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심덕
연표
1897
[평양 출생 및 유년기]
평양에서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진남포로 이주하여 자랐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부모님의 영향으로 일찍이 신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윤심덕은 1897년 7월 25일 평안도 평양에서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남포로 이주하여 자랐다. 아버지 윤호병과 어머니 김씨는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그 덕에 신학문을 접할 수 있었고 학교에 다닐 수가 있었다. 숭의여학교와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15
[도쿄 음악학교 진학]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뒤,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쿄 음악학교에 진학했다. 그녀는 도쿄 음악학교 최초의 조선인 학생이 되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후, 원주로 교사 발령을 받았으나 다음 해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쿄로 건너갔다. 아오야마가쿠인을 거쳐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했으며, 이 학교 최초의 조선인 학생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유학 시절 활달한 성격과 키가 크고 목이 긴 서구형 외모로 자신감이 넘쳤다고 전해진다.
1921
[동우회 순회공연과 김우진과의 만남]
도쿄 유학생들로 구성된 동우회 순회공연에 참가하여 연극 막간에 독창을 선보였다. 이 시기에 극작가 김우진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유학생 시절인 1921년, '동경 유학생'들로 이루어진 동우회의 조선순회공연에 참가하여 연극 공연의 막간에 독창을 하였다. 홍난파의 추천으로 동우회에 합류했으며, 이 시기에 극작가 김우진이 동우회 순회연극단의 총연출을 맡아 윤심덕과 교류하게 되었다.
1924
[귀국 후 한국 최초 소프라노 활동과 경제난]
도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로 활동했으나, 성악 공연만으로는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어려워 동생들의 학비와 부모님 생활비를 감당하기 버거웠다.
1924년에 도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로서 전성기를 맞았으나, 당시 1920년대에는 성악 공연으로 교통비 정도의 보수밖에 받을 수 없어 극심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부모님의 생활비와 두 동생의 유학비를 홀로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시기 김홍기와의 결혼설 파기, 이용문과의 스캔들 등 개인사적 문제도 겪었다.
1925
[대중가수 전향과 레코드 계약]
여동생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중가수로 전향, 일본 오사카의 닛토 레코드 회사와 계약을 맺고 음반 취입을 준비했다.
여동생의 학비 마련을 위해 1925년 레코드 취입을 결정하고 일본 오사카에 있는 닛토(日東) 레코드 회사와 계약을 했다. 이는 그녀가 생계를 위해 대중가수로서 활동하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926
[<사의 찬미> 녹음]
닛토 레코드에서 한국 대중가요의 상징이 된 <사의 찬미>를 포함해 총 25곡을 녹음했다. 이 곡은 그녀의 비극적인 삶과 맞물려 큰 인기를 얻게 된다.
1926년 닛토 레코드 회사에서 <사의 찬미>를 포함한 24곡을 녹음했다. 이 곡은 루마니아 작곡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도나우 강의 잔물결>에 윤심덕이 직접 가사를 붙여 부른 것으로, 이후 한국 대중가요사에 길이 남을 명곡이 되었다.
[<사의 찬미> 신드롬과 실종 미스터리]
실종 사건 보도 이후 그녀의 노래 <사의 찬미>가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하며 대중적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러나 목격자나 유서가 없어 다양한 죽음의 의혹과 생존설까지 제기되며 미스터리로 남았다.
실종 사건 직후,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더해져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높은 판매고를 올리고 사회적 신드롬을 만들었다. 신문들은 앞다투어 '정사(情死)설'을 보도했으나, 두 사람을 본 목격자도, 유서도 전혀 없어 사실 규명이 불가능했다.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동반자살설, 생존설(이탈리아 목격담 등), 실족에 의한 사고설, 일본인에 의한 타살설 등 다양한 추측과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며 오늘날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대한해협 실종 사건]
일본 오사카에서 귀국하던 중 대한해협을 지나는 부관연락선에서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사라지며 당시 조선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1926년 8월 4일, 일본 오사카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던 부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에서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실종되었다. 승객 명부에 김우진의 호인 '김수산'과 윤심덕의 호인 '윤수선'이 없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당시 조선의 신문과 잡지들은 이를 '조선 최초의 정사(情死) 사건'으로 대서특필하며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