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븐 시나
연표
980
[이븐 시나 탄생]
페르시아의 위대한 지성, 이븐 시나가 사만 왕조 부하라 근교 아프샤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아부 알리 알후사인 빈 압둘라 빈 알하산 빈 알리 빈 시나입니다.
이븐 시나는 980년 8월 말 사만 왕조의 징세관이었던 압둘라흐 이븐 알 하산과 그 처 시타라의 자식으로 수도 부하라 근교의 아프샤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아부 알리 알후사인 이븐 압둘라 이븐 시나 알 부하리로, 라틴어로는 아비켄나, 그리스어로는 아비켄나스라고 불렸습니다.
985
[부하라 이주 및 조기 교육 시작]
다섯 살 때 일가가 부하라로 이주하며 이븐 시나는 부하라의 사숙에 들어가 꾸란과 아랍 문학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븐 시나가 다섯 살 때 일가가 부하라로 이주하였고, 그는 부하라의 사숙에 들어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꾸란을 배우고 열 살에 이미 아랍의 많은 문학 작품과 꾸란을 암송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기억력을 보였습니다.
996
[의학 입문 및 조기 진료]
열여섯 살에 의학, 자연학, 형이상학을 배우기 시작하며 환자를 진료했고, 의학을 아주 짧은 시간에 습득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주르잔 출신의 그리스도교 의사 사흘 알 마시히에게서 자연학, 형이상학, 의학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열여섯 살 때에 이미 환자를 진료했습니다. 훗날 이븐 시나는 의학에 대하여 "별로 어려운 학문도 아니어서 아주 짧은 시간에 습득할 수 있었다"라고 자신의 자서전에서 술회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용한 텍스트는 원전이 아닌 가정의학 지침서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997
[알 파라비 주석서를 통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이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 난해하여 고심하던 중, 시장에서 우연히 알 파라비의 주석서를 접하고 비로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븐 시나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난해한 것이었고, 그의 저서 《형이상학》을 마흔 번이나 정독했지만 그 뜻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술회합니다. 어느 날 부하라 시장을 돌아다니다 어느 점원에게 알 파라비가 저술한 형이상학의 주석서를 구입했고, 이를 계기로 비로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998
[학문 독학 완성 및 첫 저작 저술]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독학으로 모든 학문을 완성했으며, 이웃을 위해 최초의 저작인 백과사전 《여러 학문의 집성》을 저술했습니다.
스승들에게서 더 배울 것이 없게 된 이븐 시나는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몇 년간 독학을 하여 모든 학문을 수학했다고 스스로 술회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이 해에 이웃에 살던 알-아루디를 위해 이븐 시나는 최초의 저작 《여러 학문의 집성》을 저술했습니다.
999
[아버지 사망과 《공정한 판단의 서》 완성]
사만 왕조가 멸망하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격동의 해에, 이븐 시나는 전 20권의 백과사전 《공정한 판단의 서》를 완성합니다.
999년 사만 왕조가 가즈나 왕조와 카라한 왕조의 공격으로 멸망했습니다. 스물한 살 때에 법학자 알 바르키를 위해 이븐 시나는 전 20권의 백과사전 《공정한 판단의 서》를 써서 올렸습니다. 그 해에 이븐 시나의 아버지 압둘라흐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1002
[방랑의 시작]
아버지 사후 생계가 어려워지고 부하라 사람들의 냉대 속에서, 이븐 시나는 스물두 살에 부하라를 떠나 평생 돌아오지 않는 방랑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이븐 시나는 아버지 사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궁정에 출사하였으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생계를 이어나가기 어려워졌습니다. 부하라 사람들이 이름 없는 가계 출신인 이븐 시나를 매정하게 대했던지, 스물두 살 때에 부하라를 떠나 방랑길에 올랐고, 이후 평생 부하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005
[《의학전범》 집필 시작 및 비루니와의 교류]
호라즘의 우르겐치 통치자 마문 2세에게 기용되어 관리가 되었고, 이때 인류 의학사에 길이 남을 대작 《의학전범》의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천문학자 비루니와 우주론 및 물리학에 대해 토론하며 지식을 교류했습니다.
