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카이사르
연표
BC 1C
[로마 수부라 지구에서 탄생]
로마 공화정의 위대한 지도자가 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의 서민 지역인 수부라 지구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100년 7월 12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의 수부라 지구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서 깊은 귀족 율리우스 씨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가문은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이 없었다. 그의 탄생지는 서민 지역이었다.
[아버지 사망과 코르넬리아와의 결혼]
16살의 카이사르가 아버지를 여의고 가장이 되었다. 이듬해 유피테르의 고위 사제로 지명되며 민중파의 영수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기원전 8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16살의 카이사르는 가장이 되었다. 이듬해 그는 유피테르의 고위 사제인 플라멘 디알리스로 지명되었는데, 이 사제직은 귀족과 귀족 출신 부인과의 결혼을 요구했다. 이에 그는 어릴 때 맺은 약혼을 파기하고 당시 민중파의 영수였던 집정관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했다.
[술라의 명령 거부 및 소아시아 도피]
술라가 로마를 장악하고 마리우스 지지자들을 숙청하자, 마리우스의 처조카이자 킨나의 사위였던 카이사르도 숙청 명단에 올랐다. 그는 술라의 아내 코르넬리아와의 이혼 명령을 거부하고 소아시아로 도피, 미누키우스 총독 휘하에서 군 경력을 시작했다.
기원전 82년, 술라가 로마를 장악하고 마리우스 지지자들을 숙청하면서 마리우스의 처조카이자 킨나의 사위였던 카이사르 역시 숙청 명단에 올랐다. 그는 유산과 사제직을 잃었지만, 아내 코르넬리아와의 이혼을 거부하여 잠적할 수밖에 없었다. 술라파 모계 집안과 베스타 여사제의 개입으로 사면되었지만, 술라는 "카이사르 속에 수많은 마리우스가 있다"고 경계하며 그를 소아시아로 떠나게 했다. 카이사르는 아시아 속주에서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 휘하에서, 킬리키아에서는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밑에서 복무하며 군 경력을 쌓았다.
[미틸리니 공성전 참여 및 시민관 수여]
미틸리니 공성전에서 큰 공을 세워 로마 시민 중 뛰어난 용감성을 보인 자에게 수여되는 시민관을 받으며 군인으로서의 능력을 증명했다.
기원전 80년, 카이사르는 미틸리니(레스보스섬) 공성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고 시민관(Civic Crown)을 수여받았다. 이는 로마군에서 뛰어난 용맹을 보인 자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상이었다. 그는 또한 비튀니아 왕 니코메데스 4세의 함대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이때 궁정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 왕과 동성애 염문이 돌기도 했다.
[술라 사망과 로마 귀국]
독재관 술라가 사망하자 로마로 돌아와 변호사로 활동하며 전직 총독들의 부패를 고발하며 명성을 얻었다.
기원전 78년, 독재관 술라가 사망하자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와도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유산을 몰수당해 재산이 없던 그는 로마 하층민들이 사는 수부라에 평범한 집을 얻었다. 변호사로 활동하며 빼어난 웅변으로 금품 강요와 부패로 악명 높던 전직 총독들을 고발하여 유명해졌다. 키케로도 그를 칭찬하며 "이제 나와보라, 어느 웅변가가 그대를 능가하겠는가?"라고 말할 정도였다.
[변호사 활동 및 정치적 시도]
변호사로 활약하며 전직 총독들의 부패를 고발했으나, 당시 권력자들을 상대로 한 고소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 시기 반술라파 반란에는 가담하지 않는 등 신중한 행보를 보였다.
기원전 77년, 카이사르는 변호사 활동을 통해 전직 총독들의 부패를 고발하며 명성을 쌓았지만, 당시 권력자들을 상대로 한 고소는 번번이 실패했다. 그는 반술라파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반란 시도에는 가담하지 않는 등 정치적 상황을 신중하게 판단했다.
[해적에게 납치되다.]
수사학을 배우기 위해 로도스섬으로 유학 가던 중 해적에게 납치되었다. 그는 해적들이 제시한 몸값보다 더 높은 금액을 요구하며 당당한 태도를 보였고, 풀려난 뒤 사비를 들여 병력을 모아 해적들을 추적해 모두 십자가형에 처했다.
