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와할랄 네루
연표
1889
[명문가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교육을 받다]
인도 알라하바드에서 명성 있는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영국인 가정 교사들에게 교육을 받고 영국에서 유학하며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인도 알라하바드에서 명성 있는 변호사이자 마하트마 간디의 상관 대리 중 한 명인 부친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16세 때까지 영국인 여성 가정 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잉글랜드 해로 스쿨과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런던의 이너 템플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몇 년간 법률을 실천했습니다.
1916
[카말라 카울과 결혼하여 딸 인디라 간디를 두다]
카말라 카울과 결혼하여 훗날 인도의 총리가 되는 외동딸 인디라 프리야다르시니(인디라 간디)를 두었습니다.
카말라 카울과 결혼하여 외동딸 인디라 프리야다르시니를 두었으며, 인디라는 훗날 '인디라 간디'라는 이름으로 인도의 총리를 지냈습니다. 네루의 누이 비자야 락슈미 판디트도 후에 첫 여성 유엔 총회 의장이 되는 등 그의 가족은 우등생들로 구성되었습니다.
1919
[암리트사르 대학살로 독립 운동에 투신하다]
암리트사르 대학살 사건의 참상을 접하고 영국에 대항하기로 맹세하며 인도 국민회의에 입당하여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기차 여행 중 우연히 암리트사르 대학살에 분노한 영국군 준장의 말을 듣고 영국과 싸우기로 맹세했습니다. 이 학살은 영국군이 무장 인도인 관중에 총을 쏴 379명이 살해되고 최소 1,200명이 부상당한 사건으로, 네루의 인생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인도 국민회의에 입당하며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인도의 자치와 자유를 위한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1921
[투옥과 마르크스주의 연구]
인도 국민회의의 활동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처음으로 투옥되었으며, 이후 24년간 9년 이상을 감옥에서 보내며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했습니다.
영국이 인도의 자유 요구에 쉽게 응하지 않고 인도 국민회의 활동을 금지하자, 1921년 후순 네루는 처음으로 투옥되었습니다. 그는 다음 24년간 9년 이상을 감옥에서 지내며 마르크스주의를 깊이 공부했고, 비록 모든 방법론을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경제적 사상의 배경이 되어 인도 상황에 맞춰 변형시켰습니다.
1928
인도의 해방을 위한 분투의 세월이 흐른 후, 네루는 1928년 인도 국민회의 총재가 되었습니다.
1929
인도 국민회의 총재가 된 다음 해, 네루는 라호르에서 역사적인 회합을 주도하며 인도의 정치적 목적으로서 완전한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1931
[간디-어윈 협정 참석]
마하트마 간디와 영국의 총독 어윈 경 사이에 조인된 간디-어윈 협정 조인식에 참석했습니다. 이 협정은 영국인과 인도 독립 운동 간의 휴전을 선언했습니다.
부친 사망 후, 네루는 인도 국민회의 활동에 더욱 깊이 관여하며 간디와 가까워졌습니다. 그는 1931년 3월, 간디와 영국의 총독 어윈 경에 의해 조인된 간디-어윈 협정 조인식에 참석했습니다. 이 협정은 영국인과 인도 독립 운동 간의 휴전을 선언하며, 영국은 정치범 석방을, 간디는 소금 사티아그라하 중단을 동의했습니다.
1932
간디-어윈 협정에도 불구하고 영국 통치하의 인도에서 평화가 오래가지 못했고, 네루와 간디는 둘 다 또 다른 소금 사티아그라하를 준비하려다 1932년 초순에 투옥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3차 원탁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1941
[진주만 공격 직전 석방]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옥살이를 하다가,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3일 전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석방되었습니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인 총독은 인도 국민회의와 상담 없이 인도를 전쟁에 편입시켰고, 이에 인도 국민회의는 지방 대표들을 철수시켰습니다. 간디가 제한된 소금 사티아그라하를 공개했을 때 네루는 다시 투옥되었고, 1년 약간 넘게 옥살이를 하다가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3일 전인 1941년 12월 4일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석방되었습니다.
