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가키 다이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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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정치인, 자유민권운동가 + 카테고리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메이지 유신의 원훈이자 도사 3백 중 한 명으로, 일본 근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그는 특히 자유민권운동을 주도하며 '서민파' 정치인으로서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으며, 일본 민주정치의 선구자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업적은 사망 후에도 높이 평가되어 일본 국회의사당에 동상이 세워지고 지폐에 초상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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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탄생]

일본의 무사, 정치인이자 메이지 유신의 원훈 중 한 명인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도사국 고치성하 나카시마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덴포 8년 음력 4월 17일(양력 1837년 5월 21일) 도사국 고치성하 나카시마정에서 이누이 마사시게의 아들로 태어났다. 훗날 '다이스케'는 통칭이고 휘는 마사미에서 마사카타로 개명했다. 호는 무케이다.

1860

[도사 이타가키씨 제10대 당주 취임]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도사 이타가키씨의 제10대 당주가 되어 가문의 수장으로서의 역할을 시작했습니다.

이누이 마사시게의 후임으로 1860년부터 1919년까지 도사 이타가키씨의 제10대 당주로 재임했다.

1881

[『이타가키 정법론』 저술]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자신의 정치적 사상을 담은 저서 『이타가키 정법론』을 저술하여 대중에게 자유민권운동의 이념을 알렸습니다.

1881년,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엮고 우에키 에모리가 기록한 『板垣政法論』을 통해 그의 정치적 신념과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을 피력했다. 이 책은 자유민권운동의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87

[제1대 이타가키 백작 임명]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제1대 이타가키 백작으로 임명되어 메이지 시대의 귀족으로서 새로운 지위를 얻었습니다.

1887년부터 1919년까지 제1대 이타가키 백작 직책을 수행했다. 이는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얻은 영전으로, 종1위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을 받았다.

1896

[내무대신 취임 (2차 이토/마쓰카타 내각)]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제2차 이토 내각과 제2차 마쓰카타 내각에서 내무대신으로 취임하여 국가의 중요 직책을 맡아 국정 운영에 참여했습니다.

1896년 4월 14일부터 같은 해 9월 20일까지 제2차 이토 내각과 제2차 마쓰카타 내각에서 내무대신을 역임했다. 전임자는 요시카와 아키마사였고, 후임자는 카바야마 스케노리였다.

1898

[내무대신 취임 (1차 오쿠마 내각)]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제1차 오쿠마 내각에서 다시 한번 내무대신으로 취임하며 중요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1898년 6월 30일부터 같은 해 11월 8일까지 제1차 오쿠마 내각에서 내무대신을 역임했다. 전임자는 요시카와 아키마사였고, 후임자는 사이고 주도였다.

1910

[『자유당사』 감수]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자유당의 역사를 기록한 『자유당사』를 감수하여, 자신이 주도했던 자유민권운동과 자유당의 발자취를 후대에 남겼습니다.

1910년,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감수하고 우다 토모이와 와다 사부로가 공동 편집한 『自由党史』(자유당사) 상하권을 출판했다. 이 책은 자유당의 창립부터 활동까지의 중요한 역사적 기록을 담고 있으며, 그의 정치 활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1919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서거]

메이지 유신의 원훈이자 자유민권운동의 주동자로 활동하며 일본 민주정치의 선구자로 평가받던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일본 도쿄부 도쿄시에서 사망했습니다.

덴포 8년(1837년) 5월 21일에 태어나 다이쇼 8년(1919년) 7월 16일에 일본 도쿄부 도쿄시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망 이후에도 민주정치의 선구자로 높은 인기를 누렸으며, 일본 국회의사당에 동상이 세워지고 지폐에 초상이 사용될 정도로 존경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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