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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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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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법조인, 공무원 + 카테고리

대한민국의 정치인 이회창은 제26대 국무총리를 역임했습니다. 판사 시절 군사정권의 압력에도 소신 판결로 '대쪽 판사'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감사원장, 국무총리 재직 시 강직한 모습으로 국민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세 차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으며, 보수 정당 창당 및 주요 당직을 맡으며 한국 정치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935

[황해도 서흥에서 출생]

황해도 서흥군 신막면에서 검사 출신 아버지 이홍규와 김사순 여사 사이의 4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관은 전주 이씨이며, 선대의 고향은 충청남도 예산군입니다.

1935년 법관 집안 출신으로 검사였던 이홍규 옹과 김사순 여사 사이에 4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전주 이씨로,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의 넷째 동생인 고려 말 위위시주부동정을 지낸 이영습의 23대손으로 알려졌습니다. 황해도 서흥군에서 태어났지만, 선대의 고향은 충청남도 예산군입니다.

1956

[고등고시 사법과 1차 합격]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그는 고등고시 사법과(사법시험의 전신)에 1차로 합격하며 법조인의 길을 걷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재학 도중 고등고시 사법과(사법시험의 전신)에 1차로 합격했습니다. 이는 그의 법관으로서의 경력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1957

[고등고시 사법과 최종 합격]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재학 중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47위로 최종 합격하며 법조인의 자격을 얻었습니다. 이후 대한민국 공군에 입대하여 장교로 복무했습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재학 중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47위로 최종 합격했습니다. 1957년 2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뒤, 같은 해 6월 공군 장교로 임관하여 공군본부 법무감사관실 법무관을 지냈으며, 1960년 공군 예비역 대위로 예편했습니다.

1960

[서울지방법원 판사 임용]

공군 예비역 대위로 예편한 뒤,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며 본격적으로 법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해 10월에는 서울민사법원 판사로 재직하며 여학생들의 퇴학 처분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1960년 초 서울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법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3월 10일 판사로 임용되고, 10월에는 서울민사법원 판사로 사립학교 재단의 정책에 반발하여 퇴학당한 엄영자 외 3명의 여학생의 퇴학처분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에서 여학생 4명의 손을 들어주며 소신 있는 판결을 보였습니다.

1961

[인천지원 판사 및 조용수 사건 참여]

인천지원 판사로 재직했으며, 5.16 군사정변 이후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1심 재판부에 배석 판사로 참여했습니다.

1961년 인천지원 판사가 됐다가 1962년 다시 서울지방법원 판사가 되었습니다. 5.16 군사정변 이후 당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1심의 재판부에 배석판사로 참여했습니다.

1972

[10월 유신 시기 소신 판결]

박정희 대통령의 10월 유신 선포 당시 찬반 입장을 명확히 하지 않아 정권의 요시찰 인물로 분류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도 군사정권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 판결을 내렸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10월 유신을 선포하자, 그는 10월 유신에 적극 반대하지도 않았지만, 10월 유신에 찬성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일로 그는 박정희에게 찍혀서 요시찰 인물이 되었습니다. 법관 시절 군사정권하에서는 '박세경 변호사 계엄법 위반사건' 등에서 정부측 압력과는 상반된 소신있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으며, '대쪽', '대쪽판사'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1981

[최연소 대법원 판사 임명]

최연소 대법원 판사로 임명되어 1986년까지 재직했습니다. 그는 사법 적극주의와 정권 입맛에 배치되는 소수의견으로 유명했으며, 권부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함으로 '대쪽판사'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1981년 최연소 대법원 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법관으로 재직하면서, 그는 사법적극주의나 법관에 의한 법형성의 강조, 정권의 입맛과 배치되는 소수의견으로 유명하였으며 법관 재직 중 권부와 타협하지 않아 '대쪽판사'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습니다. 대한변호사협회의 학술지에서도 그의 판례가 '20세기를 대표하는 각 분야별 판례'에 포함될 정도로 주목받았습니다.

