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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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이난영
가수, 그룹 멤버, 연예 기획자, 대중음악인 대중음악 가수/아이돌
일제강점기 억눌린 민족의 한을 달래주었던 전설적인 가수이자 한국 최초의 걸그룹 '저고리 시스터즈'를 이끌었던 선구자입니다. 천재 작곡가 김해송과 결합하여 한국 최초의 블루스를 부르며 재즈 보컬의 토대를 다졌습니다. 한국 전쟁으로 남편을 잃는 비극 속에서도 자녀들로 구성된 '김시스터즈'를 결성해 아시아 걸그룹 최초로 미국 시장에 진출시키는 등 억척스러운 생명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말년에는 마지막 사랑이었던 남인수마저 병으로 떠나보내고 우울증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기구한 운명을 겪었지만, 그녀가 남긴 200여 곡의 유산은 한국 대중음악사의 가장 빛나는 별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916

[험난한 생애의 시작]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오빠와 함께 갖은 고생을 하며 유년 시절을 보냅니다. 훗날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길 재능을 품고 자라납니다.
전라남도 목포부 양동 72번지에서 아버지 이남순과 어머니 박소아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이옥례였으며, 위로는 두 살 터울의 오빠인 이봉룡이 있어 어린 시절부터 함께 어려운 가정 환경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1932

[우연이 만든 첫 무대]

유랑 극단을 따라다니던 중 막간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를 기회를 얻습니다. 이때 보여준 뛰어난 노래 실력으로 정식 극단원으로서의 길을 걷게 됩니다.
16세 때 제주도에서 열린 삼천가극단의 순회 공연 중 우연히 막간 무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무대에서 노래 실력을 확실히 인정받은 그녀는 순회극단을 본격적으로 따라다니며 가수의 꿈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운명적인 발탁과 취입]

일본 순회 공연 중 그녀의 잠재력을 알아본 작사가의 추천으로 당대 유명 레코드사와 인연을 맺습니다. 이를 계기로 생애 첫 곡을 녹음하며 데뷔할 발판을 마련합니다.
삼천가극단의 일본 순회 공연 당시 작사가 강사랑의 눈에 띄어 오케레코드사의 사장 이철에게 전격 추천을 받았습니다. 이후 문호월이 작곡한 '고적'이라는 곡을 처음으로 취입하며 재능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1933

[데뷔 직전의 비보]

본격적인 데뷔 음반이 세상에 나오기 직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습니다. 가슴속에 묻은 슬픔은 훗날 그녀의 애절한 목소리의 밑거름이 됩니다.
가수로 공식 데뷔하는 음반이 발표되기 직전인 1933년 8월, 아버지 이남순이 사망하는 비보를 접했습니다.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였지만,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닥친 가족의 죽음은 어린 소녀에게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태평레코드를 통한 데뷔]

마침내 정식으로 데뷔 음반을 발표하며 대중 앞에 이름을 알립니다. 그녀의 애절한 목소리는 발매와 동시에 음악 팬들의 이목을 사로잡기 시작합니다.
아버지의 부고와 비슷한 시기, 태평레코드의 9월 신보로 기획된 독창곡 '시드는 청춘'과 '지나간 옛 꿈'을 통해 공식적으로 대중 가요계에 데뷔했습니다. 이는 그녀의 기나긴 음악 인생의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오케레코드와의 만남]

새로운 레코드사로 자리를 옮겨 새로운 음반을 연이어 발표합니다. 이 음반사를 통해 그녀는 본격적인 전성기를 향한 강력한 기틀을 다지게 됩니다.
오케레코드사에서 처음으로 '향수'라는 곡을 발표하며 데뷔했습니다. 이전 태평레코드에서 먼저 음반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오케레코드의 이철 사장이 선수를 뺏겨 쌩고생을 하며 그녀를 영입했다는 흥미로운 비화가 전해집니다.

1934

[활발한 음반 활동]

연이어 다양한 곡들을 발표하며 가요계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탄탄히 다져나갑니다. 그녀 특유의 음색이 점차 대중들의 삶 속에 깊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오케레코드 등을 통해 '불사조', '봄맞이' 등 다수의 곡을 잇달아 발표하며 인지도를 한껏 끌어올렸습니다. 태평양 전쟁 군수 물자 통제로 음반 발매가 막혔던 1944년경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달 새로운 곡을 발매할 만큼 왕성한 활동력을 과시했습니다.

