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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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국사, 근현대사, 식민 지배, 군정 + 카테고리

1910년 한일병합부터 1945년 광복까지 한반도가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하에 있던 약 35년간의 시기입니다.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어 무단통치 문화통치 민족말살통치 등 다양한 형태로 식민 지배를 펼쳤습니다. 이 시기 국내외에서 격렬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고 일본의 수탈 정책으로 사회경제적 변화를 겪었습니다. 특히 토지조사사업 산미증식계획 강제 징용 및 위안부 동원 등 일제의 잔혹한 정책이 시행되었습니다.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독립을 맞이했으나 곧바로 미소 군정 시대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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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76

[조선 개방, 일본의 야심 드러나다]

일본이 조선과의 수교를 명분으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며 조선 합병을 위한 장기적 계획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이는 향후 한반도 지배를 위한 일본 제국의 치밀한 계산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일본은 1894년 청일 전쟁과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며 한반도 합병을 가시화했고, 영일 동맹 및 태프트-가쓰라 밀약 등을 체결하며 한국 진출을 본격화했습니다.

1905

[을사늑약 체결, 대한제국의 외교권 상실]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습니다.

이는 대한제국이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며 식민 지배가 가시화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어 한일신협약(1907)과 기유각서(1909) 등으로 대한제국의 배타적 권리를 점점 흡수하며 식민 지배를 위한 발판을 더욱 확고히 했습니다.

1909

[일본, 한국 강제 합병 공식 결정]

일본 내각에서 한국 강제 흡수가 결정되며 한반도 식민화를 향한 일본의 노골적인 야욕이 공식화되었습니다.

이는 조약이라는 형식적 절차를 넘어선 침략의 본심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의 한국 합병 계획에 불을 지피는 명분이 되었으나, 동시에 한국인의 강력한 저항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윤치호는 당시 이를 두고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한일 합방 가속화의 빌미로 사용 되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1910

[한일병합조약 체결, 대한제국 멸망과 일제강점기 시작]

한일병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며 대한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한반도는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되었습니다.

35년간 이어진 일제강점기의 서막이 올랐으며, 한국은 통치 기구인 조선총독부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황제를 '이왕'으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조선총독부, 헌병경찰 앞세운 '무단통치' 시작]

한일 합병 직후 조선총독부가 헌병 경찰을 창설하며 무단통치에 돌입했습니다.

헌병이 일반 치안과 행정까지 장악하고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를 철저히 제한하는 등 한국인에게 극심한 억압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총독은 일본 천황에 직속되어 입법, 사법, 행정, 군대 통솔권까지 장악했고, 특히 조선 태형령을 부활시켜 한국인에게만 차별적으로 적용했습니다. 1911년 신민회 해산을 주도한 '105인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1912

[토지조사사업 강행, 조선 농민의 땅을 빼앗다]

일본은 식민지 재정 확보와 일본인 이민자들의 토지 수탈을 위해 토지조사사업을 강행했습니다.

기한부 신고제에 익숙지 않은 농민들의 토지 소유권이 박탈되고, 소유권이 불분명한 토지들이 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넘어갔습니다.

이로 인해 약 10만 건의 소유권 분쟁이 있었고, 13만 5천 정보의 역둔토와 4만 6천여 정보의 민유지가 총독부 소유가 되었습니다. 결국 자작농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일본 기업이 중요 산업을 독과점하며 한국은 원료 공급지로 전락했습니다.

1919

[전국을 뒤흔든 '대한 독립 만세!' 3.1 운동]

민족자결주의 영향 아래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 운동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200만 명이 넘는 민중이 참여한 이 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고 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약 2개월간 전국 229개 부·군에서 1,491건의 시위가 벌어졌고, 160개가 넘는 일제 통치 기관이 파괴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기반이 되었고, 항일 무장 투쟁을 촉진하며 복벽주의 청산 및 사회주의 사상 수용 등 독립운동 노선의 다양화를 가져왔습니다.

[일제의 통치 방식 변화, '문화통치' 선언]

3.1 운동 후 일본은 기존 무단통치의 한계를 인식하고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파견하며 '문화통치'를 내세웠습니다.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바꾸고 단체 활동을 일부 허용했으나, 이는 독립운동을 회유하고 분열시키기 위한 기만적인 통치 방식이었습니다.

경찰 수와 장비는 오히려 강화되었고, '고등 경찰제'와 치안 유지법을 도입해 독립 운동을 막았습니다. 민립대학 설립 운동 탄압, 신문 검열 등 민족주의 억압은 지속되었습니다.

1920

[사회 변화의 물결, 자유 연애와 이혼의 시대]

1920년대 서양 문물 유입과 함께 신여성, 모던보이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연애 풍조와 이혼이 사회 현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유교적 가치관에 반기를 들고 개인의 선택과 행복을 중시하는 새로운 사회상이 나타났습니다.

