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마이단
연표
2013
[유로마이단 시위의 시작]
우크라이나 정부가 유럽연합(EU)과의 제휴 협정 서명 준비를 갑자기 중단하자, 이에 반발한 시민들이 수도 키이우에서 대규모 시위를 시작하며 유로마이단 봉기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트위터 해시태그에서 시작된 이 시위는 러시아의 경제적 압박과 국제통화기금(IMF)의 가혹한 대출 조건이 협정 중단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며 점차 확산되었습니다.
[서부 우크라이나 전역으로 시위 확산]
우크라이나 서부의 주요 도시인 리비우, 이바노프란키우스크, 우지호로드 등에서 수만 명의 시민과 대학생들이 유로마이단을 지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전국적인 확산의 조짐을 보였습니다.
리비우에서는 2만 5천 명 이상의 시위대가 참가했으며, 하르키우, 도네츠크 등 동부 도시에서도 크고 작은 유로마이단 지지 집회가 열렸습니다.
[지방 시위대에 대한 경찰 및 깡패 조직의 폭력 행사]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오데사, 체르히니우 등 지방 도시에서 친정부 성향의 깡패 조직과 경찰이 유로마이단 시위대의 캠프를 강제로 철거하고 시위대를 구금하며 폭력적인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가 구타당하고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정부의 강경 진압이 본격화되었으나, 경찰은 공격에 제대로 개입하지 않아 비판을 받았습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 EU 제휴 협정 서명 거부]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EU 정상회담에서 예정되었던 제휴 협정 서명을 거부하고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를 선택하였습니다. 이 결정은 유로마이단 시위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베르쿠트의 시위대 폭력 진압]
새벽녘, 키이우 독립광장에 모여있던 시위대가 베르쿠트 특수 경찰에게 폭력적으로 강제 해산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이 잔혹한 진압은 시위대의 분노를 폭발시켜 유로마이단을 더욱 거대한 저항 운동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시위대는 내무부 장관의 해임을 강력히 요구했으며,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한 자발적인 민간 경찰 조직인 '마이단 자위대'가 결성되기 시작했습니다.
[1989년 이후 유럽 최대 규모 시위 발생]
경찰의 잔혹한 시위대 진압에 대한 항의로 키이우에서 무려 50만 명 이상의 시민이 모여 시위를 벌였으며, 이는 1989년 이후 유럽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민주화 대중 시위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날 시위대는 '인간 사슬'을 만들어 우크라이나와 유럽 연합의 연대를 상징했으며, 유로마이단 시위대는 진압 경찰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이단 자위대'를 본격적으로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키이우 레닌 기념비 붕괴 및 시위 확산]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키이우에서는 시위대가 구 소련 시절의 상징인 레닌 기념비를 철거하는 상징적인 행동을 벌였습니다.이는 탈공산화에 대한 염원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날 레닌 기념비 붕괴는 이후 '레니노파드(레닌의 몰락)'라 불리는 전국적인 레닌 동상 철거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기념비들이 파괴되거나 이전되었습니다.
[정부의 시위대 캠프 강제 진압 시도 실패]
우크라이나 정부가 베르쿠트와 내무군 등 특수부대를 동원해 유로마이단 시위대 캠프를 강제로 진압하려 시도했으나, 시위대의 강력한 저항으로 진압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당시 총리 미콜라 아자로우는 EU 협상을 위한 대규모 대출 및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고 밝혔으나, 러시아는 조건 없는 차관을 제안하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2014
[노동조합 건물 폭탄 테러 및 자위대 조직 활성화]
키이우의 노동조합 건물에 폭탄 테러가 발생하는 등 불안정한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시위대의 자위대 조직이 더욱 체계화되고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이단 자위대'는 키이우 중심부에 본부를 두고 순찰 활동, 신규 회원 모집 등 사실상 민간 경찰 역할을 수행하며 시위대의 안전과 통제에 기여했습니다.
[정부의 강경 반시위법 제정, 시위 격화의 도화선이 되다]
정부가 시위를 사실상 금지하는 '독재법'으로 불리는 강경한 반시위법을 제정하자,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격렬한 소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새 법은 얼굴을 가리거나 무기를 휴대하는 행위를 금지했지만, 시위대는 이를 무시하고 저항을 이어갔습니다.
[흐루셰우스키가 충돌 발생]
키이우 중심부에서 최대 20만 명의 시위대가 반시위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의회 청사로 향하던 시위대와 진압 경찰 간에 '흐루셰우스키가'에서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이 폭력적인 대치는 3일간 계속되었고, 경찰의 총격으로 시위대 3명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지역 행정청사 점령 시작]
우크라이나 서부의 여러 주 정부 건물과 지역 행정 청사들이 유로마이단 시위대에 의해 점령되기 시작했습니다.이는 시민 저항이 지방 권력으로까지 확산되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점령된 지역에서는 친정부 성향의 '지역당'과 '공산당'의 활동 및 상징이 금지되는 등 정치적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동부 및 남부 도시에서도 유사한 점령 시도가 이어졌습니다.
[유로마이단 봉기 절정: 대규모 유혈 사태 발생]
2월 18일부터 20일까지 키이우 마이단 광장에서 시위대와 경찰 간의 유례없는 격렬한 전투가 발생하여, 시위대 100여 명과 경찰 13명이 사망하는 대규모 유혈 사태가 벌어졌습니다.이는 우크라이나 독립 이래 *가장 심각한 폭력 사태*였습니다.
방패와 헬멧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의회로 진격하려 했고, 경찰 저격수들이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하는 등 잔혹한 충돌이 이어지며 ‘존엄의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정권 교체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야당, 위기 해결 합의서 서명]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야당 지도자들이 EU 및 러시아 대표단의 중재 하에 정치 위기 해결을 위한 합의안에 서명했습니다.이 합의는 임시 거국내각 수립, 개헌, 조기 선거 등을 약속했습니다.
합의안 서명 직후 경찰은 키이우 중심부에서 철수했으며,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일부 장관들은 당일 밤 키이우를 떠났습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 탄핵 및 망명 시작]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키이우를 떠난 후, 우크라이나 의회는 그에 대한 탄핵안을 전격 가결하고 임시 내각을 수립했습니다.이로써 유로마이단 봉기는 사실상 성공하며 정권 교체를 이뤄냈습니다.
야누코비치는 의회의 탄핵 결정을 인정하지 않고 하르키우를 거쳐 러시아로 망명했으며, 2019년에는 우크라이나 법원에서 이적죄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의회는 조기 대선을 실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크림 의회 점령 및 러시아 국기 게양]
정체불명의 무장 괴한들이 크림 의회를 점령하고 러시아 국기를 게양했습니다.이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크림 의회는 키이우 사태를 빌미로 러시아로의 합류 준비를 발표했으며,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이날을 자국 특수부대를 위한 특별한 날로 선포하며 개입을 공식화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