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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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바둑 기사, 프로 기사 + 카테고리
대한민국의 프로 바둑 기사로,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세계 바둑계를 완벽하게 평정하며 바둑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사 중 한 명으로 칭송받는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11세의 나이에 역대 두 번째 최연소로 프로에 입단하였고, 16세에 세계 대회 최연소 챔피언에 오르는 등 모든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우며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특유의 침착함으로 '돌부처(석불)'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신산(神算)'이라 불릴 만큼 정밀한 계산력을 바탕으로 한 두터움과 끝내기로 현대 바둑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꿨습니다. 세계대회 우승 21회, 메이저 대회 그랜드슬램 달성, 41연승 대기록, 통산 최다 승리 등 깨지기 힘든 불멸의 대기록을 수립했으며, 단체전인 농심 신라면배에서의 기적적인 연승으로 '철의 수문장' 역할을 해낸 대한민국 바둑의 거대한 자부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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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75

[이창호 출생]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중앙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자녀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하도록 하는 교육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관은 경주 이씨로,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동생과 함께 게임센터에서 놀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였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큰 고집을 피우는 등 훗날의 뚝심을 엿볼 수 있는 강한 성격을 지니기도 했습니다.

1979

[바둑 입문]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친구와 바둑을 두는 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바둑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오목과 알까기를 거쳐 점차 바둑에 깊이 빠져들며 천재적인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 이화춘의 독특한 교육법 덕분에 특정 강좌나 프로 기사에게 국한되지 않고 실력에 관계없이 기원에 있는 누구와도 바둑을 두며 실전을 익혔습니다. 바둑 두는 아이가 드물었던 탓에 전주의 명물이 되어 전국의 아마 고단자들로부터 지도를 받았습니다.

1983

[프로 기사 사사]

여름부터 프로 바둑기사 전영선 7단에게 정식으로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지도를 받으며 실력이 단숨에 급성장하는 계기를 맞았습니다.
이후 스승 전영선의 소개로 당시 바둑계를 완전히 평정하고 있던 전관왕 조훈현 9단과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도 대국을 통해 엄청난 잠재력을 인정받으며 바둑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1984

[어린이 바둑대회 입상]

바둑을 배운 지 불과 2년여 만에 해태배 전국 어린이 바둑대회에 참가해 16강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대회 참가자 중 최연소로 장려상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빠르게 두각을 나타내는 아들의 성적을 지켜본 부모님은 그를 본격적인 프로 바둑의 길로 나서게 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다음 해에는 오켄돔 바둑왕전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조훈현의 내제자 입문]

여름에 한국 바둑의 최고봉인 조훈현 9단의 내제자로 정식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일본과 같은 내제자 제도가 없어 최정상급 기사가 제자를 집에 들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부잣집 도련님으로 곱게 자라 입가에 묻은 것을 스스로 잘 씻지도 못하던 그를 조훈현의 부인 정미화 여사가 씻기고 입히며 친아들처럼 키웠습니다. 이와 동시에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등록되어 5급으로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1986

[역대 최연소 2위 프로 입단]

제54회 입단 시험을 통과하여 11세 1개월이라는 아주 어린 나이로 프로 무대에 정식 입단했습니다. 이는 스승인 조훈현(9세)에 이어 역대 최연소 입단 2위에 해당하는 대기록입니다.
바둑을 본격적으로 배운 지 불과 4년여 만에 달성한 엄청난 쾌거로, 평소 과묵하고 느릿해 보였음에도 바둑판 위에서는 대단한 기재를 소유했음을 증명했습니다. 입단 직후 양재호, 유창혁 등 선배들과 함께 연구회를 열며 훈련에 더욱 매진했습니다.

1987

[연간 승률 1위 달성]

프로 입단 후 불과 1년여 만에 한 해 동안 44승 11패를 기록하며 연간 승률 1위(80%)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신예 기사로서 믿을 수 없는 무서운 상승세를 보여주었습니다.
승리 수에서도 2위를 기록하며 일찌감치 차세대 한국 바둑을 이끌 에이스로 대중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은 묵직하고 침착한 기풍으로 관록의 선배 기사들을 차례차례 압도하기 시작했습니다.

