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
연표
1575
1575년 심의겸과 김효원이 후임 이조정랑직을 놓고 다툰 사건을 계기로 사림파는 서인과 동인으로 분파하며 본격적으로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붕당시작의 근본 원인은 당시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훈구 정치의 청산과 향후 국정운영의 방법의 차이를 놓고 후배 세대와 선배 세대의 입장 차이에 있었다.
1584
[율곡 이이 사망과 동인 득세]
동인과 서인의 화합을 위해 노력했던 율곡 이이가 사망하자 선조가 동인을 가까이하며 동인이 득세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인과 서인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던 율곡 이이가 1584년에 죽은 후, 선조가 동인을 가까이함에 동인이 득세하였다.
1589
1589년에 기축옥사가 벌어져 서인 출신의 정철이 취조과정에서 많은 동인들을 옥사시킴으로 동인들이 감정을 품게 되었다.
1591
[정철 실각과 동인 분열]
정철이 광해군 세자 책봉을 주청하다 선조의 진노를 사 실각하며 서인들이 몰락했다. 이후 동인들은 서인 처결 문제로 북인과 남인으로 분열되었습니다.
1591년에 정철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주청하다가 선조의 진노를 사서 실각하며 서인들이 대거 몰락하였다. 다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들은 서인에 대한 처결문제 있어서 강경하게 대처하자는 북인과 온건한 처결을 주장하는 남인으로 갈리게 되었다.
1606
[영창대군 출산으로 후계 구도 복잡화]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가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자, 선조가 서자인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의중을 보이면서 후계구도가 복잡해졌습니다.
임진왜란중에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606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적자)을 낳자, 후계구도가 복잡해졌다. 선조가 서자인 광해군을 폐하고 적자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듯한 의중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1608
[광해군 즉위와 대북파 득세]
선조 사망 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가 득세하고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파는 몰락했습니다.
1608년, 선조가 사망한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파가 득세하고 소북파는 몰락하였다.
1613
[계축옥사 및 폐모살제]
계축옥사가 일어나 이복동생 영창대군이 죽고, 인목대비는 폐비되어 서궁에 유폐되는 폐모살제(廢母殺弟)가 일어났습니다.
광해군이 친형 임해군을 사사했으며,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가 일어나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폐비시켜 서궁에 유폐하였다.
1620
폐모살제(廢母殺弟)의 패륜 행위는 김류, 김자점, 이귀, 이괄, 심기원 등 서인들에게 좋은 명분이 되어주었다. 1620년(광해군 12년) 신경진과 김류가 처음으로 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했고, 이서와 이귀·김자점·최명길과 그의 형 최내길 등이 이에 동조했다.
1623
[인조반정 성공 및 광해군 폐위, 대북파 숙청]
김류, 이귀 등 서인 일파가 능양군을 주축으로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광해군이 폐위되고 대북파 핵심 인물들이 대거 숙청되었으며, 능양군은 인목대비로부터 국왕 즉위 승인을 받아 정당성을 확보했습니다.
1623년 4월 11일 밤, 능양군을 주축으로 한 서인 세력이 반정을 일으켰다. 이들은 2,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으로 진격하여 내응 세력의 도움으로 반정에 성공했다. 광해군은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가 곧 체포되어 폐주로 강등,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폐동궁 이지도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이이첨, 정인홍, 유희분 등 대북파 핵심 40여 명이 참수되고 200여 명이 귀양 가는 등 대규모 숙청이 이루어졌다. 능양군은 경운궁의 인목대비에게 찾아가 국왕의 인장과 즉위 명령을 받아내 국왕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했으며,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36가지 죄목을 나열하며 폐모살제의 부당함을 강조했다.
1624
[이괄의 난 발생]
그는 논공행상 불만과 역모 고변에 아들을 한양으로 압송하려 하자 금부도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논공행상에서 저평가되자 불만을 품은 이괄은 평안병사로 근무하던 중, 1624년 3월 역모고변이 있자 3월 13일 아들 이전을 압송하러 온 금부도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괄의 난, 한양 점령과 패배]
이괄이 평안도와 황해도를 거쳐 한양에 입성했으나, 같은 날 안령에서 토벌군에 크게 패하여 퇴각했습니다.
이괄은 평안도의 순천·자산, 황해도의 수안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개성을 지나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인조는 이괄의 가족을 처형한후 공주로 피난했다. 3월 29일 이괄은 한양에 입성했으나 같은날 안령에서 토벌군에 크게 패하여 경기도 이천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이괄의 난 진압]
이괄은 안령에서 대패 후 경기도 이천으로 퇴각하던 중 부하들에게 살해당하며 이괄의 난이 진압되었습니다. 이 난은 수도 방위 체제를 약화시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3월 29일 이괄은 한양에 입성했으나 같은날 안령에서 토벌군에 크게 패하여 경기도 이천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4월 1일에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반군에 의해 한양이 점령된 이괄의 난은 조선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수도방위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북방의 방어를 담당하던 군대가 수도방어에 동원되었고 관서 지방의 방어 체제가 크게 약화되었다. 이로인해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원인이 되기도 했다.
1627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 일파는 지나치게 명분에 집착하였고, 이에 따라 광해군이 추진한 중립외교 정책을 비판하며 구체적인 전략도 없이 무조건적인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한다. 이는 국제 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행동으로,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1636
[병자호란 발발 및 삼전도의 굴욕]
인조반정 이후 친명배금 정책의 실패가 지속되며 병자호란이 발생했고,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겪는 등 조선 역사상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 일파는 지나치게 명분에 집착하였고, 이에 따라 광해군이 추진한 중립외교 정책을 비판하며 구체적인 전략도 없이 무조건적인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한다. 이는 국제 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행동으로,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인조반정 주역인 인조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를 행하는 굴욕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