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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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치가, 총리대신, 외교관, 조선통감, 개화론자 + 카테고리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에도 시대 말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약한 정치가입니다. 그는 메이지 유신의 핵심 인물로, 일본 제국 헌법 제정과 초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근대 일본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그러나 조선 통감으로 부임하여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탈하는 데 앞장섰으며, 결국 안중근 의사에 의해 하얼빈에서 암살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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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41

[출생]

조슈번 스오국 구마게군 쓰가리촌(현 야마구치현 히카리시)에서 농민 출신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 이름은 하야시 리스케였습니다. 후에 아버지의 양자 입적과 함께 이토 성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10월 16일 조슈번 스오국 구마게군(지금의 야마구치현 히카리시) 야마구치의 스오구니촌에서 농민 출신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하야시 주조였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어릴 때 이름은 하야시 리스케였습니다. 아버지가 조슈번의 주겐 계급인 이토 다케베의 양자가 되면서 성을 하야시에서 이토로 바꾸었고, 그 역시 양조부의 성을 따서 이토로 성을 바꾸었습니다. 후에 이토 다케베가 최하급 무사 신분인 아시가루가 되면서 이토도 무사 신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1863

[영국 유학과 사상 전환]

이노우에 가오루의 건의로 영국 유학생 5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되어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유학 중 서구 문물의 압도적인 국력 차이를 목격하며 존왕양이론자에서 개국론자로 사상을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1863년 5월, 이노우에 가오루의 건의로 이루어진 영국 유학생 5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습니다. 그는 놀라운 속도로 영어를 익혀 기본적인 회화가 가능했으며, 런던에서 화학자 알렉산더 윌리엄슨 교수의 저택에서 하숙하며 영어와 영국식 예의 범절을 익혔습니다. 박물관, 성곽, 해군 시설, 공장 등을 견학하며 견문을 넓혔고, 유교적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왕양이론자였으나 영국 유학 중 영국과 일본의 압도적인 국력 차이를 목격하고 개국론으로 사상을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1864년 6월, 조슈 번과 외국 함대의 전쟁 소식을 듣고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귀국하였습니다.

1885

[초대 일본 내각총리대신 취임]

입헌제 도입에 앞서 내각 제도가 창설되면서, 일본의 초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했습니다. 이후 헌법 및 황실전범 초안을 완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885년, 입헌제 도입에 앞서 내각 제도가 창설되면서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의 초대 내각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총리대신으로 재임하는 동안 헌법 및 황실전범의 초안을 완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일본 근대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888년 5월 8일에는 헌법 초안을 심의할 추밀원이 신설되자 총리직을 사임하고 초대 의장이 되었습니다.

1887

[일본 제국 헌법 제정 참여]

일본 제국 헌법 제정 작업에 3년간 참여하여, 이노우에 고와시, 가네코 겐타 등과 함께 헌법 초안을 검토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내외 법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1887년부터 3년간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제국 헌법 제정 작업에 깊이 참여했습니다. 나쓰시마에서 이노우에 고와시, 가네코 겐타 등과 함께 헌법 초안의 검토를 시작했으며, 자신의 법령 지식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국내외 법학자들을 초빙하여 자문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1889년 2월 11일 구로다 내각 하에서 일본 제국 헌법이 발포되었고, 이토는 '헌법 정의 해제'를 간행하며 입헌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1905

[을사늑약 강제 체결 주도]

러일 강화 조약 체결 이후 조선에 파견되어 대한제국 고종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켰습니다. 이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러일 강화 조약 체결 이후 1905년 10월 27일 조선과 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손에 넣는다는 구상이 내각 회의에서 통과되었습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정부에 조약을 강요하는 임무를 맡아, 그 해 11월 17일 대한제국 고종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실질적인 보호국이 되었습니다. 같은 해 수원 관광 후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던 길에 을사늑약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 청년 원태우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1906

[조선통감 취임 및 통치]

을사늑약 체결 이후 스스로 조선통감을 맡아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의 시정 개선을 명목으로 도로 개설을 역설하고, 고등여학교령을 공포하여 한성고등여학교 설립을 주도하는 등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1906년 3월 3일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 통감으로 취임하여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조선의 시정 개선을 명목으로 도로 개설을 역설하고 도로 건설에 착수했습니다. 또한, 1895년 제정된 여학교관제의 지연으로 관립여학교 설립이 미뤄지던 상황에서 1908년 고등여학교령을 공포하여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같은 해 4월 공립 한성고등여학교(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907년 7월 1일 헤이그 특사 사건이 발생하자,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이완용 총리대신을 추궁하며 양위를 주도하였습니다.

1909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함]

러시아 재무상과의 회담을 위해 만주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가 대한의군 참모 중장 안중근 의사가 쏜 총탄에 맞아 향년 69세로 암살당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동아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경, 러시아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 역에 내린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군의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중 대한의군 참모 중장 안중근 의사가 쏜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에 저격당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총탄 일곱 발 중 세 발로 이토를 맞혔고, 이토는 과다 출혈로 같은 날 오전 11시경 사망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열차와 군함을 통해 일본으로 운구되었으며, 1909년 11월 4일 히비야 공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동양평화의 파괴 원흉으로 규정하며 암살의 정당성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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