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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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작가, 문인, 언론인, 월북자 + 카테고리

한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천재 소설가 날카로운 문체와 서정적인 감성으로 조선의 모파상이라 불리다 구인회 결성 주도 근대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월북 후 격동의 생애를 살다 남한에서는 오랜 시간 잊혀졌다 1988년 해금 후 재조명 받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904

[천재 소설가의 탄생]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난 이태준은 '조선의 모파상'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한국 현대 단편소설의 대가로 우뚝 설 운명을 타고났다.

그의 섬세한 문학적 감수성은 어린 시절의 불운과 방랑에서 싹텄다.

1909

[어린 시절의 비극]

구한말 개화파 지식인이었던 부친 이창하가 일찍이 사망하면서 어린 이태준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는 의병에게 친일파로 오해받아 러시아로 망명했으나, 뜻을 펼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1912

[모친과의 이별]

부친 사망 후 힘겹게 생계를 이어가던 모친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아홉 살 이태준은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외조모 손에 이끌려 고향 친척집을 전전하며 그는 깊은 상처와 외로움을 경험했다.

1918

[방랑의 시작]

사립 봉명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한 달 후, 이태준은 친척집의 괄시와 동정 속에서 가출을 감행했다.

원산 객주집 사환 등으로 일하며 2년여를 방랑하던 그는 이 시기 문학적 감수성을 키웠다.

1921

[문학의 꿈을 키우다]

고학을 하며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이태준은 습작 생활에 몰두하며 문학적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글쓰기와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다.

1924

[퇴학과 일본 유학]

휘문고보 동맹휴교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퇴학당하는 시련을 겪었으나, 김연만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나도향 등과 교류하며 고학 생활을 이어갔다.

이는 그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된다.

1925

[작가 이태준의 탄생]

일본에서 단편소설 〈오몽녀〉를 《조선문단》에 투고, 입선하며 마침내 문단에 등단했다.

그의 섬세하고 유려한 문체는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안기며 '조선의 모파상'이라는 별명을 얻게 했다.

1927

[조치대학 입학 및 자퇴]

도쿄 조치대학에 입학했으나, 어려운 고학 생활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해 가을 자퇴했다.

학업의 중단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1929

[언론계 활동 시작]

개벽사에 입사하여 《학생》, 《신생》 등의 편집에 참여하고, 《어린이》에 많은 동화를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 그는 단순한 작가를 넘어 문화계 인사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1930

[이순옥과의 결혼]

이화여전 음악과를 갓 졸업한 이순옥과 결혼하며 가정을 꾸렸다.

이는 작가로서 그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이후 그의 작품 활동에 안정감을 더했다.

1931

[문학의 황금기 개막]

《중외일보》 기자로 입사하고, 이후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및 여러 학교의 작문 교사로 출강하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는 이태준 문학의 전성기로 평가되며, 그의 대표작들이 대거 탄생했다.

1933

[구인회 결성 주도]

'카프'의 목적문학에 반대하며 순수 문학을 지향하는 문학 단체 '구인회' 결성에 앞장섰다.

이로써 그는 비경향문학의 최대 작가라는 확고한 입지를 다지며 한국 근대문학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1939

[《문장》 창간과 신인 발굴]

문예지 《문장》의 책임편집을 맡아 신인추천제도를 도입, 임옥인, 최태응 등 유능한 신인 작가들을 발굴하며 식민지 말기 조선문학을 지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의 안목과 리더십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1943

[고향으로 낙향]

급변하는 시국 속에서 고향인 강원도 철원 근처로 낙향하여 해방 전까지 칩거했다.

격동의 시기에 그는 잠시 문단 활동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시간을 가졌다.

1946

[충격적인 월북]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 돌연 월북했다.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기행》을 쓰는 등 북한 체제 아래 새로운 삶을 시작했으나, 이는 그의 비극적인 운명의 서막이 된다.

1956

[김일성 비판과 숙청]

김일성 영웅화 지시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거부했다는 이유로 숙청당했다.

함흥으로 추방되어 노동신문사 교정원, 콘크리트 공장 파고철 수집 노동자로 전락하는 등 혹독한 고생을 겪으며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

1964

[창작실 복귀와 재추방]

조선노동당 중앙당 문화부 창작실 전속작가로 복귀하며 잠시 희망을 보였으나, 몇 년 후 다시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 지구로 추방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그의 삶은 북한 체제 속에서 파란만장한 굴곡을 겪었다.

1969

[마지막 소식]

66세의 나이로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 지구에서 부부가 함께 사회보장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이 대한민국에 전해졌다.

이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그의 마지막 행적이다.

1970

[쓸쓸한 최후]

사망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970년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운의 월북 작가는 북한에서 반동 작가로 낙인찍혀 잊혔고, 남한에서도 오랫동안 침묵의 세월을 보냈다.

1988

1988.7.19 사후 18년

[월북 작가 해금]

남한 정부가 월·납북 작가의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를 발표하면서, 이태준에 대한 문학 연구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의 뛰어난 작품들이 비로소 대중에게 재조명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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