이븐 시나는 호라즘 지방의 우르겐치 통치자 마문 2세에게 기용되어 관리가 되었고, 그의 법률고문으로써 활약하는 한편으로 《의학전범》의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우르겐치에 머무르는 동안 호라즘 출신의 천문학자 비루니와도 교류하여 편지를 주고 받으며 우주론과 물리학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습니다. 비르니와의 편지는 《문답 모음집》이라는 책으로 기록되어 젊은 시절 이븐 시나의 지견을 엿볼 수 있습니다.
1012
[가즈나 왕조의 출사 거절과 호라즘 탈출]
사만 왕조를 멸망시킨 가즈나 왕조 마흐무드의 출사 요청을 거절하고 마문 2세의 도움으로 호라즘을 탈출, 다시 유랑길에 올랐습니다. 마흐무드는 이에 격노하여 이븐 시나의 수색을 명했습니다.
1012년에 사만 왕조를 멸망시킨 가즈나 왕조의 마흐무드가 이븐 시나 등 호라즘의 학자들에게 출사를 요청하였으나, 이븐 시나는 그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마문 2세는 가즈나 왕조의 사자가 방문하기 전에 이븐 시나에게 노잣돈과 안내인을 붙여 주며 몰래 그를 도망시켰고, 이렇게 이븐 시나는 호라즘을 떠나 다시 방랑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마흐무드는 이븐 시나가 도망쳤다는 것을 알고 격노해서 각지의 제후들에게 그의 수색을 요구하는 명령서를 보냈습니다.
1013
[주르잔 정착과 《의학전범》 제1부 집필]
방랑 끝에 주르잔에 정착하여 애제자 알 주자니를 만났고, 이곳에서 논리학과 천문학을 가르치며 《의학전범》의 제1부를 집필했습니다.
니샤푸르를 거쳐 이븐 시나는 방랑 끝에 카스피 해 가까운 주르잔에 그의 거처를 정했습니다. 주르잔을 찾기 전에 수피즘 성자 이븐 아비르 하이르와 재회하였고, 쥬르잔을 통치하고 있던 지야리드 왕조의 군주 카부스의 비호를 구하는 취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주르잔에 도착했을 때 이미 카부스는 세상을 떠났고, 실의에 빠진 이븐 시나는 일시 은거 생활을 보냈으나 이 땅에서 그의 애제자가 될 알 주자니와 만나게 됩니다. 알 주자니는 늘 이븐 시나와 행동을 함께했고, 이븐 시나의 구술 필기를 통해 그의 전기를 저술하였습니다. 주르잔에서 이븐 시나는 논리학과 천문학을 가르쳤고, 《의학전범》의 제1부를 집필했습니다.
1014
1014년에 테헤란 근교의 레이로 옮겨 바쁜 생활을 틈타서 30여 편의 단편을 써 냈습니다.