기원전 75년, 수사학을 완성하기 위해 로도스섬으로 유학 가던 중 킬리키아 해적에게 잡혀 파르마쿠사 섬에 갇히게 되었다. 해적들이 제시한 몸값 은 20 탈란톤보다 더 많은 50 탈란톤을 요구하며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몸값이 지불된 후, 그는 배를 모아 해적들을 추적해 잡았고, 아시아 총독 마르쿠스 융크투스가 노예로 팔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한으로 해적들을 모두 십자가형에 처했다.
[군사 참모 선출 및 스파르타쿠스 전쟁 관여]
로도스 유학에서 돌아온 뒤 쿠르수스 호노룸의 첫 단계인 군사 참모로 선출되었다. 이 시기 스파르타쿠스 전쟁이 발발했는데, 카이사르가 직접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기록은 없지만 이에 관여했다.
해적 사건 이후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쿠르수스 호노룸의 첫 단계인 군사 참모(military tribune)로 선출되었다. 이 시기에 스파르타쿠스 전쟁(기원전 73~71년)이 일어났으나, 카이사르가 이때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고모와 아내의 죽음, 그리고 히스파니아 재무관]
재무관으로 선출된 해, 고모 율리아와 아내 코르넬리아를 잃었다. 고모 장례식에서 술라 집권 이후 금지되었던 마리우스의 상을 전시하며 대담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고, 이후 히스파니아에서 재무관직을 수행하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상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기원전 69년에 카이사르는 재무관에 선출되었다. 그 해, 마리우스의 미망인이었던 고모 율리아의 장례식 연설을 하며 술라 집권 이후 볼 수 없었던 마리우스의 상을 전시했다. 그의 아내 코르넬리아도 같은 해 세상을 떠났다. 장례가 끝나고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의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휘하에서 재무관직을 수행했다. 이곳에서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상을 보고 자신은 아직 이룬 것이 없음에 불만을 느끼며 큰 깨달음을 얻었고, 재무관직 조기 해임을 요청하여 승인받고 로마 정계로 돌아왔다.
[폼페이아와의 재혼과 마리우스 기념비 복구]
로마로 돌아와 술라의 손녀 폼페이아와 재혼했으며, 조영관으로 선출된 후 술라 집권 이후 금지되었던 마리우스의 승전 기념비를 복구하여 정치적 반향을 일으켰다. 공공 사업과 경기에 막대한 돈을 써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기원전 67년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술라의 손녀인 폼페이아와 결혼했다. 조영관으로 선출된 그는 마리우스의 승전 기념비를 복구하여 술라파가 아직 정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술라의 재산 몰수로 이익을 봤던 사람들을 기소하고, 공공 사업과 경기에 막대한 돈을 빌려 써서 동료 조영관 비불루스보다 더 큰 명성을 얻었다.
[대신관 취임 및 카틸리나 음모사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로마 국가 종교의 수장인 대신관에 당선되었다. 그 해 키케로가 폭로한 카틸리나의 음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고발을 받았으나, 능숙하게 대처하며 원로원에서 설득력 있는 의견을 제시했다.
기원전 63년, 카이사르는 로마 국가 종교의 수장인 대신관직 선거에 출마하여 강력한 벌족파 경쟁 후보 두 사람을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선거 운동으로 막대한 빚을 졌으나 무난히 당선되었으며, 대신관으로서 신성로에 관저를 얻었다. 그 해 집정관 키케로가 공화국을 장악하려는 카틸리나의 음모를 알렸고, 카툴루스 등은 카이사르가 이 음모와 연관이 있다고 고발했다. 카이사르는 음모자를 사형 대신 종신 징역에 처할 것을 제안했으나, 카토의 연설로 음모자들은 처형되었다.
[법무관 취임 및 보나 데아 스캔들로 이혼]
법무관으로 취임한 해, '보나 데아' 제사에 남성 출입 금기를 어기고 카이사르의 아내 폼페이아를 유혹하려 한 클로디우스의 스캔들이 터졌다. 클로디우스는 석방되었으나, 카이사르는 "내 아내는 어떤 의심도 받아서는 안 된다"며 폼페이아와 이혼했다.
