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승 (승려)
연표
1954
[강원도 춘천에서의 탄생]
자승 스님은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속명은 이경식으로 알려져 있으며,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이 아이가 훗날 한국 불교의 거대한 흐름을 바꿀 총무원장이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강원도 춘천 지역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명석한 두뇌를 가졌다고 전해집니다.
성장 과정에서 종교적인 갈망을 느끼며 자연스럽게 불교적 가치관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가 훗날 세속의 행정 원리를 불교 종단에 접목하는 기초적인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72
[해인사에서의 사미계 수지]
해인사에서 자천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사미계를 받으며 본격적인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세속의 인연을 뒤로하고 불문에 귀의한 그는 수행자로서의 기본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법명인 '자승'은 이때부터 그의 새로운 이름이 되었습니다.
법보종찰 해인사에서의 출가는 그에게 불교의 정통성을 익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은사 자천 스님의 가르침 아래 초심자로서의 고된 행자 생활을 훌륭히 견뎌냈습니다.
이 시기 맺은 종단 내 인맥과 경험은 훗날 그가 종단 행정의 중심에 서는 데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1974
[범어사에서 구족계 수지]
범어사에서 선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며 조계종의 정식 비구 승려가 되었습니다. 비구로서의 자격을 갖춘 그는 수행의 깊이를 더함과 동시에 종단 운영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단순한 수행자를 넘어 행정가로 발돋움하는 전환점이었습니다.
금정총림 범어사에서의 구족계 수지는 그가 종단의 공식적인 일원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구족계를 통해 비구로서 지켜야 할 계율을 가슴에 새기며 불교 중흥의 원력을 세웠습니다.
이후 그는 여러 선원과 강원을 거치며 교학과 수행을 병행하는 정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1986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불교 종립학교인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며 학문적 토대를 완성했습니다. 수행과 더불어 현대적인 불교 학문을 접하며 종단의 발전 방향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대학에서의 배움은 그가 훗날 교육 행정가로서 활동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동국대학교 재학 시절 그는 학문적 탐구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인 스님들과 교류하며 리더십을 키웠습니다.
전통적인 불교 수행에 현대적인 학문 체계를 접목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졸업 후 그는 종단 내부의 실무직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행정 승려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1991
[은해사 주무직 임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주무직을 맡아 사찰 행정의 실무를 책임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찰의 재무와 행정을 총괄하며 경영적인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은해사에서의 성공적인 업무 수행은 종단 중앙 무대로 진출하는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습니다.
은해사는 자승 스님의 정치적 고향과도 같은 곳으로, 이곳에서 그는 종무 행정의 핵심을 파악했습니다.
주무로서 사찰의 살림을 규모 있게 정리하여 대중 스님들로부터 큰 신임을 얻었습니다.
이 시기 보여준 추진력은 그가 훗날 '조계종의 실력자'로 불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2
[제10대 중앙종회의원 당선]
조계종의 대의기구인 중앙종회의 의원으로 당선되며 중앙 정계에 공식 데뷔했습니다. 종단의 입법 과정에 참여하여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며, 정치적 감각을 익혔습니다. 이는 그가 훗날 총무원장에 오르기까지 거쳐야 했던 중요한 정치적 과정이었습니다.
중앙종회 입성은 그가 지역구인 은해사를 넘어 종단 전체의 이슈를 다루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젊은 의원으로서 패기 있는 제안과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종단 내 다양한 파벌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탁월한 정치력을 처음으로 선보인 시기입니다.
1994
[종단 개혁회의 위원 활동]
조계종의 역사적인 전환점이었던 94년 종단 개혁 당시 개혁회의 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 낡은 종단 체제를 타파하고 현대적인 행정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힘을 보탰습니다. 이 시기의 개혁 정신은 그가 총무원장이 된 후 펼친 정책들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서의현 총무원장 체제의 문제점에 맞서 종단의 민주화와 자정을 요구하는 개혁 세력의 일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개혁회의 위원으로서 새로운 종헌 종법의 기틀을 마련하는 실무 작업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94년 개혁은 그에게 종단 권력의 속성과 변화의 필요성을 동시에 일깨워준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1996
[제11대 중앙종회의원 재선]
제11대 중앙종회의원으로 재선되며 입법부 내에서의 입지를 더욱 탄탄히 굳혔습니다. 연속적인 의정 활동을 통해 종단 내 주요 인사들과 강력한 네트워크를 형성했습니다.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이 시기를 거치며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성장했습니다.
재선 의원으로서 종회 내 주요 상임위원회에서 활동하며 행정 감시 기능을 강화했습니다.
종단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여러 법안을 발의하며 정책 전문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냈습니다.
