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승
연표
1890
[이해승의 탄생]
군수를 지낸 이건용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그는 후에 철종의 능 참봉을 지내고, 대한제국 말기 황족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나, 양부 이한용이 전계대원군의 봉사손으로 입양되면서 철종과 가까운 친척 관계가 되었습니다. 초명은 해봉입니다.
1902
이후 1905년 7월 15일 6품으로 승진했으며, 1906년 탁지부 재랑, 1907년 3월 14일 시강원 시종관 주임관 4등을 지냈습니다. 1907년 9월 14일 해당 직위에서 사직합니다.
1908
[청풍 도정 봉작]
정3품 통정대부로 돈녕부도정이 되었고, 순종의 특명으로 전계대원군의 봉사손 자격으로 '청풍 도정'에 봉작되었습니다.
1909년 수학원을 졸업하고 가선대부를 거쳐 정2품 자헌대부에 올랐습니다.
1910
1910년 8월 4일 훈1등 태극장, 같은 해 8월 27일 이화대수장을 받았습니다.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 수여]
21세의 젊은 나이에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고, 은사공채 16만 2천 원을 수령했습니다.이는 일제강점기 동안 그가 일본 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1912년에는 '종전 한일관계의 공적이 있는 자'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습니다. 채무 문제가 발생 시에도 일제의 도움으로 재산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신탁하여 변제했습니다.
1940
[일제 전시체제 협력]
태평양 전쟁 기간 중 일제에 적극 협력했습니다.1940년부터 1941년 사이에 총독부 외곽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과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습니다.
1942년에는 조선귀족회 회장이 되어 일제 육·해군에 각각 1만 원씩의 국방헌금을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에게 전달하는 등 친일 행위를 이어갔습니다.
1943
1949
1958
1959
이우영은 1957년부터 옛 황실재산총국에 소송을 제기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신탁되어 있던 재산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대 말까지 전체 신탁재산의 75%인 890만m²를 되찾았고, 이 중 절반가량을 매각했습니다. 1988년에는 반환받은 토지 중 서울 홍은동 땅에 스위스그랜드호텔(현 그랜드힐튼호텔)을 지었습니다.
2002
[친일파 명단 선정]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습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과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선정되었습니다.
2007
이 결정에 대해 이해승의 후손인 이우영은 2008년부터 소송을 시작하여 긴 법정 다툼을 이어갔습니다.
2010
[손자, 첫 소송 승소]
이해승의 손자 이우영이 정부를 상대로 낸 첫 소송에서 최종 승소하여 320억 원 상당의 땅을 지켜냈습니다.
대법원이 '작위 수여만으로는 한일병합의 공이 있었다고 추단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국가 패소 판결을 내린 결과입니다. 이 판결은 큰 공분을 일으켰고, 국회는 관련 특별법의 '한일병합의 공으로'라는 문구를 삭제하는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2014
[사상 최고액 재산 환수]
대한민국 정부가 이해승의 손자 이우영이 친일 재산을 매각하여 얻은 부당이득 220억여 원을 반환하라는 1심 소송에서 승소했습니다.이는 사상 최고액 친일재산 환수 판결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우영은 소송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부당이득 반환 소송 2심과 친일재산 확인 결정 취소 소송은 대법원에 계류 중이었습니다.
2016
2019
[재산 1필지 환수 판결]
법원이 이해승 후손의 재산 중 1필지만 국가에 환수하도록 판결하여, 정부는 사실상 패소했습니다.이는 친일 재산 환수 소송의 복잡성과 어려움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