기원전 62년에 카이사르는 법무관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카이사르의 관저에서 열린 '보나 데아' 제사에 남성 출입이 금지되었음에도 젊은 귀족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여자로 변장하고 몰래 입회하려다 잡혔는데, 이는 카이사르의 아내 폼페이아를 유혹하려는 목적이 분명했다. 클로디우스는 신성 모독죄로 기소되었으나, 막대한 뇌물과 협박으로 석방되었다. 카이사르는 클로디우스에게 불리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지만, "내 아내는 어떤 의심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명언을 남기며 폼페이아와 이혼했다.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 총독 부임 및 개선식 포기]
법무관 임기를 마친 뒤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 총독으로 부임했다. 빚 때문에 로마를 떠나기 전 크라수스의 도움을 받았으며, 칼라이키족과 루시타니족을 정복하고 개혁을 실시해 '임페라토르' 칭호를 받았다. 개선식 대신 집정관직 출마를 선택했다.
기원전 61년, 카이사르는 법무관직을 수행한 뒤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기에 로마의 갑부 크라수스의 도움을 받아 빚 일부를 지불하고 보증을 얻어 로마를 떠날 수 있었다. 히스파니아에서 칼라이키족과 루시타니족을 정복하여 군대에게서 '임페라토르'(최고 군사령관)로 환호받았으며, 채무 관련 법을 개혁하고 존경을 받으며 총독직을 마쳤다. '임페라토르' 칭호로 개선식을 할 수 있었으나, 집정관직에 출마하기 위해 개선식을 포기하고 선거를 선택했다.
[제1차 삼두정치 결성]
집정관 선거를 앞두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화해시키고 세 사람이 초법적인 정치 연대를 형성했다. 이것이 바로 로마 정계를 장악한 '제1차 삼두정치'이며,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와 폼페이우스의 결혼으로 더욱 공고해졌다.
기원전 60년, 카이사르는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고자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기원전 70년에 집정관직을 함께 역임한 이래 적대 관계였음을 알고 이들을 화해시켰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세 사람은 충분한 자금과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비공식적인 정치 제휴인 '제1차 삼두정치'를 결성했다. 이 동맹은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와 폼페이우스가 결혼하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첫 집정관 취임 및 개혁 단행]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취임했다. '악타 디우르나' 발행, 공직자 윤리 규정인 '율리우스 레페르토리' 제정, 빈민에게 공유지를 재분배하는 농지법 등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했다. 보수파의 강력한 반대에도 삼두정치의 힘으로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기원전 59년 1월 1일, 카이사르는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당선되어 취임했다. 그는 현대의 신문 격인 '악타 디우르나'를 광장에 붙여 원로원과 민회의 의사록을 민중에게 공개하며 민중파의 입지를 강화했다. 또한 공직자가 1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선물을 받지 못하게 하는 '율리우스 레페르토리'를 제정하여 공직 생활의 정화를 도모했다. 카이사르는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법과 유사하게 빈민에게 공유지를 재분배하는 농지법을 제안했다. 보수파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강력한 지지와 군사력을 동원하여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비불루스는 법안을 무효화하려 했으나 카이사르의 지지자들에게 쫓겨나 집에 틀어박혔고, 로마 풍자가들은 그 해를 "율리우스와 카이사르가 집정관이었던 해"라고 불렀다. 카이사르는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의 딸 칼푸르니아와 재혼했다.
[갈리아 총독 부임 및 갈리아 전쟁 시작 (1년차)]
집정관 임기 후 갈리아 키살피나, 일리리쿰, 갈리아 트란살피나의 총독으로 5년간 부임했다. 빚을 갚고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군사 원정을 계획, 헬베티족과 게르만족의 아리오비스투스를 격파하며 갈리아 전쟁을 시작했다.
기원전 58년, 카이사르는 집정관 임기를 마치고 갈리아 키살피나(이탈리아 북부), 일리리쿰(발칸 반도 서부), 갈리아 트란살피나 총독으로 5년 임기를 부여받았다. 그는 빚을 갚고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갈리아 원정을 계획했다. 당시 로마의 동맹인 하이두이족이 게르만족 수에비족의 도움을 받은 다른 갈리아 부족에게 패하고, 헬베티족이 대규모로 이주하며 로마를 위협하자, 카이사르는 두 군단을 추가 편성했다. 헬베티족을 손 강에서 기습 공격하고 비브락테 전투에서 격파했으며, 갈리아인들의 요청으로 게르만족 수령 아리오비스투스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결렬, 전투 끝에 게르만족을 크게 물리쳤다. 이로써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벨가이족 격파 및 갈리아 평정 (2년차)]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2개 군단을 추가 편성하여 군사력을 증강했다. 갈리아 북동부 벨가이 부족들의 무장에 대응하여 공격적인 작전을 펼쳐, 벨가이 동맹군을 격파하고 네르비족, 아투아투키족 등 각 부족을 하나씩 정복했다.