이 시기부터 그는 차기 종단을 이끌 리더 중 한 명으로 꾸준히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1998
[총무원 재무부장 임명]
총무원의 살림을 책임지는 재무부장 직책에 임명되어 종단 전체의 자금을 관리했습니다. 투명한 회계 시스템 도입을 위해 노력했으며, 종단의 경제적 자립 기반을 연구했습니다. 재무부장으로서의 성과는 그가 행정 수반이 될 수 있는 실무 능력을 증명한 것입니다.
종단의 방대한 자산 관리 체계를 정비하여 효율적인 운영을 도모했습니다.
재무 행정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외부 회계 전문가들과 협업하는 등 혁신적인 시도를 했습니다.
재무부장 재임 시절의 성공적인 평가는 그가 종단 내 실세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2002
[은해사 주지 취임]
고향과도 같은 은해사의 주지로 취임하여 교구 본사를 책임지고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지역 포교 활성화와 사찰 중창을 통해 은해사의 위상을 크게 높였습니다. 교구 본사 주지로서의 경험은 종단 전체를 아우르는 리더십을 실험하는 장이 되었습니다.
은해사 주지로서 지역 사회와의 소통을 강화하고 불교 복지 사업을 확대했습니다.
사찰 내 수행 환경을 정비하고 학인 스님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 교구의 화합을 이끌었습니다.
이 시기의 탁월한 교구 운영 능력은 훗날 총무원장 선거에서 큰 지지 기반이 되었습니다.
2006
[제14대 중앙종회 의장 당선]
제14대 중앙종회의 의장으로 선출되며 종단 입법부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종회 운영을 안정적으로 이끌며 각 계파 간의 갈등을 조율하는 중재자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종회 의장직은 그가 총무원장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과도 같았습니다.
의장으로서 권위보다는 소통을 중시하며 종회 내 민주적인 토론 문화를 정착시켰습니다.
종단 운영의 핵심적인 법안들을 처리하며 총무원과의 긴밀한 협력을 이끌어냈습니다.
이 시기에 보여준 강력한 카리스마와 포용력은 종단 구성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2009
[제33대 총무원장 당선]
조계종 선거인단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제33대 총무원장에 당선되었습니다. '소통과 화합, 포교의 종단'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가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최고 행정 책임자의 자리에 올랐음을 선포한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역대 최다 득표 수준의 지지로 당선되어 종단 안정에 대한 높은 기대감을 반영했습니다.
취임사에서 그는 낮은 자세로 사부대중과 소통하며 불교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당선으로 자승 스님은 명실상부한 조계종의 1인자로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2010
[남북 불교 교류를 위한 방북]
민족 화해와 남북 불교 교류 활성화를 위해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북한 조선불교도련맹 관계자들과 만나 종교적 협력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이는 경색된 남북 관계 속에서도 종교가 평화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 행보였습니다.
평양 방문 중 법운암 등을 참배하며 남북 공동 기원문을 발표하는 등 평화 의지를 다졌습니다.
금강산 신계사 복원 이후 유지 관리 문제와 인도적 지원 사업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했습니다.
그의 방북은 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한 불교계의 선도적인 역할을 대외적으로 천명한 사례였습니다.
2011
[공익법인 '아름다운 동행' 활성화]
종단 차원의 공익법인인 '아름다운 동행'을 통해 대규모 나눔 사업을 전개했습니다. 자비 나눔의 정신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며 불교의 대중적 이미지를 개선했습니다. 이를 통해 조계종은 단순한 종교 단체를 넘어 사회 복지의 주체로 우뚝 섰습니다.
아이티 지진 피해 지원 등 국내외 재난 구호 현장에 불교계의 정성을 직접 전달했습니다.
저소득층 지원과 교육 장학 사업을 대폭 확대하여 종단의 사회 기여도를 높였습니다.
자승 스님은 직접 모금 현장에 나서는 등 자비 실천에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2012
[백양사 도박 사건 대국민 참회]
일부 승려들의 도박 사건으로 종단이 위기에 처하자 대국민 참회문을 발표하고 108배 참회를 진행했습니다. 종단 내부의 도덕적 해이를 인정하고 뼈를 깎는 쇄신을 약속했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리더십에 큰 타격을 주었으나 동시에 강도 높은 개혁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계사 대웅전에서 매일 새벽 108배를 하며 종단 구성원들의 자성을 촉구했습니다.
쇄신위원회를 구성하여 승가 공동체 회복을 위한 5대 쇄신 과제를 발표했습니다.
이 시기는 그가 겪은 가장 큰 정치적 위기 중 하나였으나 정면 돌파를 통해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2013
[제34대 총무원장 재선 당선]
치열한 선거전 끝에 제34대 총무원장에 당선되며 20년 만에 총무원장 연임에 성공했습니다. 종단 운영의 연속성과 안정을 바라는 표심이 그를 다시 선택했습니다. 연임을 통해 그는 추진해오던 종단 개혁 과제들을 완수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습니다.