1988

[국기전 서봉수 격파 및 MVP 선정]

국기전 8강전에서 당대 최고의 1인자 중 한 명이었던 서봉수를 꺾으며 바둑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13세 소년이 일으킨 이 파란은 바둑계 세대교체의 거대한 신호탄이었습니다.
이 해에만 무려 75승 10패를 기록하며 88.24%라는 경이로운 역대 연간 최고 승률 신기록을 작성했습니다. 최다 승리, 최다 대국, 25연승 등 각종 개인 기록을 모조리 갈아치우며 연말 MVP로 당당히 선정되었습니다.

[최고위전 스승과의 첫 타이틀 대결]

최고위전 도전 대국에 올라 스승 조훈현 9단과 처음으로 우승 타이틀을 놓고 맞붙었습니다. 결과는 1승 3패로 패배의 쓴맛을 보았으나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어서 열린 패왕전 도전 대국에서도 조훈현과 대결했으나 역시 0승 3패로 물러나며 1인자의 높은 벽을 실감했습니다. 하지만 비록 승리하지 못했음에도 13세 신예와 당대 최고 거장의 타이틀 매치는 한국 전역에서 엄청난 화제를 불러모았습니다.

1989

[세계 대회 첫 출전]

제2회 후지쯔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며 처음으로 험난한 국제 무대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좁은 국내를 넘어 세계로 무대를 뻗어 나가는 성장의 계기였습니다.
당시 아직 나이가 어렸던 탓에 낯선 해외 원정 중 중국 요리를 먹고 배탈이 나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등 타지 적응에 고생하기도 했습니다. 동생 이영호 씨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최연소 첫 타이틀 획득]

KBS 바둑왕전 결승전에서 김수창을 2-0으로 완파하고 생애 최초로 우승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이는 만 14세(13세 6개월)에 이룬 국내 최연소 종합기전 우승이라는 놀라운 기록이었습니다.
스승의 품을 아직 완전히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쟁쟁한 프로들을 꺾고 정상의 자리에 오르며 일찍이 차기 1인자로서의 폭발력을 과시했습니다. 한 치의 오차 없는 수읽기와 끝내기로 선배들을 경악게 했습니다.

1990

[스승의 타이틀을 처음으로 빼앗다]

제29기 최고위전 결승에서 그동안 번번이 무릎을 꿇었던 스승 조훈현을 3-2로 극적으로 꺾고 우승하며 처음으로 스승의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언론에서는 이를 청출어람의 '보은 대국'이라 불렀습니다.
조훈현 9단이 과거 처음으로 획득했던 타이틀을 제자가 직접 꺾고 이어받았다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제자가 스승의 타이틀을 빼앗은 날 이후 집안에 감도는 착잡하고 어색한 기류는 훗날 이창호가 분가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파죽의 41연승 대기록 달성]

1990년 2월 27일부터 장장 수개월에 걸쳐 이어온 무패 연승 행진을 41연승으로 마감하며, 한국 바둑사에 영원히 깨지기 힘들 불멸의 연승 대기록을 작성했습니다.
유리한 형세에서는 결코 무리하지 않고 상대를 질식시키는 기복 없는 안정적인 플레이와 정밀한 끝내기로 일구어낸 금자탑입니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절대 강자의 반열에 확고히 올랐음을 성적으로 완벽히 입증했습니다.

[국수 타이틀 쟁취 및 사강 진입]

제34기 국수전에서 무려 10년 동안 최고 권위의 국수 자리를 장기 집권하던 스승 조훈현 9단을 3-0으로 철저히 완파하고 대망의 국수 타이틀마저 거머쥐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스승에게 단 한 판도 내어주지 않는 '전패준(전패 준우승)'의 굴욕을 안기며 완벽한 세대교체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이 승리를 기점으로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바둑계의 '사강(四强)'으로 확실히 분류되기 시작했습니다.

