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창 (조선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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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족, 대한제국 관료, 조선 귀족, 기업인, 교육자, 친일반민족행위자 + 카테고리

이해창은 조선 후기 왕족으로, 민족계몽운동과 교육사업에 힘쓴 인물입니다.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한성은행 경영에 참여하는 등 기업 활동을 했습니다.사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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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65

[출생]

조선 후기의 왕족 이해창이 경기도 포천군에서 이경용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봉길이었으며, 후에 경원군 이하전의 양자가 되어 이해창으로 개명했다.

1865년 10월 15일 경기도 포천군에서 참봉 이경용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이봉길이었으며, 자는 배언, 호는 인헌이다. 덕흥대원군의 13대손으로, 밀산군 이찬의 9대손이다. 훗날 경원군 이하전의 양자가 되면서 이름을 이해창으로 개명하였다.

1872

[이하전의 양자로 입적 및 개명]

고종 9년, 덕흥대원군가의 장손인 이하전의 양자로 정해지며, 이름을 이봉길에서 이해창으로 개명하고 한성부 사직동 도정궁댁으로 이주했다.

1872년 7월 30일, 덕흥대원군의 장손 이하전의 양자로 정해졌다. 이에 따라 본명 이봉길에서 이해창으로 개명하고 경기도 포천에서 한성부 서부 사직동 도정궁댁으로 이주하여 성장했다.

1884

[충훈부 도사 임명]

음서로 관직에 올라 사과에 임명된 후, 충훈부 도사에 올랐으며 같은 해 5품으로 승진했다.

음서 제도를 통해 관직에 올라 사과에 임명되어 덕흥대원군의 제사를 받들었다. 이후 참봉과 도사를 거쳐 1884년 충훈부도사가 되었고, 그 해 5품으로 승진했다.

1889

[알성시 병과 합격]

조선의 과거 제도인 알성시에 병과로 합격하여 승지, 영 등을 역임했다.

1889년 알성시에 병과로 합격하여 승지, 영 등을 역임했다. 이후 사간원 대사간 등의 벼슬을 거쳤다.

1904

[한성 판윤 취임]

1904년 10월 17일부터 10월 20일까지 한성 판윤을 역임했다.

1904년 10월 17일 한성부 판윤으로 취임하여 10월 20일까지 그 직책을 수행했다.

[창산군 진봉]

황제의 명으로 창산도정에서 창산군으로 진봉되었고, 동시에 종2품에 특자되어 유릉수릉관이 되었다.

1904년 11월 4일 창산도정이 되었다가 다음 날인 11월 5일, 황제의 명으로 창산군으로 진봉됨과 동시에 종2품에 특자되어 유릉수릉관을 겸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봉상사장 등을 역임했다.

1907

[종1품 승진 및 훈장 수여]

1905년 정2품에 이어 1907년 종1품에 올랐으며, 대한제국의 훈일등 태극장과 대훈위 이화대수장을 받았다.

1905년에 정2품 정헌대부로 승진하였고, 1907년 11월에는 종1품에 올랐다. 재임 중 대한제국의 훈일등 태극장과 대훈위 이화대수장을 수여받았다.

1908

[민족계몽운동과 교육사업 시작]

사직동에 학교설립을 발기하고, 기호흥학회 월연보조 등을 통해 민족계몽운동과 교육사업에 힘썼다. 부인도 양심여학교를 설립했다.

1908년 사직동에 학교설립 발기를 추진했으며, 1909년 기호흥학회에서 월연보조하는 등 민족계몽운동과 교육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의 부인 역시 양심여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기여했다. 또한 1908년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이 되었다.

1910

[후작 작위 수여]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일본 제국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은사공채 16만 8천원을 사들였다. 이는 그가 친일 행위의 대가로 일제로부터 특혜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주요 사건이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10월 16일 일본 제국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이와 함께 은사공채 168,000원을 사들였는데, 이는 당시 큰 금액으로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경제적 이득을 취했음을 나타낸다.

1923

[한성은행 취체역 역임]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한성은행에 참여했으며, 1923년부터 1928년까지 이 은행의 취체역(이사)을 맡았다.

한상룡이 실무를 맡고 이재완을 내세워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한성은행에 1910년부터 민영휘, 조중응 등과 함께 참여했다. 특히 1923년부터 1928년까지는 이 은행의 취체역(이사)을 맡아 활발한 기업 활동을 펼쳤다.

1931

[단군신전봉찬회 고문 활동]

한국의 국조 단군을 모시기 위해 설립된 단군신전봉찬회 고문을 맡아 민족계몽운동에 힘썼다.

1931년 한국의 국조인 단군을 모시기 위해 설립된 단군신전봉찬회 고문을 맡아 민족계몽운동에 힘썼다. 이는 그의 생애 후반에 나타난 민족 의식 활동 중 하나이다.

1937

[국방헌금 기탁]

조선일보사에 국방헌금 150원을 기탁했다. 이는 일제 말기 전쟁 수행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행위로 평가된다.

1937년 10월 22일 조선일보사에 국방헌금 150원을 기탁하였다. 이 기탁은 당시 일본의 전쟁 자금 조달에 협력하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1945

[사망]

경성부 종로 사직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사후 일본 정부로부터 특지로 정2위에 추증되었다.

1945년 3월 2일 오전 8시 경성부 종로 사직동 262번지 2호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1945년 3월 6일 사후 일본 정부로부터 특지로 정2위에 추승되었으며, 그의 작위는 장남 이덕주가 습작했다.

2002

[친일파 명단 선정]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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