연임 도전 과정에서 반대 세력의 거센 저항이 있었으나 탁월한 조직력으로 승리했습니다.
당선 소감에서 그는 '종도들의 뜻을 받들어 종단을 더욱 안정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이 재선은 자승 스님이 조계종 역사상 손꼽히는 강력한 권력을 쥐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2014
[세월호 참사 희생자 추모 활동]
세월호 참사 발생 직후부터 유가족을 위로하고 종단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을 지시했습니다. 팽목항 현장에 봉사단을 파견하고 희곡자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법회를 봉행했습니다.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종교의 위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안산 정부합동분양소를 직접 찾아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슬픔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범국민 추모제에 참석하여 사회적 치유와 진상 규명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이 시기 불교계의 헌신적인 활동은 유가족과 대중들에게 깊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2015
[바티칸 방문 및 교황 알현]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 종교 간 화합과 세계 평화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한국 불교의 수장으로서 가톨릭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외교적 행보를 보였습니다. 이는 이웃 종교와의 상생을 추구하는 그의 열린 태도를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교황과의 만남에서 한반도 평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당부하고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후 로마 내 주요 성지를 방문하며 종교 간 대화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이 행보는 국제 무대에서 한국 불교 조계종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2017
[제34대 총무원장 임기 만료]
8년간의 총무원장 임기를 모두 마치고 박수 속에 퇴임했습니다. 조계종 역사상 드문 임기 만료 퇴임으로, 종단의 행정적 안정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퇴임 후 그는 일선 행정에서 물러나 새로운 형태의 포교 운동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퇴임사에서 그는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다시 수행자로 돌아가겠다'는 소회를 밝혔습니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종단 재정 안정과 포교 시스템 현대화라는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퇴임 후에도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종단 내외에서 막대하게 유지되었습니다.
2018
[동국대학교 명예총장 위촉]
모교인 동국대학교의 명예총장으로 위촉되어 학교 발전을 위한 자문 역할을 맡았습니다. 대학 교육의 혁신과 불교 인재 양성을 위해 힘을 보탰습니다. 행정 승려로서의 경험을 교육 현장에 전수하며 후학들을 격려했습니다.
학교 법인과의 가교 역할을 하며 대학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책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장학금 기부 활동을 독려하고 대학 기금 모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 시기의 활동은 그가 학교 운영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는 예고편이기도 했습니다.
2019
[위례 상월선원 천막결사 시작]
위례 신도시 들판에 천막을 치고 9명의 스님과 함께 혹독한 동절기 수행에 들어갔습니다. '상월결사'의 시작으로, 씻지도 눕지도 않는 극한의 수행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침체된 한국 불교에 강력한 수행의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파격적인 시도였습니다.
난방 시설 없는 천막에서 묵언과 하루 한 끼 공양만으로 90일을 버티는 고행을 감행했습니다.
수많은 불자들이 현장을 방문하여 응원과 기도를 이어가는 등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 결사는 훗날 '상월결사'라는 거대한 포교 운동의 기점이 되었습니다.
2020
[상월결사 걷기 순례 시작]
수행의 장소를 길 위로 옮겨 한국 불교 중흥을 위한 순례단을 결성하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코로나19로 지친 국민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불교의 생동감을 알리려 노력했습니다. 순례는 곧 대중 포교의 새로운 브랜드로 자리 잡았습니다.
매일 새벽부터 수십 킬로미터를 걸으며 대중과 직접 눈을 맞추는 포교를 실천했습니다.
'상월결사 인도순례'를 위한 예비 순례 성격으로 진행되어 조직력을 다졌습니다.
단순한 걷기가 아닌 명상과 기도를 결합한 수행 모델을 확립해 나갔습니다.
2021
[삼보사찰 순례단 출범]
한국 불교의 뿌리인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를 잇는 대규모 걷기 순례를 주도했습니다. 전통 문화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종단의 화합을 도모하는 대장정이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순례객들과 함께 불교 중흥의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총 400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강행군을 끝까지 완주하며 강인한 체력과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각 사찰에 도착할 때마다 성대한 법회를 열어 불자들의 신심을 고취시켰습니다.
이 순례를 통해 그는 '길 위에서 포교하는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굳혔습니다.
2022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이사장 취임]
학교법인 동국대학교의 제42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교육 행정의 정점에 섰습니다. 대학의 글로벌 경쟁력 확보와 불교 교육의 현대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종단 행정의 경험을 대학 운영에 접목하여 혁신적인 변화를 예고했습니다.
취임 후 대학 발전 기금의 대대적인 확충과 캠퍼스 시설 현대화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산하 병원들의 의료 시스템을 개선하고 환자 중심의 불교 의료 문화를 선도했습니다.