1991

[독립 생활 시작과 요다 노리모토와의 승부]

고등학교 입학과 함께 어린 시절부터 오랜 기간 머물렀던 조훈현 스승의 집을 떠나 독립적인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바둑 클럽 기획으로 일본의 요다 노리모토와 5번기를 가졌으나 1-3으로 쓰라린 패배를 당했습니다.
독립 이후 스스로 모든 일상과 승부를 책임지게 되며 정신적으로 더욱 성숙해지는 시기를 보냈습니다. 요다 노리모토 등 국제 무대 일부 기사들에게 한때 약점을 보이기도 했으나, 특유의 근성으로 단점을 보완하며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1992

[최연소 세계 챔피언 등극]

제3기 동양증권배 세계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일본에서 활동하는 대만 출신의 거물 린하이펑을 3-2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6세 5개월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세계 타이틀 획득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수립했습니다.
어린 소년의 세계 제패 소식은 국내 언론을 도배하며 전 국민을 열광시켰고, 전국적으로 어린이 바둑 교실 열풍을 일으키며 바둑 대중화에 엄청난 기여를 했습니다. 일본 바둑계 역시 한국의 어린 천재 등장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1993

[동양증권배 세계선수권 2연패]

제4기 동양증권배 결승 무대에서 당시 일본 최강자로 불리며 세계를 호령하던 조치훈 9단을 3-0으로 완파하며 대회 2연속 우승이라는 쾌거를 손쉽게 달성했습니다.
결승전이 열리기 전 조치훈이 스승 조훈현에게 '제자에게 너무 무기력하게 지는 것 아니냐'고 농담을 던졌으나, 막상 본인 역시 단 한 판도 이기지 못하고 0-3으로 참패하며 이창호의 상상을 초월하는 실력을 뼈저리게 실감해야 했습니다.

[최연소 500승 고지 점령]

만 18세 4개월이라는 매우 이른 나이에 역대 최연소 통산 500승이라는 엄청난 승수 고지에 올랐습니다. 입단 이후 쉬지 않고 승리를 긁어모은 압도적인 결과물이었습니다.
무서운 승률과 페이스로 국내외 바둑계를 무자비하게 평정해 나가고 있음을 숫자로 명백히 입증하는 기록이었습니다. 이는 먼 훗날 후배 기사들에게도 넘어서기 힘든 거대한 통계적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1994

[국내 13관왕 및 사이클링 히트 달성]

이 한 해 동안 77승 20패(승률 79.4%)의 어마어마한 성적을 거두며, 제18기 기왕전을 비롯해 국내에 존재하는 16개 주요 기전 중 무려 13개의 타이틀을 동시에 휩쓰는 경이로운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국내 기전을 사이클링 히트 수준으로 싹쓸이하며 말 그대로 국내 무대에 적수가 없는 '이창호 천하'를 완벽히 굳혔습니다. 오랫동안 왕좌를 지키던 스승 조훈현을 완전히 무관으로 밀어내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 1인자로 우뚝 섰습니다.

[제2회 진로배 단체전 우승 견인]

제2회 진로배 세계 바둑 최강전에 한국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일본의 우주류 창시자 다케미야 마사키 9단을 완벽하게 꺾고 한국의 단체전 우승을 최종적으로 결정지었습니다.
개인전뿐만 아니라 국가의 명운이 걸린 국가 대항 단체전에서도 흔들림 없는 멘탈과 기량을 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바둑이 일본과 중국을 넘어 세계 무대를 강력하게 주도하는 이른바 '세계 제패 시대'를 활짝 열어젖혔습니다.

[이창호를 위한 병역법 특혜 신설]

이창호가 만 19세에 접어들며 군 복무 문제가 큰 이슈로 떠오르자, 국회의원 105명의 연명으로 '이창호 후원회'가 결성되어 전격적으로 병역법 시행령 제49조가 개정되었습니다.
그가 바둑으로 이룬 막대한 국위 선양을 입법부가 공식 인정한 사례입니다. 국가 차원의 특별한 배려 덕분에 예술체육요원 자격으로 바둑계에 계속 남아 활동할 수 있는 합법적이고 영구적인 특례 제도가 새롭게 마련되었습니다.

1995

[기초 군사 훈련 및 공익근무 돌입]

새롭게 개정된 병역법 혜택에 따라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여 4주간의 기초 군사 훈련을 받은 후, 예술체육요원(공익근무요원)으로 정식 편입되어 국방의 의무 대체 복무를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인 현역 복무와 달리 대체 복무를 수행하면서도 각종 세계 대회 및 주요 국내 대회에 자유롭게 출전할 수 있는 자격을 온전히 유지했습니다. 덕분에 바둑 황제로서의 빛나는 커리어를 조금의 단절 없이 매끄럽게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1996

[바둑 사상 최초 2단 특별 승단]