1015
[하마단 피신 및 샴스 웃다울라 시의]
레이가 전란에 휩싸이자 부와이흐 왕조의 하마단으로 피신하여 군주 샴스 웃다울라의 시의가 되었습니다. 그의 산통을 치료하여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얼마 안 가서 레이가 전란에 휩싸이게 되자, 이븐 시나는 다시 부와이흐 왕조가 통치하는 하마단으로 달아났습니다. 이븐 시나는 하마단의 군주 샴스 웃다울라의 시의가 되어 샴스 웃다울라의 산통(疝痛)을 치료하여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1016
[재상 기용 및 대작 저술 본격화]
샴스 웃다울라의 재상으로 기용되어 정무와 학문 연구를 병행하며 《치유의 서》와 《의학전범》의 저술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밤에는 제자들과 연구 내용을 나누며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샴스 웃다울라의 신임을 얻어 재상으로 기용된 이븐 시나는 낮에는 정무를 보고 밤에는 연구와 강의로 생활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치유의 서》와 《의학전범》의 저술을 시작했으며, 샴스 웃다울라의 의뢰를 받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에 주석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밤늦게 이븐 시나의 집에 모인 제자들은 그가 저술한 《의학전범》과 《치유의 서》 일부를 돌려 읽었으며, 작업 중 휴식 시간에는 다양한 노래가 난무하는 술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1020
[세계 의학사의 기념비적 저서 《의학전범》 완성]
유럽 의학의 기본서가 될 인류 의학사 최고의 명저 중 하나인 《의학전범》을 완성했습니다. 이 책은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의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020년에 이븐 시나는 이전부터 집필해 오던 《의학전범》을 완성했습니다. 이 책은 당시 알려진 모든 의학 정보를 집대성한 것으로,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의학의 기본서로 사용되었습니다. 갈레노스의 의학과 유사한 점이 많았지만, 결핵의 전염성, 성병 등에서는 의견을 달리하기도 했습니다.
1021
[투옥과 옥중 집필]
재상으로 섬기던 샴스 웃다울라가 사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며 《치유의 서》 구상에 몰두했습니다. 하지만 이스파한 군주와의 서신 교환이 발각되어 하마단의 새로운 군주에 의해 투옥되는 시련을 겪었으나, 옥중에서도 학문 연구를 멈추지 않고 논문을 집필했습니다.
1021년 샴스 웃다울라가 세상을 떠나고, 이븐 시나는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며 《치유의 서》를 어떤 형태로 완성시킬 것인지에 대한 구상을 모색했습니다. 그는 이스파한의 군주와 편지 교환이 있었는데, 이를 알게 된 하마단의 새로운 군주 사마 웃다울라는 이븐 시나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븐 시나는 옥중에서도 논문을 계속해서 집필했습니다.
1022
[이스파한 이주와 재상 복귀]
옥에서 석방된 후 동생과 제자, 노예들과 함께 수피즘 탁발 수도사로 변장하고 이스파한으로 이주했습니다. 이스파한 군주 알라 웃다울라에 의해 재상으로 기용되어 다시 정무를 보게 됩니다.
이븐 시나는 옥중에서도 논문을 계속해서 집필하였고, 석방된 뒤에는 동생과 한 명의 제자, 두 명의 노예를 데리고 수피즘 탁발 수도사로 변장하고 이스파한으로 이주했습니다. 이스파한으로 이주한 이븐 시나는 정무에서 물러나 저술에 전념하고자 했지만, 이스파한의 군주 알라 웃다울라는 이븐 시나를 그냥 두지 않고 재상으로 기용했고, 이븐 시나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1030
[이스파한 피습과 장서 소실]
이스파한이 가즈나 왕조의 공격을 받아 점령당했고, 이븐 시나는 자신의 소중한 장서들을 포함한 모든 소유물들을 빼앗기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이전에 저술했던 《공정한 판단의 책》도 이때 흩어져 버렸습니다.
1030년, 이스파한은 가즈나 왕조의 군주 마스우드 1세의 공격을 받았고, 이븐 시나는 자신의 장서를 포함한 소유물들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때 일찍이 그가 저술했던 《공정한 판단의 책》도 흩어져 버렸습니다.
1037
[이븐 시나 사망]
알라 웃다울라의 하마단 원정에 동행 중 병으로 쓰러져, 2주 전부터 모든 치료를 거부하고 가진 것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며 꾸란을 낭독하다 하마단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의 사인은 위암 또는 이질로 추정됩니다.
1037년 이븐 시나는 알라 웃다울라의 하마단 원정에 동행하였으며, 행군 도중에 병으로 쓰러졌습니다. 이븐 시나가 죽음을 맞기 2주 전, 그는 일체의 치료를 거부하고 가난한 자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주고 노예들은 해방시켰으며, 매일 《꾸란》을 낭독하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6월 18일 이븐 시나는 하마단에서 그의 파란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사인은 위암(또는 이질)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다른 가족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