1942
[간디와 함께 '인도를 떠나라' 운동으로 재투옥]
일본군이 인도 국경에 가까워지자, 간디의 '인도를 떠나라' 요구에 동참하여 다시 체포되어 3년 가까이 투옥되었습니다.
1942년 봄, 일본군이 인도 국경 근처로 이동하자 영국 정부는 인도를 전쟁에 편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간디는 독립보다 적은 것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영국인들에게 인도를 떠나라고 요구했습니다. 네루는 처음에는 간디의 강경 노선에 주저했지만 결국 동참하여, 둘은 다시 체포되어 이번에는 3년 가까이 투옥되었습니다.
1947
[인도 독립과 초대 총리 취임]
인도 독립 후 새로운 무슬림 국가 파키스탄이 분리되었고, 네루는 독립된 인도의 초대 총리로 취임했습니다.
1947년 네루의 석방 후 2년 만에 인도 국민회의와 전인도 무슬림 연맹 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습니다. 마지막 영국 총독 루이 마운트배튼은 통일 인도를 위한 계획 대신 인도를 분리하는 전인도 무슬림 연맹의 계획에 묵인했고, 그해 8월 새로운 무슬림 국가 파키스탄이 창조되었으며 인도는 압도적으로 힌두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영국군이 물러나고, 네루는 독립한 새 인도의 초대 총리가 되었습니다.
1948
[카슈미르 분쟁 발생]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카슈미르 지방이 영구적인 문제로 대두되었고,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분쟁은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에 의해 소유권이 주장된 카슈미르 지방은 네루의 지도력을 통하여 영구적인 문제였습니다. 분쟁을 처리하려는 그의 조심성 있는 노력들은 궁극적으로 실패하여 1948년 파키스탄 군대에 의한 카슈미르 소유 시도가 비성공적으로 끝났고, 그 지방은 21세기에 들어서도 분쟁 지역으로 남아있습니다.
1949
[비동맹 운동 공동 창립]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비동맹 정책'을 주도하며 '비동맹 운동'을 공동 창립했습니다.
1940년대 후반에 시작되면서 미국과 소련은 냉전에서 인도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네루는 인도가 번영하기 위해 어느 한쪽의 국가에 제휴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비동맹 정책'을 이끌었습니다. 이로 인해 네루는 중립을 공헌하는 국가들의 '비동맹 운동'을 공동 창립했습니다.
1951
1951년부터 이듬해 1952년까지, 네루는 당시 대통령 라젠드라 프라사드를 보좌하며 1년간 인도 국정의 실권을 전담했습니다.
1962
[인도-중국 전쟁 발발 및 종결]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을 승인하고 유엔 가입을 주장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추구했으나, 국경 분쟁으로 인도-중국 전쟁이 발발하고 그 해 중공이 정전 선언 후 철수하며 종결되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을 승인하고 유엔 가입을 주장하는 등 이웃 국가와 온정 있고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평화주의적이고 포괄적인 정책에도 불구하고 국경 논쟁들이 결국 1962년 인도-중국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그해 11월 20일 정전을 선언하고 히말라야 산맥의 논쟁 지역으로부터 철수하며 전쟁이 종결되었습니다.
1964
[심근경색으로 영면하다]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장기적 열정과 업무를 기려 그의 생일인 11월 14일은 '어린이의 날'로 기념됩니다.
1964년 5월 27일, 네루는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습니다. 다음 날 그는 야무나강의 샨티반에서 힌두교 의식에 따라 화장되었습니다. 그의 국내 정책의 중심 세력은 민주주의, 사회주의, 단일성, 세속주의였으며, 총리 재직 동안 이 네 가지를 강력히 유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의 조국을 섬기는 동안 그는 존경받는 지위를 누렸고, 그의 관념주의와 정치적 수완으로 국제적으로도 널리 존경받았습니다. 그의 생일인 11월 14일은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위한 그의 장기적인 열정과 업적을 기려 '바알 디바스'(어린이의 날)로 축제가 벌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