수많은 국제 대회를 휩쓰는 압도적인 성과로 인해, 기존의 엄격한 승단 규정을 뛰어넘어 한국 바둑 사상 최초로 7단에서 9단(입신)으로 단번에 2단 특별 승단하는 최고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미 세계 일인자로 군림하고 있던 그에게 형식적인 승단 대회를 치르게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바둑계 전체의 폭넓은 합의가 도출된 전향적인 결과물이었습니다. 당시 유창혁 역시 함께 9단으로 특별 승단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후지쯔배 우승으로 세계 제패]

제9회 세계 바둑선수권 후지쯔배 결승에서 승리하며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이는 이창호 개인의 커리어에 있어서 처음으로 해외 원정에서 개최된 세계 대회 우승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었습니다.
이 해에만 진로배, 동양증권배, 후지쯔배, TV 바둑 아시아선수권 등 내로라하는 국제 메이저 대회를 모조리 싹쓸이하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무대에서의 완벽한 지배력을 마음껏 과시했습니다.

1998

[5대 메이저 세계대회 결승 진출 위업]

한 해가 진행되는 동안 후지쯔배, 동양증권배, 삼성화재배, LG배, 춘란배 등 무려 세계 5대 메이저 바둑 대회 모두에서 결승 무대에 오르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엄청난 진기록을 수립했습니다.
이 5번의 결승 중 스승 조훈현에게 유일하게 일격을 당한 춘란배를 제외하고 무려 4개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습니다. 만약 춘란배마저 우승했다면 세계 바둑 대회 전관왕이라는 인간계를 벗어난 기록이 탄생할 뻔했습니다.

[예술체육요원 대체 복무 완료]

3년간 이어졌던 예술체육요원(공익근무요원) 신분으로서의 병역 대체 복무를 성공적이고 무사히 마치고, 다시 완전히 자유로운 민간인 신분으로 바둑 승부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무 기간 동안 제한된 환경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강철 같은 성적을 꾸준히 유지해 왔으며, 소집 해제 직후 더욱 가벼워진 심리적 상태를 바탕으로 전 세계 기전 사냥에 무서운 속도로 박차를 가했습니다.

1999

[초대 농심 신라면배 우승 견인]

국가대항전인 제1회 농심 신라면배 세계 바둑 최강전에서 한국팀의 든든한 주장으로 출전하여 일본의 조선진, 중국의 마샤오춘을 연달아 물리치며 한국의 초대 우승을 영광스럽게 확정 지었습니다.
상대국의 날고 기는 기사들을 홀로 막아내는 이른바 '수문장' 이창호의 전설적인 활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대회입니다. 이후로도 그는 농심배에서 벼랑 끝에 몰린 한국팀을 수차례 구원하며 단체전 불패의 명성을 떨쳤습니다.

2000

[응창기배(응씨배) 세계선수권 제패]

4년마다 한 번씩 열려 바둑계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최고의 무대, 제4회 응창기배(응씨배) 세계 프로 바둑선수권 결승에서 중국의 간판스타 창하오를 꺾고 대망의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가장 막대한 우승 상금과 명예가 걸린 최고 권위의 대회를 제패함으로써 세계 바둑 1인자로서의 확고부동한 위상을 천하에 알렸습니다. 또한 이 해에 최연소 1000승 고지(25세 2개월)를 돌파하는 겹경사를 누렸습니다.

2001

[통산 100회 타이틀 돌파]

제5회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에서 떠오르는 천재 후배 이세돌 3단에게 백 불계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해, 프로 데뷔 이후 통산 100번째 우승 타이틀을 획득하는 역사적인 대위업을 달성했습니다.
세계 최강자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무서운 후배 이세돌의 거센 도전을 관록과 두터움으로 제압한 명승부였습니다. 100회 우승 돌파와 더불어 이 해에 바둑 기사 최초로 연간 상금 10억 원을 돌파하며 눈부신 최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2003

[세계 대회 커리어 그랜드슬램 위업]

제4회 춘란배 세계 바둑선수권과 도요타 & 덴소배 바둑 세계 왕좌전 등에서 연이어 챔피언에 오르며, 당대 존재하는 모든 주요 메이저 세계 대회를 최소 한 번 이상 우승하는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했습니다.
전 세계의 다양한 룰과 제한 시간, 환경을 극복하고 모든 종류의 대회를 모조리 휩쓰는 전무후무한 위업을 이룩했습니다. 이를 통해 과거와 현대 바둑을 통틀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사상 최고의 기사로서 입지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2004