1935

[가요계 최고의 스타 등극]

고향의 애환을 담은 절창이 전국적인 대히트를 기록하며 단숨에 당대 최고의 국민 가수로 떠오릅니다. 이 곡은 핍박받는 시대를 대표하는 민족의 노래로 굳건히 자리 잡게 됩니다.
민족의 한과 저항을 절절히 담아낸 명곡 '목포의 눈물'을 발표하여 가요계에 혜성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습니다. 일제강점기 억눌린 대중들의 설움을 달래준 이 노래는 훗날까지 오랫동안 애창되는 한국 트로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곡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936

[천재 작곡가와의 결합]

음악적 동지이자 당대 최고의 천재 작곡가와 부부의 연을 맺습니다.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은 수많은 명곡을 탄생시키는 한국 대중음악사의 중요한 변곡점이 됩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뛰어난 작곡가 겸 가수인 김해송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공연하고 곡을 작업하며 공사 양면에서 완벽한 파트너가 되었고, 슬하에 4남 3녀라는 다복한 자녀를 두었습니다.

1937

[계속되는 히트 행진]

남편의 전폭적인 지원과 협력 속에서 또 하나의 히트곡을 탄생시킵니다. 부부의 완벽한 음악적 호흡이 무대 위에서 빛을 발하며 대중의 든든한 지지를 받습니다.
남편인 김해송이 전폭적으로 지원한 노래 '해조곡'을 취입하여 다시 한번 가요계에 큰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이 무렵 남편 김해송은 아내뿐만 아니라 처남인 이봉룡에게도 작곡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주며 대중음악 명가로서의 기틀을 단단히 다졌습니다.

1938

[이난영 걸작집 발매]

그동안 발표한 명곡들을 집대성한 특별한 앨범이 세상에 나옵니다. 곡마다 유명 배우의 해설이 덧붙여진 독특한 기획으로 팬들의 이목을 강하게 사로잡습니다.
오케레코드에서 그녀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이난영걸작집'이 전격 발매되었습니다. 이 음반은 노래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당대 유명 배우였던 심영이 육성으로 곡에 대한 해설을 곁들이는 매우 파격적이고 신선한 형식으로 제작되어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1939

[한국 최초 걸그룹의 탄생]

당대를 주름잡던 최고의 동료 여성 가수들과 함께 프로젝트 보컬 그룹을 결성합니다. 민요와 서양 음악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화려한 무대를 선보이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냅니다.
'오빠는 풍각쟁이'의 박향림, '연락선은 떠난다'의 장세정, '화류춘몽'의 이화자 등과 함께 대한민국 대중음악 역사상 최초의 걸그룹으로 평가받는 '저고리 시스터즈'를 결성했습니다. 우리 노래를 부를 때는 저고리와 족두리를, 서양 노래를 부를 때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는 등 파격적인 무대 매너를 뽐냈습니다.

[블루스의 여왕이 되다]

남편이 그녀만을 위해 작곡해 준 노래로 전에 없던 새로운 장르에 과감히 도전합니다. 독보적인 리듬감과 가창력을 뽐내며 대중음악의 지평을 한 차원 넓힙니다.
남편 김해송이 아내를 위해 작곡한 한국 최초의 블루스 장르 곡 '다방의 푸른 꿈'을 발표했습니다. 완벽한 스윙 재즈 스캣 창법과 블루 노트 리듬을 기반으로 한 그녀의 세련된 가창은 일제강점기 초창기 재즈 보컬의 개척자라는 찬사를 받게 만들었습니다.

1942

[오빠와의 합작 히트]

작곡가로 성장한 오빠의 곡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또 하나의 불멸의 히트곡을 만들어냅니다. 남매가 함께 빚어낸 이 노래는 고향을 상징하는 영원한 찬가로 남게 됩니다.
조명암이 작사하고 친오빠 이봉룡이 작곡한 노래 '목포는 항구다'를 발표하여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곡은 먼저 히트했던 '목포의 눈물'과 더불어 지금까지도 그녀의 고향 목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대중가요로 대중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1943

[악극단으로의 무대 확장]

