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 (군인)
연표
1890
이응준은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수안 이씨이다.
1906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던 이응준은 16세가 되던 해 한성부로 올라와 신학문을 접했다. 이때 고향 선배인 노백린과 이갑의 영향을 받아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1909
이갑의 지원을 받아 보성중학교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쳤다.
1914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쳐 육군사관학교를 제26기로 졸업했으며, 이후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여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하는 1945년까지 일본군에 복무했다.
1918
10월 혁명 이듬해 일본군이 시베리아 지역 반혁명군 지원을 위해 출병했을 때, 육군 중위였던 이응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되어 이 지역 한국인들을 이용한 대민 정탐 활동을 주요 임무로 수행했다.
1919
[3·1 운동과 망명 모의]
3·1 운동이 일어나자 김경천, 지청천과 함께 중국 망명을 모의했으나, 일본군 장교로 남았다.
3·1 운동이 발발하자 김경천, 지청천과 함께 중국 망명을 모의했으나, 두 사람과는 달리 이응준은 망명을 결행하지 않고 일본군 장교로 계속 복무했다.
1925
육군 대위 시절,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할 때 만주의 봉천 지역으로 국경을 넘어 출동했다.
1928
육군 대위 시절,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할 때 만주의 봉천 지역으로 국경을 넘어 출동한 일이 또 있었다.
1935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서보장을 수여받았다.
1936
[중좌 진급 및 배속 장교 근무]
중좌로 진급한 뒤 중일 전쟁 직전까지 경성의학전문학교와 경성약학전문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담당하는 배속 장교로 근무했다.
중좌로 진급한 후, 중일 전쟁 발발 직전까지 경성의학전문학교와 경성약학전문학교에서 배속 장교로 근무하며 군사 교육을 책임졌다.
1937
[중일 전쟁 참전 및 전투 참여]
중일 전쟁에 참전하여 사단사령부와 북지파견군 사령부 등에서 병무 및 병참 업무를 수행했으며, 난위엔 전투와 산둥성 팔로군 게릴라 토벌에도 직접 참여했다.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사단사령부와 북지파견군 사령부 등에서 병무 업무와 병참수송 업무를 주로 수행했다. 중일 전쟁 확전의 빌미가 된 난위엔 전투에 직접 참여했으며, 산둥성에서는 팔로군 게릴라 토벌 부대의 지휘관을 맡았다.
1939
일본 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을 수여받았다.
1941
일본 육군 대좌로 승진하였다.
1943
[징병제 지지 및 학도병 참전 독려]
징병제 실시에 대해 공개적으로 지지를 표명하고 인력 동원에 앞장섰으며, 부민관 강연회에서 학도병으로 참전할 것을 권유하는 연설을 했다.
태평양 전쟁으로 징병제가 실시되자, 이응준은 이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적극적인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방하며 인력 동원에 앞장섰다. 부민관 강연회에 참석하여 지원병 제도를 홍보하고 학도병으로 참전할 것을 권유하는 연설을 하는 등 친일 행위를 벌였다.
1945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했을 때, 함경남도 원산부에서 원산항 수송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이응준은 패전과 동시에 개인적으로 탈출하여 서울로 입성했다.
1946
일본 패망 후 미군정의 군사 고문으로 위촉되어 대한민국 국군을 창설할 때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이때부터 대한민국 육군 복무가 시작되었다.
1948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초대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어 이듬해 5월 8일까지 재임했다.
1949
춘천 8연대의 강태무, 표무원 대대의 월북 사건으로 인해 육군 참모총장 직에서 경질되었다.
1950
육군 참모총장 경질 이후 제5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이응준은 대한민국 서울에서 전쟁을 맞이했으며, 수원지구방위사령관 등의 직책으로 참전하여 전쟁 수행에 임했다.
1952
육군대학교 총장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는 영예를 안았다.
1955
[육군대학교 커닝 사건]
육군대학교 총장 재직 중 아들 이창선 중령을 포함한 진급 심사 커닝 사건이 발생하여 아들이 예편했다.
이응준이 육군대학교 총장으로 재직 중이던 시기, 육군대학교 진급 심사 시험 중 커닝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준장 2명, 대령 2명, 그리고 당시 육군참모총장 비서실장이던 그의 장남 이창선 중령이 군복을 벗고 예편했다.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뒤, 제7대 대한민국 체신부 장관으로 취임하여 3년간 공직을 수행했다.
아들 이창선 중령의 육군대학교 진급 심사 커닝 사건의 여파로,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게 되었다.
1967
한국반공연맹 이사장에 취임하며 반공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72
반공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반공유공자 보국훈장 통일장을 서훈받았다.
1979
국정자문위원을 역임하며 다양한 국가 정책에 대한 자문 활동을 펼쳤다.
1980
국방정책자문위원장과 국토통일원 고문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사회 활동을 이어갔다.
1985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례는 육군장으로 치러졌으며,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007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군인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8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등재]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포함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