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자
연표
1916
출생지와 학력, 정확한 생년월일 등 개인 신상에 대한 내용은 모두 전해지지 않습니다. 다만 1916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1929
이화자의 어린 시절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3세 무렵부터 인천 부평 지역의 술집에서 작부로 일하며 노래를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1935
20세 전후이던 1935년, 포리돌레코드의 김용환이 인천 부평의 한 술집에서 노래를 하던 이화자를 발굴했습니다. 그녀는 뉴코리아레코드에서 신민요 〈초립동〉을 발표하며 정식 가수로 데뷔했습니다.
1937
[신민요 가수로 활약]
뉴코리아레코드와 포리돌레코드에서 〈섬시악시〉, 〈평양은 좋은 곳〉, 〈월미도〉, 〈천리몽〉 등 신민요를 발표하며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데뷔 이후 뉴코리아레코드에서 〈섬시악시〉, 〈평양은 좋은 곳〉, 〈월미도〉 등을 불렀고, 이어서 신민요 장르에 강했던 포리돌레코드에서 〈천리몽〉을 발표하며 점차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1938
[최고 인기 가수로 등극]
오케레코드로 이적한 뒤 김용환 작곡의 〈꼴망태 목동〉, 〈님 전 화풀이〉 등을 발표하며 최고 인기 가수로 등극했습니다.
1938년 이화자는 오케레코드로 소속사를 옮겼습니다. 이후 김용환 작곡의 〈꼴망태 목동〉과 〈님 전 화풀이〉를 연이어 히트시키며 당대 최고 인기의 가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39
서민들의 애환을 대변하는 듯한 노래로 인기를 얻었던 이화자는 1939년에 자신의 자전적인 가사를 담았다고 설명되는 〈어머님전 상백〉을 발표하며 대중의 깊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1940
이화자의 대표곡 중 하나로 꼽히는 〈화류춘몽〉이 1940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이 곡은 기생의 한 많은 삶을 애달프게 노래하여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화자는 아편에 손을 대 중독되었고, 이로 인해 건강을 크게 해쳤습니다. 짧은 결혼 생활마저 실패로 끝나 폐인과 같은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1943
[친일 가요 〈목단강 편지〉 발표]
태평양 전쟁 중에 친일 가요인 〈목단강 편지〉를 취입했으며, 이 곡이 그녀의 마지막 히트곡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태평양 전쟁 시기인 1940년대 중반에 이화자는 친일 가요인 〈목단강 편지〉를 취입했습니다. 이 곡은 그녀의 가수 경력에서 마지막 히트곡이 되었습니다.
1950
1950년을 마지막으로 이화자의 활동 기록은 전무합니다. 그녀는 이 무렵 홀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추정되며, 비운의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