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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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중국 문학사상 최고로 추앙받는 '시선(詩仙)' 이백은 천재적인 영감과 얽매이지 않는 호방함으로 낭만주의 시풍을 완성한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유년기부터 학문과 검술을 닦으며 호연지기를 기른 그는 세상을 떠돌며 관직에 오를 기회를 맹렬히 찾았습니다. 황제의 부름을 받아 장안의 궁정 시인이 되며 생애 최고의 빛나는 순간을 맞이하기도 했으나, 오만한 성품 탓에 권력 암투의 희생양이 되어 다시 기나긴 유랑길에 올랐습니다. 두보 등 수많은 명사들과 세기의 교유를 나누었고, 내란에 휩쓸려 역적으로 몰리는 등 굴곡진 삶을 살았음에도, 그의 붓끝에서 탄생한 천여 편의 시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까지 전 세계인의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연표
701
[비범한 소년의 탄생]
촉 지방에서 성장하며 일찍부터 백가의 서적을 탐독하고 검술을 즐기는 비범한 소년으로 자라났다. 도사나 은사들과 깊이 교류하며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상을 품기 시작했다.출생지에 관해서는 쓰촨성 면주 창명현이라는 설과 키르기스스탄 부근인 안서도호부 쇄엽성이라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무예를 몹시 사랑하여 협객들과 어울렸으며, 젊은 시절 직접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임협(任俠)의 기풍이 몹시 강했다.
721
[익주 장사 소정의 극찬]
고향을 떠나 익주 지역을 유람하던 중 지방의 고위 관료를 알현하여 자신의 뛰어난 문학적 기량을 처음으로 인정받았다. 이 만남은 그의 문학적 자부심을 하늘을 찌를 듯이 높여주는 계기가 되었다.당시 익주 장사였던 소정은 이백을 만나보고 "천재적이고 영리하며 붓을 들면 쉬지 않는다"며 혀를 내둘렀다. 덧붙여 조금만 더 내공을 쌓으면 과거의 위대한 문인 사마상여에 필적할 것이라는 엄청난 극찬을 쏟아냈다.
724
[더 큰 뜻을 품고 촉을 떠나다]
더 나은 앞날과 관직 진출의 기회를 잡기 위해 비장한 마음으로 고향 촉을 떠나 양쯔강을 따라 동쪽으로 기나긴 유람을 시작했다. 이 험난한 유람 과정에서 맹호연 등 당대의 이름난 문인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가을 무렵 길을 떠나 후베이성, 후난성 일대를 폭넓게 돌아보았으며, 샹양에 이르러서는 평소 흠모하던 시인 맹호연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는 단순한 풍류가 아니라 자신을 중앙 조정에 추천해 줄 유력자를 찾아 나선 치열하고 간절한 여정이었다.
725
[금릉과 양주를 유람하다]
강을 따라 계속해서 내려가 마침내 번화한 금릉과 양주 지역에 당도하여 화려한 문물을 마음껏 경험했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유흥을 즐기며 머물렀으나 결국 여비가 모두 떨어져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여름 즈음에 도착하여 무려 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도시에 머물며 호기롭게 돈을 썼다. 든든한 경제적 후원자가 없었던 청년기의 그는 낭만적인 방랑의 이면에서 늘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렸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해야 했다.
727
[안주에서 허씨와 혼인하다]
귀향길에 안주에 머물다가 명문가의 여식과 혼인하여 처가에 의탁하는 데릴사위가 되었다. 처가의 경제적 지원과 든든한 배경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관직 진출의 끈을 강하게 모색하기 시작했다.그의 첫 번째 부인인 허씨는 전 재상 허어사의 손녀였다. 그는 허씨 가문의 재력과 사회적 명성에 크게 의존하여 생계를 유지했으며, 여러 차례 안주의 관리들에게 자신을 추천해 달라고 적극적으로 청탁했으나 안타깝게도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731
[장안 입성을 위해 낙양으로]
황제의 순행 시기에 맞추어 관직의 기회를 잡고자 당나라의 도읍인 낙양으로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유력자들의 눈에 띄기 위해 매일같이 술집을 전전하며 당대의 호걸들과 사귀고 천재적인 시문을 뽐냈다.당시 당 현종이 낙양에 당도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어떻게든 벼슬자리를 구하고자 급히 이동한 것이다. 비록 황제의 눈에 드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 시기에 맺은 다양한 호걸 및 문인들과의 교유는 그의 문학적 세계관을 한층 더 넓혀주었다.
