 런던으로 빠르게 진군하여, 이미 약화한 헨리를 포획하고 런던 탑으로 보냈다. 이에도 불구하고 클래런스의 배신 이후, 워릭은 에드워드의 성장하는 군대를 쫓아가 전투에서 만났다. 그들은 1471년 4월 14일 바넷에서 전투를 벌였다. 도주하는 동안 워윅은 말에서 떨어져 죽음을 당했으며 그의 형제인 1세 몬태구 존 네빌 역시 죽음을 맞아야했다.
[튜크스베리 전투와 랭커스터 왕가 직계 단절]
바넷 전투에서 승리한 에드워드 4세가 마가렛 왕비의 랭커스터 잔존 병력을 튜크스베리에서 격파했다.이 전투에서 헨리 6세의 유일한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에드워드 오브 웨스터민스터가 사망하며 랭커스터 왕가의 직계 혈통이 끊겼다.이 승리로 요크 왕가의 통치가 확고해졌다.
바넷 전투을 치뤘더 날, 마가렛은 그녀의 군대를 Weymouth에 상륙시키고 웨일즈 마치스에서 모집한 신병들과 함께 군대를 보강했다. 1471년 5월 4일, 에드워드는 트위크스베리에서 마가렛의 군대와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헨리 6세와 마가렛의 유일한 아들인 에드워드 오브 웨스터민스터는 클래런스의 군대에 의해 죽었으며, 솜셋 공작과 존 커튼너, 데번시어 백작 모두 죽음을 맞았다.
[헨리 6세 의문사]
튜크스베리 전투 승리 직후 에드워드 4세가 런던에 입성한 밤, 런던 탑에 수감되어 있던 헨리 6세가 사망했다.공식적인 사망 원인은 우울증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유일한 후계자가 사망한 직후의 죽음으로 인해 에드워드 4세가 그의 살해를 지시했을 것으로 널리 추정되고 있다.이로써 랭커스터 왕가의 직접적인 위협은 사라졌다.
에드워드 4세는 5월 21일 런던에 들어갔다. 그 밤이나 그 이후에 헨리 6세가 죽었다고 알려졌다. 그의 죽음 원인으로는 아들의 죽음 소식에 의한 우울증이라는 것이 현대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지만, 헨리의 유일한 후계자가 죽었으므로 에드워드가 전 왕의 살인을 지시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478
[클래런스 공작 조지 처형]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이자 왕위 계승권자였던 클래런스 공작 조지가 형과의 갈등 끝에 반역죄로 런던 탑에 수감된 후 처형되었다.그의 죽음은 요크 왕가 내부의 분열을 보여주며, 리처드 3세의 왕위 찬탈 가능성을 열어준 사건으로 평가된다.
에드워드 4세의 정권은 형제 조기의 악화로 점점 분열되었다. 조지 플랜타젠넷, 클래런스 공작과 리처드 플랜타젠넷, 글로스터 공작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클래런스는 에드워드와의 인연이 멀어졌고, 에드워드를 거스르는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주장으로 영토에 수감되고 1478년 2월 18일 타워에서 처형당했다.
1483
[에드워드 4세 사망]
장미 전쟁을 요크 가문의 승리로 이끈 에드워드 4세가 건강 악화로 사망했다.그는 12살 된 아들 에드워드 5세를 위한 수석 보호자로 동생 리처드를 지명했으나, 이 죽음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또 다른 혼란의 서막이 되었다.
1483년에 에드워드의 건강이 악화되었고, 그는 죽기 전에 동생 리처드를 그의 12살 아들과 후계자인 에드워드를 위한 수석보호자로 지명했다. 1483년 4월 9일, 에드워드 4세는 사망했다.
[리처드 3세의 왕위 찬탈 및 즉위]
1483년 6월 22일 예정되었던 에드워드 5세의 대관식을 앞두고, 부모의 결혼 부적격 판정으로 왕위 상속권이 금지되었습니다. 6월 25일 회의를 거쳐 리처드 3세가 정당성을 갖춘 왕으로 선언되었으며 7월 6일 즉위하였습니다.
1485
[보스워스 전투와 리처드 3세의 죽음]
프랑스 망명지에서 귀국한 헨리 튜더가 리처드 3세의 군대를 보스워스에서 격파하고, 리처드 3세는 전투 중 사망했다.그는 영국 역사상 마지막으로 전투에서 사망한 왕으로 기록되었으며, 헨리 튜더가 헨리 7세로 즉위하며 튜더 왕조가 시작되고 장미 전쟁이 사실상 종결되는 세계사적이고 기록적인 중요한 사건이다.
1485년 8월, 헨리 튜더와 그의 삼촌인 재스퍼 튜더가 프랑스군 대원들과 함께 남부 웨일스에 상륙하여, 펨브로크셔를 행진하며 병사를 모았다. 헨리의 군대는 마켓 보스워스 근처에서 리처드의 군대를 물리치고, 리처드는 전투에서 사망했다. 이로써 리처드는 전투에서 사망한 마지막 영국 왕이 되었고, 헨리 튜더는 헨리 7세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1487
[스토크 전투와 장미 전쟁의 완전한 종결]
헨리 7세의 통치에 반발한 요크파 잔존 세력이 램버트 심널을 내세워 일으킨 마지막 반란으로, 튜더 왕가의 헨리 7세가 이들을 스토크 필드에서 완전히 격파하며 승리했다.이 전투는 장미 전쟁의 최종적인 종결을 확고히 하고 튜더 왕조의 안정적인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군사적 승리로 기록된다.
헨리 7세가 보스워스전투에서 승리한 이후에 그의 왕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리처드 3세의 후사가 죽었고, 환멸을 맛본 요크파로부터 특히 에드워드 4세의 왕비로부터 그가 얻어낸 지지 덕분이었다. 잉글랜드의 대영주들은 전쟁에 신물이 나 있었고 그들의 구성원의 수가 크게 줄어 몇몇 경우에는 그들의 영역 지배권이 약화되거나 아예 파괴되어 버렸다. 그 결과 헨리를 폐위시키려는 시도들은 잉글랜드에서 별로 지지를 받지 못했고, 1487년 램버트 심널(Lambert Simnel)이 그랬듯이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는 요크가문 사람들은 신망을 얻지 못했다. (From '전쟁의 결과 및 의의') and '1487년 6월 16일, 튜더 가의 헨리 7세 승리.' (From '장미 전쟁의 주요 전투'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