1986

[전두환 정권에 의해 대법관직 퇴임]

전두환 정권의 기피인물로 지목되어 대법관 재임명에서 탈락하며 대법관직에서 퇴임했습니다. 이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며 개인과외 단속의 법적 무리를 지적하는 등 소신을 이어갔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기피인물로 지목되어 연임이 안 된 채 대법관직에서 퇴임하였습니다. 1986년 4월 24일 서울 중구에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변호사로 개업했습니다. 1986년 6월에는 개인과외 단속을 놓고 법적 무리가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합리적인 규제 방법을 주장했습니다.

1988

[대법관 복직 및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임명]

노태우 정부 출범 후 대법관으로 복직했으며, 동시에 제8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만연했던 불법 선거 풍토에 경종을 울리며 다수의 선거법 위반 혐의자를 고발했습니다.

1988년 2월 제6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대법관 후보자의 물망에 올랐고, 1988년 7월 복직하여 대법원 대법관에 임명되었습니다. 동시에 같은 달인 7월에 중앙선거관리위원장에 임명되어 선관위원장을 겸임했습니다. 그는 당시 동해시와 영등포 재선거에서 당선자 대부분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하여 당시 만연된 불법 선거 풍토에 경종을 울렸습니다.

1989

[노태우 대통령 질타 후 대법관직 사퇴]

노태우 대통령에게 경고 서한을 보내고 스스로 대법관직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의 선거 개입과 부정선거를 질타하며 강직한 모습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습니다.

이회창은 노태우 대통령의 서한이 당시 여권 내에서 크게 문제가 되자, 1년 4개월만인 1989년 11월 노태우 대통령에게 경고서한을 보내고 스스로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한편 노태우는 그에게 사람을 보내 민주정의당으로 영입하려 하였으나 그는 거절했습니다. 그 뒤 그는 변호사 사무소를 개설하여 변호사로 활동했습니다.

1991

[조형기 뺑소니 사건 판결]

배우 조형기의 뺑소니 사건 1심 판사 업무를 수행하여 조형기에게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 시켰습니다. 조형기는 이듬해 대통령 특별 사면으로 가석방되었습니다.

1991년 배우 조형기가 만취 운전 중 피서객을 치어 숨지게 한 뒤 시체를 유기하고 잠을 자다 체포된 사건에서, 이회창은 1992년 4월 9일 개최된 조형기에 대한 재판의 판사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이회창은 조형기에게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 시켰으나 조형기는 이듬해 대통령 특별 사면으로 가석방되었습니다.

1992

[국가보안법 관련 소수의견 제시]

노동조합 간부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상고심에서 다수의견과 달리 법 적용 범위의 엄격성을 주장하는 소수의견을 내어 사법부 내 국가보안법 위헌 논쟁을 촉발했습니다.

1992년 3월에 그는 노동조합 간부에 대해 제기된 국가보안법 7조5항(이적표현물 제작·소지·배포 위반 상고심에서 "'결과적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할 수도 있다는 '미필적 인식'만 있으면 처벌할 수 있다"는 다수의견과 달리 법 적용범위를 엄격히 할 것을 주장하는 소수의견을 냈습니다. 이는 이후 사법부 내에서 국가보안법 위헌논쟁을 불러왔습니다.

1993

[제15대 감사원장 취임]

김영삼 문민정부 출범 직후 제15대 감사원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감사원장 공관 입주를 거부하고 청와대 비서실, 국방부 율곡 사업, 평화의 댐 감사 등 성역 없는 감사를 강행하며 '대쪽' 이미지를 확고히 했습니다.

1993년 2월 김영삼의 문민정부 출범 직후 감사원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감사원장 취임 초 이회창은 감사원장 공관 입주를 거부하고 권위 혁파와 권위주의적인 이미지 개선에 치중했습니다. '성역'으로 일컬어지던 청와대 비서실이나 국방부의 율곡 사업, 평화의 댐에 대한 감사를 강행하며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 등에 대한 서면조사를 하는 등 엄정한 직무수행으로 '대쪽'이라는 별명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제26대 국무총리 취임]

제26대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법치'를 내세우며 강한 총리로서 직무를 수행하려 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최측근 내무부 장관에게 호통치는 등 대통령과 수시로 충돌했습니다.