이사장으로서 그는 대학 구성원들과의 활발한 소통을 통해 학내 안정에 기여했습니다.
[건국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 수여]
종교 간 화합과 사회 복지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건국대학교에서 명예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불교 종립학교가 아닌 일반 사립대학에서 그의 공로를 인정한 이례적인 사례였습니다. 이는 그의 행정적 능력이 세속의 학문적 기준에서도 높이 평가받았음을 뜻합니다.
수여식에서 그는 '종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사회의 어두운 곳을 밝히는 데 일조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학위 수여는 그가 펼쳐온 다양한 사회 공익 활동들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이었습니다.
많은 내빈이 참석하여 그의 박사 학위 수여를 축하하며 불교계의 위상을 실감케 했습니다.
2023
[상월결사 인도·네팔 순례 출정]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와 네팔의 성지 1,167km를 걷는 대장정에 올랐습니다. 43일간의 고행을 통해 한국 불교의 포교 원력을 세계만방에 알렸습니다. 폭염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단 한 명의 탈락자 없이 순례를 마치는 기적을 연출했습니다.
순례단은 매일 30km 이상을 걸으며 부처님의 고행 정신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인도 현지인들과 소통하며 한국 불교의 자비 정신을 전파하는 민간 외교관 역할을 했습니다.
순례의 마지막 날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회향식은 수만 명의 불자가 모인 축제의 장이 되었습니다.
[봉선사 회주 및 상월결사 회주 추대]
남양주 봉선사의 회주로 추대되어 지역 포교의 큰 스승으로 모셔졌습니다. 동시에 상월결사의 회주로서 한국 불교 포교의 선봉장 역할을 지속했습니다. 행정의 권력자에서 정신적 지도자로 그 위치가 자연스럽게 이동한 시기였습니다.
회주로서 대중들에게 법문을 설하며 수행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일깨웠습니다.
청년 불자 양성을 위한 '상월청년단'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며 미래 불교를 준비했습니다.
이 시기 그의 활동은 포교의 패러다임을 '찾아가는 불교'로 바꾸는 데 주력했습니다.
[안성 칠장사에서 홀연히 입적]
안성 칠장사 내 요사채에서 발생한 화재 현장에서 입적한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불교계와 국민들은 큰 충격에 빠졌으며 현장에서는 유서가 발견되었습니다. 평소 불교 중흥에 매진하던 중 맞이한 충격적인 최후였습니다.
발견된 유서에는 종단 화합과 부처님 법 전파를 당부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입적 직전까지도 대학생 포교와 불교 중흥을 위한 회의를 주재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다양한 추측이 오갔으나 종단은 그가 '소신공양'의 원력으로 입적했음을 공식화했습니다.
[조계사에서 엄수된 영결식]
서울 조계사에서 사부대중 수만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불교조계종 종단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종정 스님과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 인사가 참석하여 그의 마지막 길을 추모했습니다. 영결식은 그가 종단에 남긴 거대한 족적을 기리는 장엄한 의식이었습니다.
전국 각 사찰에는 분향소가 설치되어 추모의 물결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추도사를 통해 그의 업적인 종단 안정과 포교 혁신이 다시 한번 높게 평가받았습니다.
영결식 이후 운구 행렬은 그의 법구가 화장될 은해사 연화대로 향했습니다.
[은해사에서의 다비식]
자승 스님의 정치적 고향이자 수행처였던 은해사에서 다비식이 엄수되었습니다. 거대한 불길 속에 그의 법구가 사그라지는 것을 보며 대중들은 통곡과 염불로 작별했습니다. 불과 함께 그의 생전의 모든 고뇌와 영광은 한 줌의 재로 돌아갔습니다.
다비 현장에는 수천 명의 불자들이 운집하여 스님의 극락왕생을 간절히 기원했습니다.
거화 선언과 함께 '스님 불 들어갑니다!'라는 외침이 산속을 가득 메웠습니다.
다비 후 수습된 유골과 사리는 그가 남긴 수행의 결실로 조심스럽게 봉안되었습니다.
2024
[49재 막재 및 유훈 계승 선포]
입적 49일을 맞아 봉선사와 조계사 등에서 마지막 재가 엄숙히 봉행되었습니다. 종단은 자승 스님이 남긴 '전법'의 유훈을 계승하여 포교 역량을 강화하겠다고 공식 선포했습니다. 그의 죽음이 끝이 아닌 새로운 전법 운동의 시작임을 알리는 자리였습니다.
49재에는 수많은 정관계 인사들이 참석하여 고인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빌었습니다.
그가 생전에 추진했던 대학생 포교 기금이 대폭 확충되는 성과를 보였습니다.
이로써 자승 스님은 육신은 떠났으나 그의 정신은 한국 불교의 포교 현장에 남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