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명왕
연표
BC 1C
[유리명왕 탄생]
동명성왕과 예씨 부인의 맏아들로, 동부여에서 태어났습니다.
뜻이 크고 기이한 절개를 지닌 인물로, 어릴 때부터 비범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고구려 왕태자 책봉]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로 와 동명성왕이 남긴 부러진 칼 조각이라는 징표를 찾아내며 친자로 인정받고 왕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비류와 온조는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했습니다.
삼국지 위서 고구려전에는 본래 여달이었으나 고구려에 온 후 여해로 개명했다고 전합니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그를 유류 세자라 하여 주몽왕의 명으로 태자에 책봉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제2대 고구려 국왕 즉위]
석 달간의 대리청정을 지낸 후, 동명성왕의 서거와 함께 고구려의 제2대 국왕으로 즉위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황조가 창작 설화]
계비 치희가 화희와의 다툼 끝에 고향으로 돌아가자, 치희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꾀꼬리가 노니는 모습을 보며 '황조가'를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집니다.
[부여 대소왕 침공 실패]
부여 대소왕이 고구려에 볼모를 요청했으나 태자 도절이 거부하자, 5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했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폭설로 인해 대패하며 퇴각했습니다.
[탁리, 사비 처형 사건]
제사에 쓰일 돼지를 잡다가 다리 힘줄을 끊은 탁리와 사비를 처형하여 왕의 엄격한 통치력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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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수도 물색 시작]
도망친 제사용 돼지를 쫓다가 장생 설지가 위나암이 새로운 수도로 적합하다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유리명왕은 그해 9월 직접 위나암의 지세를 살펴보며 천도를 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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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 천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위나암성을 축조했습니다.
이는 이반한 민심을 수습하고 북부여의 위협에서 벗어나 정권을 강화하려는 중요한 결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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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 해명 자결]
이웃 황룡국왕이 준 활을 부러뜨려 고구려의 위상을 높였으나, 이를 오해한 유리명왕의 명으로 자결했습니다.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무휼, 부여 사신 물리침]
부여 대소왕이 고구려를 속국으로 삼으려 하자, 왕자 무휼이 재치 있는 말로 부여 사신을 돌려보내 고구려의 자주성을 지켜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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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라와 충돌]
신나라 왕망이 흉노 정벌을 위해 고구려군을 징발하려 했으나 거절당하자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이에 고구려는 신나라를 공격하며 국력을 과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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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 확장 및 현도군 탈환]
서쪽의 양맥을 정복하고, 현도군의 고구려현을 빼앗는 등 적극적인 대외 투쟁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세력 기반을 강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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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명왕 서거]
두곡의 별궁에서 서거했으며, 두곡 동원에 안장되었습니다.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하며 고구려의 기틀을 다진 영주로 기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