기원전 57년, 카이사르는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2개 군단을 추가 편성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갈리아 북동부의 벨가이 부족들이 무장하자, 이를 공격적인 행동으로 간주하고 작전을 개시했다. 레미족과의 동맹을 맺고 벨가이 동맹군 29만 명과 맞서 싸웠다. 비브락스 도시 공격을 저지한 뒤, 벨가이 동맹군이 로마군 진지를 공격하려 강을 건너는 순간 로마군이 반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각 부족으로 패주하는 벨가이인들을 기병대로 추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수에시오네스족을 격퇴하고 벨로바키족, 암바니아족과 강화를 맺었다. 이어 가장 강한 네르비족과의 전투에서 기습 공격을 받았으나, 치열한 접전 끝에 네르비족을 궤멸시켰다. 아투아투키족의 수도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으나, 이들이 반란을 시도하자 5만 명의 주민들을 노예로 팔아넘겼다. 로마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공적에 유례없는 15일 감사제를 올렸다.
[루카 회담과 삼두정치 갱신 (3년차)]
갈리아 키살피나의 루카에서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만나 '삼두정치'를 갱신했다. 이 회담으로 카이사르의 총독 임기가 5년 연장되었고,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도 장기 총독직을 맡기로 합의하며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다.
기원전 56년 봄, 삼두 정치 인사들은 갈리아 키살피나의 루카에서 회합을 가졌다. 당시 로마는 클로디우스의 민중 선동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고,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 사이도 나빠진 상황이었다. 이 회의에서 삼두정치를 갱신하고, 카이사르의 총독 임기를 5년 더 늘리기로 결정했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도 다시 집정관에 오른 뒤 각각 시리아와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 임기를 5년으로 하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아르모리카 정복은 데키무스 브루투스의 베네티족 해전 승리로 완수되었고, 젊은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아퀴타니족을 정복했다. 해안 저지의 모리니족과 메나피이족만 저항하는 상황이었다.
[게르만족 격파 및 제1차 브리타니아 원정 (4년차)]
갈리아를 침략한 게르만족 우시페테스족과 텡크테리족을 교섭 없이 기습 공격하여 43만 명의 병력을 대부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로마인 최초로 브리타니아 침공을 감행했으나, 기병대 부족과 배 파손으로 큰 성과 없이 회군했다. 이 해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가 사망했다.
기원전 55년,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침략한 게르만족 우시페테스족과 텡크테리족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기습 공격을 단행했다. 이들 두 부족의 43만 명 병력은 대부분 죽거나 게르마니아로 달아났다. 카이사르는 라인강에 가교를 건설하고 게르마니아 영토에 진입하여 무력 시위를 한 뒤 돌아왔다. 이 전투를 두고 카토는 카이사르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그를 게르만족에게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해 늦여름, 모리니족과 메나피이족을 정복한 뒤, 로마인 최초로 브리타니아 섬 침공을 감행했다. 켄트에 상륙 거점을 확보하고 브리타니아인을 격파했으나, 기병대가 도착하지 못하고 배가 파손되어 더 진격하지 못하고 갈리아로 회군했다. 브리타니아인들에게 인질 제공을 요구하며 명분을 지켰다. 이 해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가 사망했다.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 암비오릭스의 반란, 딸 율리아 사망 (5년차)]
더 많은 병력으로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을 떠나 카시벨라우누스를 격파하고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갈리아에서 에부로네스족 암비오릭스가 이끄는 대규모 반란이 발생, 로마군 9천 명이 전멸하는 위기를 겪었으나 카이사르가 직접 진압에 나서 반란군을 격파했다. 이 해 딸 율리아가 출산 중 사망하면서 폼페이우스와의 정치적 유대가 약화되었다.