시대적 암흑기 속에서도 남편과 함께 새로운 극단으로 소속을 옮겨 무대 활동을 끈질기게 이어갑니다. 쉴 새 없는 순회공연을 통해 관객들과 끊임없이 호흡하며 역량을 발휘합니다.
연말 무렵부터 남편 김해송과 함께 약초(若草)가극단에 전격 입단하여 활동 무대를 옮겼습니다. 기존 조선악극단에서 소속을 옮기는 과정에서 단원 홍청자 등과 남편 사이의 얄궂은 불화설이 언론 기사를 통해 도는 등 가십거리에 휘말리는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1945

[광복 직전의 무대]

조국이 빛을 되찾기 직전의 혼란스러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묵묵히 악극단 활동을 계속합니다. 무대 위에서 예술인으로서의 본분을 끝까지 지켜냅니다.
일제의 극심한 군수 물자 통제로 인해 레코드 음반 취입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척박한 상황 속에서도 만타 악극단에 소속되어 끈질기게 무대 공연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역사적인 조국의 광복을 맞이하며 활동의 해체와 재편이라는 새 국면을 맞게 됩니다.

1950

[전쟁이 앗아간 남편]

민족의 비극적인 전쟁이 발발하면서 남편이 강제로 납북되는 돌이킬 수 없는 시련을 겪습니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고 홀로 남아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혹한 처지에 놓입니다.
한국 전쟁의 혼란 속에서 남편 김해송이 북한군에 의해 실종 및 납북되는 크나큰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남편의 생사도 확인하지 못한 채 어린아이들만 데리고 부산으로 험난한 피난을 떠나야 했으며, 이후 동료 가수의 도움으로 남편의 KPK악단을 이난영악단으로 부활시키려 노력했으나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끝내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1953

[전설의 가족 그룹 결성]

척박한 피난 시절,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린 자녀들을 주축으로 한 보컬 그룹을 과감하게 결성합니다. 어머니의 혹독한 훈련 끝에 미군 부대 무대에 오르며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게 됩니다.
자신의 두 딸인 숙자, 애자와 오빠 이봉룡의 딸인 조카 민자를 모아 걸그룹 '김시스터즈'를 결성했습니다.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아이들에게 직접 여러 악기를 다루고 화려한 춤을 추도록 혹독하게 가르쳤으며, 이들은 미8군 위문 공연 무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1959

[딸들의 미국 진출]

피땀 어린 노력으로 길러낸 딸들이 마침내 바다를 건너 꿈의 무대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룹니다. 아시아 걸그룹 최초의 발자취를 남기며, 어머니로서 말할 수 없는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녀가 열정으로 키워낸 걸그룹 '김시스터즈'가 아시아 걸그룹으로는 최초로 미국 라스베이거스 무대에 당당히 진출했습니다. 이들은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아 훗날 스타더스트 호텔에서 엄청난 액수의 주급을 받고 수십만 달러의 세금을 내는 고액 납세자로 이름을 떨치며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1962

[마지막 사랑과의 사별]

전쟁의 깊은 상처를 위로해 주며 헌신적인 사랑을 나눴던 마지막 연인마저 무심한 병마로 인해 곁을 떠납니다. 연인의 마지막을 직접 품에 안고 배웅하며 씻을 수 없는 우울의 늪에 빠집니다.
피난 시절부터 곁에서 자신을 지켜주어 깊은 사랑에 빠진 뒤 사실혼 관계로 지내던 국민 가수 남인수가 폐결핵 투병 끝에 결국 그녀의 무릎을 벤 채로 비극적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녀의 오빠 이봉룡과 지인 반야월이 두 사람의 애절한 사랑을 위해 노래까지 만들어 주었으나, 이 뼈아픈 사별은 그녀에게 감당하기 힘든 심각한 우울증을 남겼습니다.

1965

[파란만장한 생의 마감]

거듭된 이별과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불꽃 같았던 예술가의 삶을 쓸쓸히 마감합니다. 한국 대중음악사에 찬란한 빛을 남긴 채, 그녀가 부른 수많은 명곡들과 함께 영원한 전설로 숨을 거둡니다.
연인 남인수의 죽음 이후 악화된 심한 우울증과 알코올, 아편 중독의 후유증으로 인해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비록 기구하고 불행했던 말년이었으나, 대한민국 가요계의 선구자로서 그녀가 남긴 200여 곡의 노래는 후대에도 끊임없이 연구되고 사랑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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