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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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열
야구 선수, 내야수, 야구 코치 + 카테고리
서울 수유초, 신일중, 신일고를 거쳐 건국대학교를 졸업한 이창열은 왜소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빠른 발과 뛰어난 야구 센스로 2014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했습니다. '깐돌이'라는 별명처럼 그라운드를 누비며 1군 무대에 도전했으나, 1군과 2군을 오가는 백업 내야수로서 힘겨운 경쟁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통산 4시즌 동안 41경기에 출전해 타율 0.189를 기록하는 등 아쉬움을 남겼지만, 선수 시절 겪은 시련과 경험을 바탕으로 은퇴 후에는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강릉고 코치 시절 감독 대행으로서 팀을 봉황대기 결승으로 이끄는 등 지도력을 인정받으며 제2의 야구 인생을 꽃피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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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91

[이창열 탄생]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축구를 좋아하던 형을 따라 운동을 접하다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야구 방망이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서울 수유초등학교, 신일중학교를 거쳐 신일고등학교 야구부에 진학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운동에 소질을 보였습니다.
신일고 시절에는 왜소한 체격 탓에 야구부 입단이 거절될 뻔했으나 이를 극복하고 팀의 주장까지 맡았습니다. 하지만 고교 졸업 당시 프로 드래프트에서 지명받지 못하는 아픔을 겪고 건국대학교로 진학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내야 수비 코치가 없는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 수비법을 터득하며 간절하게 실력을 키웠습니다.

2013

[프로 지명 및 한화 이글스 입단]

2014 KBO 신인 드래프트 2차 7라운드 전체 67순위로 한화 이글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4년 전 미지명의 설움을 씻고 꿈에 그리던 프로 무대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빠른 발과 센스를 갖춘 내야 자원으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대학 4학년 때 주장을 맡으며 보여준 리더십과 급성장한 기량이 스카우트들의 눈에 띄었습니다. 건국대 시절 신장 질환으로 군 면제 판정을 받아 병역 문제에서도 자유로웠던 점은 프로 생활에 집중할 수 있는 이점이었습니다. 계약금 3,000만 원에 입단 계약을 맺고 등번호 6번을 배정받았습니다.

2014

[데뷔 첫 안타 및 결승타 기록]

잠실 두산전에서 프로 데뷔 첫 안타를 결승 3루타로 장식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9회초 2사 2루의 긴박한 상황에서 터진 천금 같은 안타였습니다. 이 한 방으로 팀은 2:1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데뷔 시즌 동안 주로 대타나 대수비 요원으로 1군 무대를 밟았습니다. 비록 많은 기회를 얻지는 못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존재감을 알린 이 경기는 팬들에게 이창열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습니다. 시즌 총 22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190을 기록했습니다.

2015

[2년 차 시즌의 부진]

프로 2년 차를 맞이했으나 1군 진입의 벽은 높았습니다. 단 5경기에 출전해 2타수 1안타를 기록하는 데 그쳤습니다. 1군보다는 2군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며 힘겨운 주전 경쟁을 이어갔습니다.
김성근 감독 체제 하에서 많은 훈련량을 소화했으나 실전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등번호를 43번으로 교체하며 심기일전을 노렸지만, 1군 내야진의 틈을 파고들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시즌 후반에는 육성 선수로 전환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2017

[오키나와 스프링캠프 참가 및 논란]

일본 오키나와 스프링캠프 명단에 포함되어 1군 진입을 노렸으나 연습 경기 도중 논란에 휘말렸습니다.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 수비 실책성 플레이 후 문책성 교체를 당했고, 경기 도중 숙소로 복귀한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이는 감독과 코칭스태프의 눈 밖에 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김성근 감독은 그가 경기 중 7km 떨어진 숙소까지 구보로 복귀했다고 밝혔으나, 구체적인 정황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 이후 시즌 내내 2군에 머물렀으며, 시즌 막바지인 9월 30일에야 1군에 등록되어 단 3경기 출전에 그쳤습니다. 선수 생활 중 가장 큰 위기이자 시련의 시기였습니다.