1993년 12월 국무총리에 임명되었습니다. 보통 대통령의 측근이나 정권의 실세가 아닌 임명직 총리의 경우 정권의 얼굴마담이나 방탄조끼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이회창은 자신에게 주어진 법적 권한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강한 총리로 직무를 수행하려 하였습니다. '법치'를 내세우던 그는 국무총리 재직 중 당시 김영삼의 최측근이자 권력의 2인자였던 내무부 장관 최형우를 면전에서 거침없이 호통쳐서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1994

[허수아비 총리 거부하며 사표 제출]

국무총리 취임 127일 만에 사표를 제출하며 '법적 권한도 행사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총리는 안 한다'고 밝혀 국민들에게 '대쪽' 이미지를 다시 한번 각인시켰습니다. 당시 국민적 인기를 끌며 정치권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헌법에서 위임된 총리의 권한을 행사하려고 노력하였다가 김영삼 대통령과 수시로 충돌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그를 사임 형식으로 해임하려 했고, 해임이 예상되자 "법적 권한도 행사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총리는 안 한다"며 국무총리 취임 127일만인 1994년 4월 사표를 냈습니다. 이러한 행동들로 ‘대쪽’이라는 별명을 국민들에게 다시 각인시켰으며 당시 국민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변호사 사무실 개업 및 시장 출마설 해명]

서울 종로구에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변호사로 다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서울특별시장 출마설이 돌았으나 공개적으로 관심이 없다고 해명했습니다.

1994년 9월 23일 서울 종로구 종로1가 교육보험빌딩 17층에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습니다. 동시에 동서종합법률사무소의 상임고문으로도 위촉되었습니다. 9월 말 그가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출마할 것이라는 설이 돌자,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여 공개적으로 관심 없다고 해명하였습니다.

1996

[신한국당 입당 및 대표 취임]

김영삼 대통령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여 신한국당에 입당했으며, 이듬해 3월에는 신한국당 대표최고위원에 임명되며 본격적으로 정치 전면에 나섰습니다.

1996년 1월, 김영삼 대통령은 이회창을 신한국당에 영입했고, 1997년 3월에는 신한국당 대표최고위원에 임명했습니다. 이후 이회창은 군사 정권 출신 인사들의 지지를 얻었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한나라당 내 민주계가 그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원인이 됐습니다.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전국구 1번으로 출마하여 당선되며 처음으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습니다.

1996년 4월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전국구 1번으로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1997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

신한국당 내 경선을 거쳐 제15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지만, 야당이 폭로한 아들 병역공방으로 지지율이 폭락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신한국당 내 경선을 거쳐 대통령 후보가 된 이회창은, 야당인 국민회의가 폭로한 병역공방으로 지지율이 폭락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사면 요구]

보수세력 연합과 국민적 지지를 얻기 위해 김대중 후보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론을 무력화하고자 김영삼 대통령에게 두 전직 대통령의 추석 전 사면을 요구했습니다.

보수세력의 연합과 국민적인 지지를 얻고 김대중 후보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론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추석 전에 사면해 줘야 된다고 요구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처음에는 국민적 공감대 형성 필요성을 이유로 거부했으나, 이후 입장을 선회하며 대선 전 사면을 검토하게 됩니다.

[신한국당 신임 총재 선출]

신한국당 신임 총재로 선출되었습니다. 당시 악화된 경제 상황과 기아자동차 부도 사태 등으로 당의 지지도가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이었습니다.

신한국당 신임 총재로 이회창이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악화된 국내 경제상황과 흉흉한 민심, 기아자동차 부도사태 등으로 신한국당의 지지도는 최악으로 치닫고 여당인 이회창의 지지율도 경쟁자인 김대중에게 크게 뒤지게 됩니다.

[김대중 후보 비자금 의혹 폭로]

신한국당이 김대중 후보의 670억 비자금 사건을 폭로하며 대선 정국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대선을 앞두고 지지율 만회를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습니다.

신한국당은 어려운 국면을 타개할 선거 전략의 일환으로 김대중 후보의 670억 비자금 사건을 폭로합니다. 신한국당 강삼재 사무총장은 "김대중 후보가 신앙고백을 하면서까지 노태우씨로부터 20억원 이외에는 받은 돈은 없다며 국민을 기만했으나 이 모든 것이 거짓임이 드러났다"며 김대중 후보를 공격했습니다. 이 비자금 공방은 김대중 친인척 명의 378억 비자금 폭로, 조세포탈 및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 고발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한나라당 공식 출범 및 대선 후보 추대]

민주당과의 합당을 통해 새로 출범한 한나라당의 명예총재 및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는 '3김 청산'을 내건 보수 통합의 시도였습니다.