기원전 54년, 카이사르는 더 철저히 준비하고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을 떠났다. 내륙으로 진격하여 트리노반테스족과 동맹을 맺고 브리타니아 연합군 총사령관 카시벨라우누스와 전투를 벌였다. 카시벨라우누스는 게릴라전을 펼쳤으나 로마군을 격퇴하지 못했고, 결국 본거지에서 패하여 카이사르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갈리아에서 에부로네스족 암비오릭스가 이끄는 대규모 반란이 발생하여 로마군 9천 명이 전멸하는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카이사르는 급조한 7천 명의 군대로 키케로의 진영을 구원하고 반란군을 유인, 격파했다. 라비에누스는 트레베리족의 인두티오마루스를 격파하고 죽이는 데 성공했다. 카이사르는 암비오릭스의 기반을 무너뜨리며 갈리아를 평정했다고 생각했으며, 반란 음모를 꾸민 카르누테스족장 아코를 사형시켰다. 한편, 이 해 폼페이우스의 아내이자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면서 폼페이우스와의 정치적 유대가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갈리아 북동부 부족 평정 (6년차)]
암비오릭스 반란 이후, 카이사르는 갈리아 북동부 지역의 모든 부족을 평정하며 갈리아 통제력을 더욱 강화했다. 이로써 갈리아는 사실상 로마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해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침공 중 전사하여 삼두정치가 사실상 결렬되었다.
기원전 53년, 암비오릭스의 반란 진압 이후 카이사르는 갈리아 북동부의 모든 부족을 평정하며 갈리아에 대한 로마의 통제력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침공 중 카라이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삼두 정치의 한 축이 무너졌다. 폼페이우스는 1인 집정관에 임명되고 카이사르의 정적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과 결혼하며 카이사르와 대치하는 구도가 형성되어, 삼두정치는 결렬되었다.
[갈리아 대반란과 알레시아 전투 대승 (7년차)]
카르누테스족의 학살을 도화선으로 아르베르니족 베르킨게토릭스가 갈리아 대반란을 일으켜 갈리아 부족들을 통합했다. 카이사르는 게르고비아 공략에는 실패했으나, 알레시아에서 역사적인 이중 포위망 작전을 성공시키며 베르킨게토릭스를 격파하고 갈리아를 완전히 정복했다.
기원전 52년, 카르누테스족이 로마 민간인을 학살하면서 아르베르니족의 베르킨게토릭스가 갈리아 대반란을 일으켜 갈리아 부족들을 통합했다. 카이사르는 북이탈리아에서 중부 갈리아로 이동하여 아바리쿰을 점령했으나, 아르베르니족의 수도 게르고비아 공략에는 실패하고 로마군 700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후 전투에서 패한 베르킨게토릭스는 만두비족의 도시 알레시아로 들어갔고, 카이사르는 즉시 알레시아를 포위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 전역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26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 알레시아를 포위한 카이사르의 군대를 다시 포위하는 유례없는 이중 포위전이 벌어졌다. 기원전 52년 9월 20일 시작된 알레시아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공성 작전을 성공시켜 양쪽의 갈리아군을 완전히 차단했다. 게르만 기병의 활약과 로마군의 뛰어난 대처로 갈리아 기병과 공성기 공격을 막아냈다. 베르카시벨라우누스가 이끄는 6만 명의 갈리아 정예병이 로마군 북쪽 포위망을 공격했지만,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를 보내 막고 직접 전장에 나서 이들을 격파했다. 6만 명의 정예병이 궤멸되자 베르킨게토릭스는 항복하며 갈리아는 완전히 정복되었다.
[갈리아 평정 완료 및 로마화 착수]
알레시아 전투 승리 후 산발적인 교전이 있었으나, 갈리아는 사실상 정복되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 지역을 "갈리아 코마타"라는 하나의 속주로 두며 '갈리아의 로마화'에 착수, 서유럽에 로마 문화를 전파하는 데 막강한 영향을 주었다.
기원전 51년, 알레시아 공방전 이후 산발적인 교전이 있었지만 갈리아는 사실상 정복되었다. 카이사르는 정복한 갈리아 전 지역을 "갈리아 코마타"라는 하나의 속주로 두었다. 갈리아는 빠르게 속주화되어 로마의 문명을 받아들였고, 이는 서유럽에 로마 문화를 전파하는 데 막강한 영향을 미쳤다. 갈리아는 카이사르의 강력한 세력 기반이 되어 그가 이후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일조했다.
[북이탈리아 속주 귀환 및 원로원과의 대립]
북이탈리아 속주로 귀환했으나, 폼페이우스가 주도하는 원로원에서는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귀환하도록 명령하며 집정관 선거 부재중 입후보를 금지했다. 이는 카이사르의 정계 은퇴를 강요하는 행위였다.