734
[양주 자사 앞에서의 무례]
유람을 이어가던 중 지방 장관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을 천거해 달라고 간절히 청원했다. 그러나 막상 알현하는 자리에서 술에 취해 심각한 무례를 범하는 바람에 등용의 기회를 제 손으로 날려버렸다.당시 양주 자사였던 한조종을 만났으나 예의를 갖추지 못하고 불경한 태도를 보여 크게 꾸지람을 듣고 쫓겨나고 말았다. 세속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거침없고 호방한 성격이 오히려 관직 진출을 가로막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 대표적 일화이다.
735
[병주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다]
절친한 벗의 고향인 병주로 함께 여행을 떠나 그곳의 최고 권력자인 벗의 아버지로부터 융숭한 환대를 받았다. 근심과 걱정을 모두 잊고 즐거운 유흥의 시간을 보내며 오랫동안 머물렀다.평소 가깝게 지내던 친구 원연과 함께 떠난 여행이었으며, 태원부윤이었던 원연의 아버지가 그를 매우 극진히 모셨다. 계속되는 구직 실패의 피로와 좌절을 잊고 이백 스스로 '촉나라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유흥과 시 창작에 흠뻑 취해 지냈다.
737
[상처의 아픔과 장안행]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던 부인 허씨가 세상을 떠나자 남은 아이들을 데리고 외롭게 남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절박한 심정으로 황제에게 직접 사부를 바치며 장안으로 향했으나 철저히 외면당하고 종남산에 은거했다.부인 허씨의 죽음은 그에게 커다란 정신적 상실감과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궁여지책으로 조정에 직접 뛰어난 문장력을 과시하여 벼슬을 얻으려 했으나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자, 결국 세상에 대한 미련을 접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738
[옥진공주 별관의 식객]
종남산에 은거하던 중 황실의 핵심 인사인 공주의 별관에 식객으로 들어가 머물게 되었다. 황족과의 친분을 통해 관직을 얻으려 했으나, 그곳에서도 철저한 무관심과 냉대만을 견뎌야 했다.당 현종의 누이인 옥진공주의 눈에 띄어 어떻게든 추천을 받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했으나, 돌아온 것은 차갑고 가혹한 대우뿐이었다. 이 시기 최고 권력자들의 문전에서 연이어 겪은 수모는 자존심 강한 그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740
[죽계육일, 산동에 은거하다]
검술을 연마하기 위해 산동 지역으로 무작정 떠나 마음이 맞는 명사들을 만났다. 세속의 출세 욕심을 완전히 내려놓고 조래산 깊은 곳에 숨어들어 매일같이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공소부 등 5명의 당대 지식인들과 함께 깊이 어울렸으며, 사람들은 세상을 등진 이 여섯 명의 신선 같은 무리를 일컬어 '죽계육일(竹溪六逸)'이라 불렀다. 현실의 두터운 벽에 부딪힌 지식인들이 보여준 전형적이고 도피적인 도교적 행보였다.
741
[항주 일대를 유람하다]
오랜 은거지였던 연주를 떠나 새로운 영감을 찾기 위해 항주 일대로 유람의 발길을 돌렸다. 수려한 자연경관을 만끽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자유분방한 시 세계를 한층 깊이 있게 다듬어 나갔다.번잡한 세속을 벗어나 절경을 찾아다니는 그의 방랑벽은 일평생 그칠 줄을 몰랐다. 항주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자연과 하나 되는 도교적 감수성을 키우며, 훗날 쏟아낼 수많은 명시들의 시적 자양분을 비축하는 귀중한 시간을 가졌다.
