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셸 바스키아
연표
1960
뉴욕 브루클린에서 사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출신이고, 어머니는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이었다.
1964
4살 때 이미 읽고 쓰는 법을 익혔으며, 어머니의 격려로 맨해튼과 브루클린의 미술관을 다니며 예술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그의 선생님 호세 마차도 또한 그의 예술적 능력을 일찍이 알아보았다.
1968
교통사고가 있었던 해에 부모님이 이혼했고, 그는 두 여동생 리잔과 자닌과 함께 아버지 제라르 바스키아 밑에서 자라게 되었다.
[교통사고와 '그레이 해부학']
길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팔이 부러지고 비장절제술을 받았다. 이 경험은 훗날 그의 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8살이 되던 해인 9월, 길거리에서 놀다 차에 치여 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고 결국 비장절제술을 받았다. 회복 기간 동안 어머니가 가져다준 '그레이 해부학'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은 그에게 깊은 영감을 주며 미래의 예술적 방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73
13살 때 어머니 마틸데가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이후 병원을 전전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는 어린 바스키아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1974
[푸에르토리코 이주와 귀환]
가족은 브루클린 보럼 힐에서 5년간 살다가 푸에르토리코 산후안으로 이사했으나, 2년 만에 뉴욕으로 돌아왔다.
가족은 브루클린 보럼 힐에서 5년 동안 거주한 후 1974년 푸에르토리코 산후안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2년 후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생활했다.
1975
15살이 되던 해, 바스키아는 가출하여 톰프킨스 스퀘어 공원 벤치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는 불과 한 주 만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1977
[고등학교 중퇴와 예술 활동 시작]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에게 집에서 쫓겨난 후, 티셔츠와 직접 만든 우표를 팔며 독립적인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10학년 때 에드워드 머로 고등학교를 중퇴했다는 이유로 아버지 제라르에게 집에서 쫓겨났다. 이후 브루클린에서 친구와 함께 지내며 티셔츠와 손수 만든 우표를 팔아 자급자족했고, 이는 그의 예술적 삶의 중요한 시작점이 되었다.
1978
1970년대 후반 뉴욕 거리에서 'SAMO'라는 태그로 활동하며 독특한 스타일의 그라피티를 선보여 대중과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는 그의 초기 명성에 크게 기여했다.
1981
1980년대 초반 사이 톰블리, 장 뒤뷔페 등의 영향을 받아 신표현주의와 원초주의 기법을 결합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며 세계 미술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그의 작품은 시와 그림의 전유를 통해 이미지와 텍스트, 추상과 형체, 역사적 정보와 현대 비평을 긴밀히 결합시켰다.
1988
[향년 27세로 사망]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27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며 짧지만 강렬했던 예술 활동의 막을 내렸다.
1988년 8월 12일, 27세의 나이에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뉴욕에서 사망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현대 미술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의 작품은 사후에도 계속해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996
1996년, 줄리언 슈나벨 감독이 연출하고 제프리 라이트가 바스키아 역을 맡은 영화 '바스키아'가 개봉되어 그의 삶과 예술적 유산을 대중에게 다시금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