기원전 50년, 카이사르는 북이탈리아 속주로 귀환했다. 당시 폼페이우스가 주도하는 원로원에서는 카이사르에게 전임 집정관 임기가 만료되었으므로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귀환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두 번째로 출마하려는 집정관 선거에 부재중 입후보를 금지했다. 카이사르는 면책권이나 군사력 없이 로마에 들어가면 기소되어 정계에서 밀려날 것이라고 판단했다.
[루비콘강 도하, 내전 발발 ("주사위는 던져졌다!")]
폼페이우스의 원로원 최종 권고 발동으로 카이사르가 불복종과 대역죄 혐의를 받자, 그는 1개 군단만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며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명언을 남기고 내전을 시작했다. 이후 이탈리아를 무혈제패하고 히스파니아에서 승리를 거두며 독재관에 취임했다.
기원전 49년 1월 7일, 집정관 가이우스 마르켈루스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시켰고,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불복종과 대역죄 혐의로 고발했다. 이에 기원전 49년 1월 12일, 카이사르는 단 1개 군단(게미나 제13군단)만 이끌고 이탈리아 북방 경계선인 루비콘강을 건너며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그는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는 명언을 남겼다. 그는 루비콘강을 건넌 후 아리미눔에 입성하고, 부하들을 보내 아펜니노 산맥과 아드리아 해 연안의 주요 도시들을 공격하게 했다. 폼페이우스는 수도 로마를 버리고 남하했으며,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강화 제안을 거절하고 추격했다. 결국 폼페이우스는 브린디시움에서 그리스로 철수했고,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를 무혈제패했다. 이후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로 진로를 돌려 폼페이우스군과 싸웠다. 세그레 강 홍수로 고립되는 위기도 겪었으나 운하를 파서 벗어났고, 폼페이우스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며 식량 부족에 빠뜨렸다. 결국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군은 항복했으며, 카이사르는 이들을 석방했다. 히스파니아 전쟁이 끝난 후, 법무관 레피두스를 시켜 독재관에 취임하여 술라의 살생부에 올랐던 자들의 추방형을 폐지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48년 집정관에도 선출되었다.
[파르살루스 전투 대승 및 이집트 개입]
폼페이우스와의 최종 결전인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압도적인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기습적인 전술로 폼페이우스군을 궤멸시키는 완벽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이집트로 도주한 폼페이우스를 추격,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 간의 왕위 다툼에 개입하여 클레오파트라를 지지하며 이집트를 장악했다.
기원전 48년 1월 4일, 카이사르는 그리스에 있는 폼페이우스를 상대하기 위해 병력을 둘로 나누어 아드리아 해를 건넜다. 제1진은 폼페이우스 해군의 방해를 피해 그리스에 상륙했고, 오리쿰과 아폴로니아를 점령했다. 폼페이우스의 지상군과 압수스 강에서 대치했으나 수적 열세로 전투를 피했고, 강화를 제안했으나 실패했다.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제2진도 리보의 군대를 격파하고 3월 26일 그리스에 상륙, 4월 3일에 제1진과 합류했다. 카이사르는 디라키움과 페트라를 포위했으나 폼페이우스군의 공격으로 제9군단이 격파되는 등 위기를 겪고 퇴각했다. 이후 테살리아로 이동하여 도미티우스와 합류하고 곤피스와 메트로폴리스를 점령했다. 폼페이우스는 스키피오와 합류했으나, 그의 진영은 승리에 도취되어 내부 갈등이 심화되었다.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카이사르군 2만 2천 명과 폼페이우스군 4만 7천 명의 최종 결전인 파르살루스 전투가 벌어졌다. 폼페이우스의 기병 포위섬멸 작전을 간파한 카이사르는 고참 군단병 2천 명으로 제4열 별동대를 편성하여 기병대를 격파하고 폼페이우스군을 궤멸시켰다. 카이사르군의 손실은 200명에 불과했으며, 폼페이우스군의 전사자는 최대 1만 5천 명, 포로는 2만 4천 명에 달하는 압승이었다. 전투 후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했으나, 폼페이우스는 이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명령을 받은 전직 로마군 장교에게 살해당한 뒤였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보고 울었으며,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사이의 권력 투쟁에 개입하여 클레오파트라 편에 서서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벌였다. 이집트 실권자 포티누스를 처형하고, 나일 강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군대를 무찌르고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지배자로 삼았다.