[미야자키 캠프 사건 및 무혐의 처분]

시즌 종료 후 참가한 일본 미야자키 마무리 캠프 도중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어 현지 경찰 조사를 받았습니다. 쇼핑몰에서 발생한 성추행 혐의로 입건되었으나, 억울함을 호소하며 조사에 임했습니다. 다행히 일본 검찰로부터 불기소 처분을 받으며 누명을 벗었습니다.
사건 초기 구단과 선수는 CCTV 확인 등을 요청했으나 현지 경찰의 비협조로 난항을 겪었습니다. 약 한 달간의 억류 끝에 12월 8일 무혐의로 풀려나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혐의는 벗었으나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고 심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2018

[육성선수 전환 및 1군 출전 불발]

정식 선수 명단에서 제외되어 육성 선수 신분으로 시즌을 시작했습니다. 2군에서 절치부심하며 재기를 노렸으나 끝내 1군의 부름을 받지 못했습니다. 1군 기록 없이 퓨처스리그에서만 시즌을 보냈습니다.
입단 동기들이 자리를 잡아가거나 방출되는 상황 속에서 이창열은 생존을 위한 마지막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등번호를 10번에서 94번으로 바꾸는 등 변화를 주었으나 기량 정체와 팀 내 입지 축소로 인해 선수 생활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2019

[2년 만의 1군 복귀]

오랜 기다림 끝에 정식 선수로 전환되며 1군 엔트리에 등록되었습니다. 등번호 4번을 달고 그라운드에 복귀하여 간절한 플레이를 펼쳤습니다. kt전에서 기습 번트 안타와 타점을 기록하며 존재감을 보였습니다.
5월 3일 kt전 대타로 나와 번트 안타를 성공시킨 장면은 그의 야구 센스를 보여주는 대목이었습니다. 하지만 5월 4일 경기에서 작전 사인을 읽지 못하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습니다. 이 시즌 총 11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154를 기록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습니다.

[한화 이글스 방출]

시즌 종료 후 구단의 재정비 과정에서 방출 통보를 받았습니다. 6년간 몸담았던 한화 이글스를 떠나게 되며 프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습니다. 1군 통산 41경기 출전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함께 입단했던 동료들과 함께 웨이버 공시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비록 스타 플레이어는 되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성실하게 훈련에 임했던 선수로 기억되었습니다. 은퇴 후 그는 곧바로 지도자로서의 새로운 길을 모색했습니다.

2021

[강릉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부임]

고교 시절 은사였던 최재호 감독의 부름을 받아 강릉고등학교 야구부 수석 코치로 부임했습니다. 프로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후배 양성에 힘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지도자로서 제2의 야구 인생을 힘차게 출발했습니다.
코치 부임 후 선수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며 기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멘탈 관리에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특히 수비와 주루 플레이 등 자신이 선수 시절 강점을 보였던 분야에서 노하우를 전수했습니다. 강릉고가 고교 야구의 강팀으로 자리 잡는 데 일조했습니다.

2022

[봉황대기 감독 대행 준우승 견인]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기간 중 청소년 대표팀 감독으로 차출된 최재호 감독을 대신해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감독 대행으로서 팀을 안정적으로 이끌며 결승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비록 결승에서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지도력을 인정받았습니다.
2회전부터 감독 대행을 맡아 작전 지시와 선수 기용을 도맡았습니다. 결승전에서 부산고에 0-1로 석패하며 아쉽게 우승컵을 놓쳤으나, 위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리더십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대회를 통해 차세대 지도자로서의 가능성을 입증했습니다.

2025

[북일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부임]

충암고등학교 코치를 거쳐 야구 명문 북일고등학교 코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더욱 체계적인 시스템 속에서 유망주들을 육성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지도자로서의 커리어를 착실히 쌓아가고 있습니다.
한화 이글스의 연고지인 천안의 북일고로 부임하며 충청권 야구와 다시 인연을 맺었습니다. 선수 시절 이루지 못한 1군 주전의 꿈을 제자들을 통해 이루겠다는 각오로 지도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현장에서는 기본기를 중시하는 코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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