특히 '사의 찬미' 음반이 최초 10만 장 돌파를 기록할 만큼 연애가 대중의 관심을 끌었고, 1917~1918년 이혼 건수가 1만 건을 넘어 일제강점기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나혜석, 박인덕 등 여성 운동가들의 이혼 고백은 큰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홍범도 장군, 봉오동에서 일본군 대파!]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북간도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매복하여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는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무장 투쟁이 거둔 최초의 대규모 승리였습니다.

이 승리는 이후 청산리 전투의 기반이 되었으며, 국내외 독립운동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일제는 이에 독립군 뿌리 뽑기를 결심하고 대규모 토벌에 나섰습니다.

[김좌진·홍범도 장군, 청산리에서 일제에 치명타]

김좌진,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던 독립군 연합 부대가 청산리에서 일본군 1,500여 명을 살상하는 세계적인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봉오동 전투에 이은 연이은 쾌거로,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후 독립군들은 일제의 토벌에 밀려 소련으로 이동했으나, 여기서 자유시 참변을 겪으며 큰 시련을 맞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주 지역에서 3부(정의부, 참의부, 신민부)를 조직하며 재정비에 나섰습니다.

1921

[민족 교육 열망! 민립대학 설립 운동 시작]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등 민족 지도자들이 민족 교육을 위한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인 모금 운동에 나섰습니다.

이는 일본의 식민 교육에 맞서 민족 자본으로 고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려던 실력 양성 운동의 일환이었습니다.

하지만 총독부의 탄압과 1923년 관동대지진, 잇따른 가뭄과 홍수 등으로 모금이 지지부진해지면서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웠습니다.

1923

['내 것'을 지키자! 물산장려운동 확산]

조만식, 안재홍, 송진우 등이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이라는 구호 아래 국산품 애용을 호소하는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했습니다.

이는 일본 자본의 침투에 맞서 민족 경제를 지키려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실력 양성 운동의 일환으로 민족 기업을 보호하고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려 했으나, 일제의 탄압과 경제 공황 등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1924

[조선방송공사 개통, 라디오 시대의 서막]

경성에서 조선방송공사가 개통되며 한반도에 라디오 방송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는 정보 전달과 대중 문화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1930년대 이후에는 읍면 단위 일반 가정까지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텔레비전은 군 단위 이하에는 거의 보급되지 않아 시청률이 극히 저조했습니다. 일제는 단파 방송 청취를 엄중히 단속했으나, 단파 방송 밀청 사건처럼 독립운동 차원에서 정보를 듣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1926

[학생과 천도교의 연대, 6·10 만세 운동]

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학생들이 주도하고 사회주의 및 천도교 세력이 연대한 대규모 만세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3.1 운동 이후 국내 최대 규모의 항일 시위 중 하나로, 독립운동 세력의 연대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연대를 촉진했으며, 이후 신간회 결성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7

[민족 좌우 합작의 결실, 신간회 탄생]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 세력이 손을 잡고 신간회를 결성했습니다.

전국적으로 143개의 지회를 조직하고 2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며 당시 대중 운동을 주도하고 지원하는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 단체로 성장했습니다.

신간회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 촉진, 단결 공고, 기회주의 일절 부인'을 강령으로 삼아 광주학생항일운동 진상 조사 및 대규모 민중 대회 준비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일제의 탄압과 내부 이념 갈등으로 1931년 해소되었습니다.

1929

[일제 식민 교육에 맞선 광주학생항일운동]

광주에서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간의 충돌을 계기로 전국적인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신간회가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고 지원하면서 이는 3.1 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학생 운동으로 발전하여 일제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 운동은 학생들을 민족 운동의 중심으로 부각시켰으며, 농민, 노동자, 여성 운동 활성화에도 기여했습니다.

1930

[경제 공황과 개인주의, 만혼·독신자 등장]

경제 공황과 함께 근대적 개인주의 사조가 유입되면서 만혼과 독신자가 사회 현상으로 떠올랐습니다.

'혼자 살기도 어려운 세상에 아내까지 얻을 수 없다'는 경제적 이유와 여성의 자의식 확산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나혜석, 이광수 등이 참여한 '만혼타개좌담회'가 열릴 정도로 사회적 논의가 활발했으나, 보수층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향은 지속되었습니다.

1931

[농촌 계몽운동, '브나로드 운동' 펼치다]

김성수, 송진우, 이광수 등이 동아일보의 후원을 받아 농촌 문맹 퇴치와 계몽을 위한 '브나로드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기치 아래 수많은 청년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향해 교육 봉사활동을 펼쳤습니다.

이 운동으로 한국인의 문자 식자율은 1910년 10%에서 1936년 무렵 65%까지 상승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1938년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습니다. 이는 해방 후 대한민국 대학의 농촌 봉사활동(농활)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일제의 대륙 침략 본격화, 만주사변 발발]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중국 대륙 침략을 본격화했습니다.