소수 야당이던 민주당과의 합당 및 후보 단일화를 추진한 끝에 마침내 11월 13일 총재 조순, 대통령 후보 이회창이라는 합의를 도출해내 11월 21일 양당 합당합동회의를 통해 새로 출범한 한나라당의 명예총재 및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추대되었습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IMF 사태에 대한 한나라당의 책임론과 이인제 후보의 독자 출마, DJP 연대 등으로 인해 김대중 후보에게 아쉽게 낙선했습니다.

1997년 12월 18일 대선에서 IMF 사태에 대한 한나라당의 책임론으로 낙선했습니다. 이인제가 경선 패배를 승복하지 못하고 독자출마를 강행하면서 신한국당은 어려운 국면에 놓였고, 김대중이 자유민주연합 김종필과 연대하여 DJP연대를 하였으며, 김영삼 정부 말기의 IMF 구제금융 사태가 언론에 집중으로 부각되면서 김대중에게 패하여 2위에 머물렀습니다. 이는 이회창의 첫 대선 도전이자 패배였습니다.

1998

[한나라당 총재로 재부상]

1998년 6월 지방선거 참패 이후 한나라당 총재로 부상했습니다. 김대중 정부의 세풍, 총풍 사건 등 여당의 압박 속에서 당을 이끌며 야당 지도자로서 입지를 굳혔습니다.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98년 당시 한나라당은 원내 과반석을 보유한 제1당이었으나, 1998년 6월 지방선거에서 영남과 강원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참패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단순한 대선 후보 경험자에서 한나라당 총재로 부상했습니다. 이회창이 한나라당 총재로 재등장한 것을 전후로 김대중의 여당은 세풍, 총풍 사건을 이용해 한나라당을 압박했습니다.

[“이런 놈의 나라” 발언 논란]

김대중 정권을 비판하며 "이런 놈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해 논란을 빚었습니다. 당시 여당 대변인으로부터 '정치 지도자로서 망언'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1998년 이회창은 김대중 정권을 비판하면서 "이런 상황에서도 야당 빼가고 정치 사정해서 국회의원 잡아갈 생각이나 하고, '이런 놈의 나라'가 이런 놈의 정권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이라 발언하며 김대중 정권과 국가를 맹비난했습니다. 당시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은 "이회창 총재가 국가를 위해 어떤 기여를 했는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을 이런 놈의 나라라고 비난할 자격은 없다. 정치지도자로써 해서는 안 될 망언"이라며 강력 비판했습니다.

1999

[송파구 갑 국회의원 재보선 당선]

1999년 4월 송파구 장미아파트로 위장전입 의혹이 불거졌으나, 해당 재보궐선거에서 서울 송파구 갑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초선 의원 타이틀을 달았습니다.

1999년 4월 이회창은 같은 당 국회의원의 친척 소유인 송파구 장미아파트로 위장전입하였으며 해당 주소에서 투표를 하였습니다. 주민등록법 위반 및 당시 선거법 위반 행위이나 처벌 받지 않았습니다. 1999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후 이회창은 송파구 신천동 7-28 현대타워아파트 706호에 전입 신고했으나, 단 하루도 그 집에 살지 않았다고 알려졌습니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도 6월 3일 재보궐선거에서 서울 송파구 갑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2000

[제16대 국회의원 재선]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 1번으로 당선되며 재선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 '젊은 피 수혈'을 내세워 오세훈 등을 당내에 영입했습니다.

2000년의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수도권에서는 패배하였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 원내 제1당의 지위는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이회창은 한나라당 비례대표 1번으로 당선되며 재선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2000년 이후 상도동계를 견제할 목적으로 '젊은 피 수혈'을 내세워, 오세훈 등을 당내에 영입하기도 했습니다.