742
[마침내 황제의 부름을 받다]
전국을 떠돌며 쌓아온 고고한 선비로서의 엄청난 명성이 마침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 수도 장안으로의 특별 부름을 받았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크게 웃을 정도로 뛸 듯이 기뻐하며 화려한 도읍으로 당당히 입성했다.당시 옥진공주나 유명한 도사 오균의 강력한 추천이 황제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일국의 지존인 현종의 특별한 소환은 그가 평생을 바쳐 그토록 갈망해 온 관직 진출의 꿈이 극적으로 이루어지는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적선인, 한림공봉에 임명]
장안에서 대학자 하지장으로부터 '귀신을 울릴 시'를 쓰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연이어 황제에게 바친 글이 큰 감동을 주며 단숨에 궁정 최고 시인으로 파격 발탁되었다.현종은 그의 경이로운 문학적 재능을 몹시 아껴 직접 국을 끓여 맛보게 할 정도로 파격적인 총애를 베풀었다. 황제를 최측근에서 모시며 조서 초안을 작성하고 궁중 연회에서 화려한 시를 짓는 한림공봉 자리에 오르며 일생일대의 눈부신 최전성기를 누렸다.
743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 되다]
자유분방한 기질을 숨기지 못하고 술에 취해 유력한 환관에게 자신의 신발을 벗기게 하는 오만을 부렸다. 이에 깊은 앙심을 품은 권력자들이 후궁을 앞세워 집요하게 헐뜯으면서 황제의 총애도 점차 싸늘하게 식어갔다.취중에 당대 최고의 실세였던 환관 고력사에게 수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신발을 벗기도록 모욕을 주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고력사가 양귀비에게 그가 지은 시가 사실은 양귀비를 비하한 것이라고 교묘하게 모함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744
[환멸을 느끼고 장안을 떠나다]
숨 막히는 궁중의 암투와 비열한 견제에 극심한 회의감을 느끼고 마침내 스스로 벼슬을 내려놓았다. 고향 산천으로 돌아가겠다는 핑계로 화려했던 권력의 중심부를 매몰차게 버리고 다시 기나긴 유랑길에 올랐다.겨우 2년 남짓한 짧은 관직 생활은 웅대한 이상과 더러운 현실의 거대한 괴리만을 처절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천하를 경륜하겠다는 당찬 정치적 포부를 품고 입성했던 그는 결국 벼슬이라는 무거운 굴레를 훌훌 벗어던지고 평생의 고독한 방랑객으로 되돌아갔다.
[시성 두보와의 역사적 조우]
장안을 떠나 변주와 송주 일대를 자유롭게 유람하던 중, 훗날 자신과 함께 문학사의 쌍벽을 이룰 위대한 시인 두보와 우연히 마주쳤다. 두 천재는 즉각적인 교감을 나누며 명승고적을 함께 여행하고 통음하며 우정을 다졌다.이 시기 그는 이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후배 문인 두보, 그리고 고적을 만나 함께 여행했다. 중국 문학사를 가장 찬란하게 빛낸 두 위대한 천재, 이백과 두보의 가슴 벅찬 첫 만남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대단히 상징적이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745
[두보와의 영원한 이별]
연주 일대에서 은사들을 방문하며 즐거운 여행을 이어가던 중, 평생의 지기였던 두보와 깊은 아쉬움 속에 작별을 고했다. 가을에 헤어진 이후,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살아서 두 번 다시 마주치지 못했다.짧지만 강렬했던 만남을 끝으로 서로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났으나, 두보는 평생토록 이백의 천재적인 시상과 호방한 기운을 흠모하며 그리워했다. 훗날 두 사람이 서로를 생각하며 주고받은 수많은 시편들은 당대 문인들의 뜨겁고 깊은 우정의 증표로 영원히 남았다.
746
[강동 유람과 도교의 심취]
연주에서 큰 병을 앓고 일어난 뒤, 강동 일대를 유람하며 과거의 지인 및 저명한 도사들과 교유했다. 현실 정치의 환멸을 잊기 위해 도교적 신비주의와 늙지 않는 신선술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친구 원단구, 공소부 등과 다시 회합하였으며 특히 도교계의 거물이었던 오균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허탈감을 초자연적인 신선 사상과 도교적 상상력으로 승화시키며 자신만의 독보적인 문학 세계를 완성해 나갔다.