한반도는 일본의 대륙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이용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의 경제적 지배 정책도 병참 기지화로 선회되었습니다.

사상 통제가 더욱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제는 대공황 이후 원료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에 남면북양 정책을 수립하고 북부 지역에 군수산업을 대거 건립했습니다. 중일 전쟁 이후 미곡공출제가 시행되며 한국인들의 식량난이 심각해졌습니다.

1932

[이봉창 의사, 일왕 암살 시도 '대형 의거']

이봉창 의사가 일본 도쿄에서 일본 국왕에게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감행했습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이 사건은 해외 동포들에게 큰 감동과 격려를 주며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이끌어냈습니다.

이 의거는 김구 선생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으며, 이후 윤봉길 의거로 이어지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다시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상하이 홍커우 공원, 윤봉길 의사의 쾌거]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군 사령관 등을 폭살하는 의거를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은 중국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협력 대상으로 인식하고 지원을 시작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세계를 놀라게 한 대형 의거였습니다.

김구 선생이 주도한 이 의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고, 이후 충칭으로 본거지를 옮기며 한국광복군을 창설할 수 있었습니다.

1938

[중국 관내 최초의 한인 무장 부대, 조선의용대 창설]

김원봉 등이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중국 관내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했습니다.

이들은 일본군 심리전, 첩보 활동 등 대일 항전에서 큰 활약을 펼치며 무장 독립 투쟁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조선의용대의 주력 부대는 1941년 화베이지방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팔로군과 협력하여 호가장 전투, 반소탕전 등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습니다.

1939

[조선인의 이름을 빼앗는 '창씨개명' 강요 시작]

조선총독부가 일본식 성과 이름을 강제하는 '창씨개명' 법령을 개정했습니다.

이는 한국인의 민족 정체성을 말살하려던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의 핵심이었으며, 한국 사회에 큰 혼란과 저항을 불러왔습니다.

총독 미나미 지로의 개인 정책으로 추진되었으나, 일본 내부와 총독부 내부에서도 강한 반발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0년 2월 11일부터 강제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1940

[창씨개명 강제 단행, 민족 말살 정책의 상징]

조선총독부가 강제적인 창씨개명 정책을 대대적으로 시행했습니다.

일본 내부는 물론 총독부 내부에서도 반발이 있었지만, 총독부는 행정력과 경찰력을 총동원하여 한국인에게 일본식 성과 이름으로 바꾸도록 협박하고 강요했습니다.

일부 친일 인사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하기도 했으나, 대다수는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이름을 바꿨으며, 심지어 이를 거부하고 자결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신고 마감 시기까지 80%에 달하는 322만 가구가 창씨개명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 한국광복군 창설]

중국 충칭에 안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일 항전의 의지를 담아 한국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이는 임시정부의 침체기를 극복하고 독립운동의 구심점을 재확립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광복군은 1942년 화베이로 가지 않은 조선 의용대 잔류 부대를 흡수하며 전력을 보강했고, 연합군으로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는 등 독립을 위한 활발한 군사 활동을 펼쳤습니다.

1941

[한국광복군, 연합군으로 참전! 대일 선전포고]

태평양 전쟁이 확대되자 한국광복군이 연합군에 가담하고 일본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한국이 일본 제국에 맞서 국제사회에서 당당한 전쟁 주체임을 선언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광복군은 1943년 미얀마 전선에 파견되어 영국군을 돕는 등 실제 전투에 참여하며 독립을 위한 노력을 이어갔습니다. 본국 탈환 작전을 준비하던 중 일본의 패전을 맞이했습니다.

1942

[일제, 조선어학회 탄압! 한글 말살 시도]

일제는 조선어학회 주요 구성원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하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한국어 연구와 교육을 탄압하고 한글 사용을 금지하여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던 일제의 잔혹한 시도였습니다.

학교에서의 한국어 교육은 중단되었고, 일본어 사용이 강요되었습니다. 이는 해방 당시 남한 인구의 78%가 한글 문맹이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는 교육적 차별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1945

[일제 말기, 한국인 참정권 제한적으로 허용]

일본 의회에서 한국인의 참정권을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이는 일본이 전쟁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한국으로부터 더 많이 조달하기 위해 한국인의 요구를 마지못해 수용한 결과였습니다.

귀족원 의원 칙임과 중의원 선출 계획이 포함되었으나, 일본 본국 출신 의원과 달리 임기가 7년으로 제한되는 등 차별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8월 일본의 패전으로 전면 백지화됩니다.

[일본 패전과 함께 찾아온 감격적인 광복!]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이 패전하며 한반도는 마침내 35년간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을 맞이했습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민중의 염원이 결실을 맺은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즉시 철수하지 않고 미소 군정이 들어서기 전까지 지배 상태를 유지했으며, 곧이어 남북 분단의 비극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해방의 서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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