2001

[언론 자유 강조 및 세무조사 중단 촉구]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언론의 자유를 강조하며 국세청의 언론사 세무조사 중단을 촉구했습니다. 이는 '볼테르의 말'을 인용한 것이었으며, 민주노동당으로부터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를 받기도 했습니다.

2001년 2월 6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볼테르의 말이라며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게 말할 권리는 보호할 것'이라는 문구를 인용하면서 "언론의 자유를 지키는데 온 힘을 다할 것"이라며 국세청의 언론사 세무조사 중단을 촉구했습니다. 민주노동당은 이에 대해 국가보안법 폐지에 적극 나서주기 바란다는 권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2002

[친일파 명단 발표 비판]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의 '반민족행위자 708명 명단' 발표에 대해 "우리 근대사의 족적을 남긴 분들을 이제 와서 친일로 매도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비판했습니다.

2002년 2월 28일,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의 친일파 708인 명단 발표 당시 한나라당 총재로 있던 그는 명단 발표에 대해 "우리 근대사의 족적을 남긴 분들이 포함됐다. 이런 분들을 이제 와서 친일로 매도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친일파 관련 발언은 친일파를 직접적으로 옹호했다고 보기 힘들며 아버지 이홍규 옹이 친일파 의혹을 받은 데 대한 대응이라는 반론도 있습니다.

[빌라 게이트 대국민 사과]

초호화 빌라에 공짜로 거주한 이른바 '빌라 게이트' 의혹이 폭로되자 "서민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 것은 큰 잘못"이라며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지지율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2002년 3월 당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에서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 일가가 가회동에서 초호화 빌라에 공짜로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습니다. 이에 한나라당은 민주당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공박했으나, 115평 빌라의 3개 층을 공짜로 자식과 살고 있었던 이회창은 같은 해 3월 20일 기자회견을 통해 “서민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 것은 큰 잘못”이라고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지지율을 역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했으나, 불법 대선자금 의혹, 병역 비리 혐의, 빌라 게이트 등으로 인해 노무현 후보에게 패배하며 두 번째 낙선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2001년 말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공식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비록 세풍, 총풍 사건이 있었지만 2002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도 이회창의 대쪽같은 이미지, 흔들리는 한나라당을 수호해낸 인물, 할 말은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까지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차떼기'로 불린 823억 불법 대선자금 의혹, 115평 초호화 빌라 무상 거주, 두 아들의 병역 비리 혐의 등으로 인해 여당의 악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2002년 12월 18일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패배했습니다.

[정계 은퇴 공식 선언]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 패배 후 한나라당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계 은퇴를 공식 선언했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연수차 출국했습니다.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이틀 후인 2002년 12월 21일, 한나라당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계 은퇴를 공식 선언했습니다. 2003년 1월 미국으로 연수차 출국하였으며, 이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축하난만 보냈습니다.

2007

[무소속으로 제17대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기호 12번) 출마를 선언하며 정계에 복귀했습니다. 이는 이명박 후보의 비리 의혹과 자신과의 정치 성향 차이에 대한 불만이 배경에 있었습니다.

이명박이 한나라당의 2007년 대선 후보로 선출된 이후, 이회창의 측근을 중심으로 이회창의 대선 출마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집중 보도되었습니다. 2007년 11월 7일, 이회창은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기호 12번)가 되었습니다. 출마 선언 후 대선 직전까지 박근혜의 합류를 기대했으며, 이명박 후보를 "좌파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가 안보와 법질서 확립을 강조했으나, 이명박 후보에게 크게 뒤지고 정동영 후보에게도 밀려 15.1%의 지지율(3위)로 낙선했습니다.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이 한때 30% 중반까지 떨어지는 등 초반 돌풍을 일으키는 듯했으나, 더 이상 특별한 돌풍을 일으키지 못한 채,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에게도 크게 뒤처진 15.1%의 지지율(3위)로 낙선했습니다. 대선 하루 전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 철회에도 불구하고 대세가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2008

[자유선진당 창당 및 초대 총재 취임]