749
[전 재상의 손녀와 재혼하다]
기나긴 강남 유람 생활을 이어가던 중, 과거 조정을 호령했던 전직 재상 집안의 여식과 다시 혼인을 맺으며 삶의 안정을 꾀했다. 부부 모두 종교적 취향이 같아 깊은 정신적 유대를 나누었다.도교에 심취하여 강동 일대를 떠돌던 그는 전 재상 종초객의 핏줄인 종씨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종씨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도교의 가르침을 굳게 믿고 따랐기에, 방랑에 지친 이백에게 큰 정신적 위안과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752
[유주에서 군사적 뜻을 꺾다]
쉰을 넘긴 적잖은 나이에도 군대에서 직책을 맡아 공을 세우겠다는 호기를 부리며 변방인 유주로 험난한 원정을 떠났다. 하지만 자신이 자랑하던 무예를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자 깊은 좌절감만 안고 발길을 돌렸다.거칠고 강인한 진짜 무인들이 넘쳐나는 유주 국경 지대에서, 검술을 뽐내는 늙은 문인 출신이 설 자리는 애초에 없었다. 세상을 경륜하고 군사적으로 기여하겠다는 그의 끈질긴 마지막 실천적 열망마저 완전히 꺾여버린 서글프고 쓸쓸한 여정이었다.
754
[양주에서 원고를 위탁하다]
명성을 듣고 천 리 길을 멀다 않고 추적해 찾아온 열렬한 지음(知音)에게 자신의 소중한 육필 원고들을 모두 내어주었다. 사방에 흩어진 작품들을 하나의 온전한 문집으로 엮어 달라는 간곡하고 절박한 부탁과 함께였다.왕옥산의 은사인 위호가 이백의 작품 세계를 깊이 흠모하여 기나긴 추적 끝에 양주에서 마침내 조우했다. 그가 위호에게 문집의 편집을 전적으로 위탁한 덕분에, 자칫 흩어질 뻔했던 수많은 명시들이 유실을 면하고 오늘날까지 후대에 온전히 전해질 수 있었다.
755
[안사의 난, 피난길에 오르다]
부인이 머물고 있는 변주에 들러 가족을 살피던 무렵, 세상을 피비린내로 뒤덮은 거대한 내란이 터지고 말았다. 극도의 공포와 혼란을 피해 아내의 손을 잡고 황급히 남쪽으로 험난한 피난길에 올랐다.당나라를 걷잡을 수 없는 몰락의 길로 이끈 최악의 반란인 안사의 난은, 세상을 주유하던 방랑 시인의 고고한 삶마저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평화롭던 유람 생활은 박살 났고, 생존을 위해 처절한 도망자 신세가 되며 그의 말년은 비극을 향해 내달렸다.
756
[영왕 이린의 군대에 합류하다]
여산을 피난처로 삼아 불안하게 숨어 지내던 중, 반란 진압을 명분으로 내세운 황족의 다급한 부름을 받고 군대의 막하로 들어갔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겠다는 충정이었으나,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자충수가 되었다.영왕 이린이 수군을 이끌고 동진할 때 참모로 합류한 이 결정은,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시인이 저지른 인생 최대의 정치적 오판이었다. 훗날 영왕의 거병이 반란 진압이 아닌 황위를 노린 반역 행위로 공식 규정되면서, 그 역시 꼼짝없이 역적으로 몰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757
[반역죄로 옥살이와 유배]
영왕의 군대가 정규군에게 무참히 패배하자 팽택으로 도주 후 자수하여 차가운 감옥에 갇혔다. 처형의 공포 속에서 지인들의 결사적인 구명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야랑으로 유배를 가던 중 극적인 사면을 받았다.반역 혐의로 투옥되었을 때 부인 종씨가 사방으로 뛰어다녔고, 특히 과거 그가 목숨을 구해주었던 곽자의가 자신의 관직을 모두 걸고 구명에 나선 덕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반면 과거 우정을 나눴던 절도사 고적에게는 구원을 청했으나 차갑게 외면당하는 등 인심의 냉혹함을 뼈저리게 겪어야 했다.
762
[시선의 파란만장한 죽음]
반역의 오명과 혹독한 고초를 겪고 사면되어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환갑이 넘은 나이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했다. 강물에 비친 아름다운 달을 좇아 몸을 던졌다는 전설만을 남긴 채 선계로 돌아갔다.송대부터 민간에 널리 전해지는 매우 낭만적인 전설에 따르면, 채석기에서 흠뻑 취해 배를 타고 가다가 강물에 뜬 달을 건지려다 물에 빠져 익사했다고 한다. 죽은 후 항해를 수호하는 수신(水神)으로까지 추앙받으며, 역사상 가장 낭만적이고 위대한 시선(詩仙)으로서의 삶을 전설 속에 영원히 박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