[상하이 대첩, 농심배 5연승 기적]

제6회 농심 신라면배 국가대항전에서 한국팀의 앞선 기사들이 조기 탈락해 홀로 남겨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주장으로 나서 뤄시허, 장쉬, 왕레이, 왕밍완, 왕시 등 중일의 최고수 5명을 차례로 꺾는 기적의 5연승으로 한국의 우승을 홀로 이끌어냈습니다.
바둑 팬들 사이에서 영원히 회자되는 이른바 '상하이 대첩'의 순간입니다. 고립무원의 절대적 열세 속에서도 강철 같은 멘탈을 유지하며 단체전에서만큼은 절대 지지 않는 이창호의 신화적인 위력을 전 세계에 가장 강렬하게 각인시켰습니다.

2006

[농심배 연속 우승 수호]

제8회 농심 신라면배 세계 바둑 최강전에서도 한국의 최종 병기인 주장으로 듬직하게 출전하여 중국의 최고 강자들인 쿵제와 구리를 연달아 제압하고 또다시 조국에 우승컵을 안겨주었습니다.
당시 개인전 성적에서는 이세돌 등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게 서서히 정상을 내어주기 시작하는 시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체전인 농심배에서만큼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무적의 '철의 수문장' 포스를 여전히 뿜어냈습니다.

2010

[최연소 1500승 대기록 돌파]

제28기 KBS 바둑왕전에서 소중한 1승을 추가하며, 역대 최연소인 35세 5개월이라는 나이로 프로 통산 1500승이라는 경이로운 대기록 고지를 단숨에 돌파했습니다.
전성기가 이미 지났다는 항간의 냉혹한 평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꾸준함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달성해 낸 찬란한 금자탑이었습니다. 한국 바둑계에 그가 남긴 땀방울과 발자취의 묵직함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기록입니다.

[광저우 아시안 게임 단체전 금메달]

바둑이 아시안 게임 정식 종목으로 사상 처음 채택된 광저우 대회 남자 단체전 결승에 제1장으로 당당히 출전해, 중국의 에이스 구리를 꺾고 한국의 역사적인 금메달 획득에 크게 일조했습니다.
대회 직전 최악의 성적 부진을 겪고 있어 선발의 정당성을 우려하는 비판적 목소리가 컸으나, 조국의 명예가 걸린 가장 결정적인 승부처에서 전성기를 방불케 하는 묵직하고 완벽한 내용의 명국을 펼치며 '역시 이창호'라는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2011

[22년 만의 타이틀 상실 (무관)]

국수전 결승 시리즈에서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는 후배 최철한 9단에게 최종적으로 패배하며 마지막 남은 타이틀 방어에 실패했습니다. 이로써 1989년 첫 타이틀 획득 이후 무려 22년 만에 처음으로 타이틀이 하나도 없는 '무관(無冠)' 신세가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한국과 세계 바둑을 무자비하게 지배했던 위대한 '이창호 천하'가 마침내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음을 세상에 알리는 서글프고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인자의 짐은 자연스럽게 이세돌과 박정환 등 차세대 기수들에게 넘어갔습니다.

2013

[KBS 바둑왕전 결승 진출 투혼]

국내 속기전인 KBS 바둑왕전에서 당시 부동의 랭킹 1위였던 이세돌과 가장 무섭게 떠오르던 신성 박정환을 잇달아 꺾는 기염을 토하며 결승에 진출하는 눈부신 노장 투혼을 발휘했습니다.
전성기가 훌쩍 지나 30대 후반의 적지 않은 나이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최정상급 후배 기사들의 덜미를 잡을 수 있는 예리한 승부 감각과 저력이 살아있음을 증명하여 오랜 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울렸습니다.