충청도 지역을 기반으로 '정통 보수 정당'을 표방하는 자유선진당을 창당하고 초대 총재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는 이명박 정부의 방식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보수 정당 건설의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한나라당과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한편 "정통 보수 정당"을 창조하기 위해 대선 이후에도 바쁜 행보를 계속하였습니다. 2008년 2월 1일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자유선진당을 창당했으며, 2008년 2월 12일에는 비슷한 정치성향의 국민중심당과 합당을 선언하였습니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단일화 문제로 갈라섰던 이인제와 11년만에 해우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제18대 국회의원 3선 당선]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남 홍성군·예산군 지역구에서 자유선진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며 3선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자유선진당은 제18대 총선에서 기존 자유민주연합, 국민중심당보다 한층 뛰어난 결과를 보이며 충청도 지역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했습니다. 이회창은 충남 홍성군·예산군 지역구에서 당선되어 3선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2009

[심대평 대표의 자유선진당 탈당]

심대평 자유선진당 대표가 이회창 총재의 독선적 당 운영에 불만을 제기하며 자유선진당을 탈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자유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이 구성했던 교섭단체가 붕괴되는 등 당내 갈등이 표면화되었습니다.

이명박 정부 초기부터 이명박 대통령의 방식에 많은 비판이 있었고, 이회창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협상을 주장하며 강도 높은 비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촛불집회와 대통령 탄핵 서명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2009년 8월 30일 자유선진당 심대평 대표가 이회창 총재의 독선적 당 운영에 불만을 제기하면서 탈당하였습니다. 심 대표의 탈당으로 자유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이 함께 구성한 교섭단체('선진과 창조의 모임')가 붕괴되었습니다.

2010

[재보선 패배 책임지고 대표직 사의 표명]

재보궐선거에서 자유선진당이 패하자 그 책임을 지고 대표직 사의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당내 리더십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는 행보였습니다.

2010년 6월의 재보궐선거에서 패하자 그는 책임지고 대표직 사의를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당내에서 리더십에 대한 논의가 촉발되었습니다.

2011

[자유선진당 대표직 사퇴 및 총선 불출마 선언]

자유선진당 대표최고위원 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후 19대 총선에는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 은퇴 의사를 다시 밝혔습니다.

2010년 3월 17일부터 역임했던 자유선진당 대표최고위원 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 후 19대 총선에는 불출마를 선언, 정계를 완전히 은퇴하였습니다.

2012

[자유선진당 탈당 및 새누리당 입당]

자유선진당을 탈당했습니다. 이후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새누리당에 입당했습니다.

2012년 5월 자유선진당을 탈당하였습니다. 2012년 11월 24일,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새누리당에 입당하였습니다. 이로써 그의 정치적 행보는 다시 한번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2017

[새누리당 탈당 및 바른정당 입당, 유승민 지지 선언]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바른정당에 입당하며, 대선 출마를 선언한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의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보수 정당 재편 움직임의 일환이었습니다.

2017년 1월 26일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바른정당에 입당하며, 대선 출마를 선언한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의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이는 2016년 말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 이후 보수 진영의 분화 과정에서 이루어진 정치적 결단이었습니다.

[회고록 출판 및 '개혁적 보수주의' 강조]

3년여간 집필해온 회고록 '나의 삶 나의 신념'과 '정치인의 길'을 출판했습니다. 회고록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를 언급하며 '개혁적 보수주의'를 강조했습니다.

2017년 8월 22일에는 3년여간 집필해온 회고록을 출판하였습니다. 여기서 이회창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는 박 전 대통령 자신과 옛 새누리당에 있다고 지적하였으나 대한민국 보수주의가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좌파가 선호해온 정책이라도 그것이 정의에 반하지 않고 보수의 이념과 정체성에 저촉되지 않으며 국민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과감히 끌어 안아야 한다"면서 '개혁적 보수주의'를 강조하였습니다.

2018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 추천론 거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추천론이 돌았으나, 그는 한국당으로부터의 연락도 없었지만 그러한 요청이 오더라도 비대위원장을 할 생각이 없다고 밝히며 불쾌감을 드러냈습니다.

2018년 7월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추천론이 돌았습니다. 안상수 비대위 준비위원장은 "여러 곳에서 이 전 총재를 추천하는 분들이 있어서 다른 (비대위원장) 후보군들과 함께 논의 중"이라며 이 전 총재도 비대위원장 후보 중 하나로 검토하고 있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 전 총재는 한국당 비대위원장설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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