[젤라 전투 대승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이집트에서 중동 지역으로 이동하여 폰토스 왕 파르나케스 2세를 젤라 전투에서 순식간에 절멸시켰다. 너무나 빠른 승리에 카이사르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이 해 1년 임기의 독재관에 임명되었다.
기원전 47년 초, 이집트에서 지낸 카이사르는 중동 지역으로 가서 젤라 전투에서 폰토스 왕 파르나케스 2세를 절멸시켰다. 그는 이 승리를 기념하여 원로원에 보낸 서한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전에 기원전 48년 말에 독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임기는 1년이었다.
[탑수스 전투 대승 및 대규모 개혁 착수]
아프리카에서 폼페이우스 잔당을 격파하기 위해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소 카토의 군대를 탑수스 전투에서 대파하고, 로마로 돌아와 네 차례의 성대한 개선식을 거행했다. 10년 임기 독재관에 취임하며 율리우스력 채택, 국립 조폐소 창설 등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는 아프리카에 남아있는 폼페이우스의 원로원파 잔당을 처리하고자 했다. 루스피나 전투에서 라비에누스가 지휘하는 누미디아군의 맹공에 위기를 겪었으나 결국 승리하고, 마우레타니아와 연합하여 누미디아 본국을 공격하게 했다. 탑수스 전투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소 카토의 군대를 상대하여 스키피오군을 대파했다. 유바왕은 도주 후 동반자살했고, 스키피오는 자살, 카토는 자결했다. 탑수스 전투에서 이긴 뒤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크게 네 차례의 개선식을 치르고 10년 임기의 독재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2년 동안 각종 개혁을 실시했다. 대신관으로서 율리우스력(태양력)을 채택하여 1년을 365일, 4년마다 윤년을 두도록 정비했다. 또한 「카이사르의 포룸」 건설을 시작하고 로마 최초의 국립도서관과 바실리카 율리아를 지었다. 교사와 의사에게 시민권을 지급하고, 카르타고와 코린토스를 재건했으며, 이자율 제한, 물가 안정 등 금융 개혁을 단행했다. 원로원 정원을 900명으로 늘리고 원로원 최종권고를 폐지하며 사법 개혁을 실시, 교통 규제, 갈리아 키살피나 주민에게 시민권 지급, 치안대 창설 등 광범위한 정책을 펼쳤다.
[문다 전투 승리로 내전 종결]
폼페이우스의 아들들이 히스파니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직접 출정하여 3월 문다 전투에서 마지막 저항 세력을 격파했다. 이로써 폼페이우스의 아들 그나이우스와 라비에누스가 전사하며 오랜 내전을 완전히 종결시켰다.
기원전 45년, 폼페이우스의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카이사르는 직접 히스파니아로 출정했다. 3월 문다 전투에서 마지막 저항 세력을 격파했다. 라비에누스가 카이사르군을 유인하기 위해 기병을 이끌고 뒤로 물러난 것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기병대가 붕괴된 것으로 오인하여 군대를 퇴각시킨 것이 패인이었다. 라비에누스는 전사했고,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도 도주하다 카이사르군에 잡혀 죽었다. 이로써 오랜 내전이 완전히 종결되었다.
[종신 독재관 취임 및 암살]
원로원과 민회로부터 '종신 독재관'에 임명되며 로마 공화정의 종말과 제정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한 달 뒤, 3월 15일 폼페이우스 극장에서 브루투스를 비롯한 원로원 의원들에게 23번 칼에 찔려 암살당했다.
기원전 44년 2월 15일, 카이사르는 원로원과 민회로부터 '종신 독재관'에 임명되었고 성대한 취임식을 거행했다. 이는 로마 공화정이 붕괴하고 사실상 제정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한 달 뒤, 기원전 44년 3월 15일(Idus Martias),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폼페이우스 극장을 지날 때 브루투스를 비롯한 일군의 원로원 의원들에게 둘러싸여 암살당했다. 루키우스 틸리우스 킴베르가 청원을 하는 척하며 카이사르의 투니카를 잡아당겼고, 카스카가 단검으로 그의 목을 찔렀다. 카이사르는 "카스카, 이 천한 자야, 무슨 짓이냐?"라고 외쳤고, 이내 23번 칼에 찔려 쓰러졌다. 그의 마지막 말은 불확실하지만,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는 "브루투스, 너마저?"로 알려져 있다. 의사의 부검 결과 두 번째로 찔린 상처가 치명적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