[KBS 바둑왕전 명승부 끝 준우승]

까마득한 후배 박정환 9단과 치른 KBS 바둑왕전 결승 3번기 최종 3국에서 치열한 혈투 끝에 아쉽게 패배의 쓴잔을 마시며, 종합 전적 1승 2패로 준우승 타이틀에 머무르고 말았습니다.
2010년 국수전 이후 약 3년여 만에 개인전 우승컵을 다시 들어 올릴 기회를 노렸으나 한 끗 차이로 아깝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뼈아픈 패배로 인해 박정환과의 상대 전적이 벌어지고 국내 랭킹 역시 14위까지 떨어지며 흐르는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농심배 예선 탈락의 뼈아픈 이변]

과거 자신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던 제15회 농심 신라면배 세계 바둑 최강전의 국가대표 선출을 위한 국내 예선전에서 뜻밖의 일격을 당하며 매우 충격적이고 쓸쓸한 예선 탈락을 경험했습니다.
한때 농심배에서 승률 86%를 자랑하며 세계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사나이'가 본선 무대 구경조차 하지 못하게 되자 바둑계 전체가 큰 충격과 허탈감에 빠졌습니다. 공교롭게도 이세돌 9단마저 함께 탈락의 고배를 마시며 세대교체의 거센 바람을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2016

[한국바둑리그 현역 깜짝 복귀]

사랑하는 두 딸의 육아와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일선 승부에서 한발 물러나 조용히 지내던 상황에서, 정관장 팀의 사령탑 김영삼 감독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 2지명으로 전격 발탁되어 한국바둑리그 무대에 현역 선수로 깜짝 복귀했습니다.
그동안 언론 인터뷰도 고사하며 그저 '평범한 가장'으로 지내고 싶다던 그였지만, 만 16세의 앳된 1지명 후배 신진서 5단을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주는 맏형 역할로 승부의 세계에 흔쾌히 돌아와 오랜만에 팬들에게 큰 반가움을 선사했습니다.

2017

[압도적 지지 '역대 최고의 기사 1위']

국내 최고 권위의 바둑 전문 잡지인 '월간 바둑'에서 저명한 바둑 전문가 그룹과 일반 바둑 팬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으로 실시한 '역대 최고의 기사'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다른 전설들을 제치고 압도적인 1위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현역으로서 천하를 호령하던 최전성기에서 내려온 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끝내기와 계산 바둑으로 전 세계 바둑의 패러다임 자체를 완전히 송두리째 바꾼 독보적이고 위대한 업적을 역사적으로 다시 한번 공고히 인정받은 가슴 벅찬 결과였습니다.

2023

[버팀목이던 아버지 이재룡 옹 별세]

어린 시절부터 막내아들의 특별한 바둑 재능을 알아보고 곁에서 아낌없는 금전적, 정신적 지원을 쏟으며 그가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가장 든든하고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훌륭한 부친 이재룡 씨가 향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큰 슬픔을 겪었습니다.
일찍부터 자녀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강요 없이 스스로 선택하게 존중하며, 어린 아들이 낯선 서울로 홀로 상경해 치열한 승부에 도전하는 것을 뒤에서 조용하고 묵묵하게 응원했던 속 깊은 아버지를 여의며 인간 이창호로서 매우 깊은 애도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2024

[동생이자 매니저 이영호 씨 별세]

1998년부터 형의 곁에 딱 붙어 낯선 환경의 중국 등 험난한 해외 원정 일정마다 헌신적으로 매니저 역할을 도맡아 주며 승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큰 의지가 되었던 친동생 이영호 씨가 젊은 나이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는 비보를 접했습니다.
동생 이영호 씨는 형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담아 '나의 형, 이창호'라는 회고록 책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음식 적응이 유독 힘들고 예민했던 형을 위해 타지에서 보이지 않는 그림자처럼 묵묵히 희생했던 소중한 핏줄의 부고는 그를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비통함에 빠뜨렸습니다.

2025

[사제 대결 모티브 영화 《승부》 개봉]

1990년대 바둑계를 뒤흔들었던 이창호 9단과 그의 영원한 스승 조훈현 9단 간의 애증과 피를 말리는 치열했던 사제지간 타이틀 매치 명승부를 모티브로 하여 제작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승부》가 마침내 전 세계 대중에게 공개되었습니다.
과거 대한민국 전체를 바둑의 열기로 들썩이게 만들었던 두 위대한 전설의 감동적인 스토리를 다룬 이 영화에서 천재 제자 이창호 역은 명배우 유아인이 열연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묵묵하고 조용했던 그의 극적이고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훌륭한 문화 콘텐츠로 재탄생하며 다시 한번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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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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