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전쟁
연표
1517
[종교 개혁의 불꽃]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며 부패한 교회를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이 움직임은 프랑스까지 번져나갔고 존 칼뱅의 교리가 지식인과 귀족층 사이에 빠르게 확산됩니다.
이 사건은 유럽 전체를 종교적 혼란으로 몰아넣은 출발점이었습니다.
프랑스 내에서도 교회의 권위보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중시하는 위그노 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초기에는 관용적이었으나, 점차 개신교 세력을 국가의 위협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1534
[벽보 사건의 발생]
국왕의 침실 문까지 가톨릭 미사를 비판하는 벽보가 붙자 프랑수아 1세가 분노합니다. 이 사건으로 온건했던 국왕의 태도가 돌변하여 개신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됩니다.
개신교도들이 파리 시내 곳곳과 심지어 왕궁 내부에 미사를 우상 숭배로 규정하는 벽보를 부착한 사건입니다.
왕권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간주한 프랑수아 1세는 주동자들을 화형에 처하고 출판물을 엄격히 통제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개신교도들이 외국으로 망명하게 되었으며, 그중에는 훗날의 지도자 존 칼뱅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545
[메랭돌의 비극]
국왕의 명령에 따라 메랭돌 지역의 개신교 마을들이 군대에 의해 처참하게 파괴됩니다. 이 학살로 수천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으며 종교 갈등이 무력 충돌로 비화될 조짐을 보입니다.
프로방스 지역의 루베롱에서 거주하던 바우도파(개신교의 일파) 교도들이 대량으로 학살된 사건입니다.
약 3,000명의 주민이 살해되고 마을은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잔혹한 행위는 유럽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프랑스 내 종교 갈등의 골을 깊게 만들었습니다.
1551
[샤토브리앙 칙령]
앙리 2세가 개신교 탄압을 법제화하여 종교적 일관성을 유지하려 시도합니다. 개신교 서적의 소지를 엄금하고 밀고자를 포상하며 탄압의 강도를 높입니다.
개신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법정에서 가혹하게 처벌할 수 있도록 근거를 마련한 칙령입니다.
지방 관리들에게 정기적으로 개신교도들을 색출하도록 명령하고 이단자들의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는 귀족층을 중심으로 더욱 조직화되었습니다.
1559
[안 뒤 부르의 체포]
파리 고등법원에서 국왕 앞에서 담대하게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던 안 뒤 부르가 체포됩니다. 그의 체포는 사법부 내에서도 종교적 동정심이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국왕 앙리 2세가 법관들의 종교적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해 법원에 출두했을 때 발생한 일입니다.
부르는 국왕 앞에서 당당하게 개신교도에 대한 박해를 중단해야 한다고 연설했습니다.
그는 결국 이단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으며, 위그노들에게는 신념을 위해 죽은 순교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앙리 2세의 비극적 서거]
마상 창시합 도중 불의의 사고를 당한 앙리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강력한 군주가 사라지자 어린 아들들이 왕위에 오르며 프랑스 정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집니다.
가톨릭 진영의 수장이었던 왕의 죽음은 권력의 공백을 불러왔습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 왕비가 섭정으로 등장했으나 귀족 가문들의 권력 투쟁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후 가톨릭의 기즈 가문과 개신교의 부르봉 가문이 왕실을 조종하기 위해 정면으로 충돌하기 시작합니다.
1560
[앙부아즈 음모 사건]
개신교 귀족들이 기즈 가문의 전횡을 막기 위해 국왕 프랑수아 2세를 납치하려던 계획이 발각됩니다. 이 실패로 수많은 가담자가 처형되며 두 진영의 증오심은 극에 달합니다.
위그노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기즈 형제를 제거하고 국왕을 탈취하여 정책을 바꾸려 했던 사건입니다.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성 안팎에서 대대적인 학살과 공개 처형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가톨릭 세력은 위그노들을 단순한 이단자가 아닌 반역자로 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1561
[푸아시 회담의 결렬]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내전을 막기 위해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자들을 소집합니다. 하지만 성찬식에 대한 신학적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타협은 실패로 끝납니다.
국가의 분열을 막기 위한 왕실의 마지막 평화적 시도 중 하나였습니다.
개신교 측에서는 베자(Théodore de Bèze)가 참석하여 논리적인 변론을 펼쳤으나 가톨릭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말을 통한 해결이 불가능해지자 양측은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1562
[1월 칙령의 선포]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위그노들에게 성 밖에서의 제한적인 예배를 허용하는 획기적인 칙령을 내립니다. 이는 가톨릭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타 종교의 존재를 공식 인정한 조치였습니다.
위그노들을 국가 체제 내로 끌어들이기 위한 유화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가톨릭 강경파인 기즈 공작 세력은 이 칙령을 교회의 권위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이 관용의 칙령은 평화가 아닌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도화선이 되고 맙니다.
[바시 학살의 참변]
예배 중이던 위그노들을 기즈 공작의 군대가 습격하여 무차별 학살을 자행합니다. 이 사건으로 1월 칙령은 휴지조각이 되었고 30년간 이어질 위그노 전쟁의 첫 총성이 울립니다.
기즈 공작 프랑수아가 이끄는 군대가 바시 마을의 헛간에서 예배를 보던 개신교도 74명을 살해하고 100여 명을 부상시켰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파리에서는 기즈 공작을 영웅으로 추대했으나 위그노들은 분노하며 무장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콩데 친왕을 수장으로 한 위그노 군대가 오를레앙을 점령하며 제1차 전쟁이 본격화됩니다.
[드뢰 전투의 격돌]
제1차 전쟁의 최대 규모 전투가 드뢰 평원에서 벌어집니다. 양측 지도자들이 생포되는 혼전 끝에 왕실 군대가 승리를 거두지만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습니다.
위그노의 수장 콩데 친왕과 가톨릭의 안 드 몽모랑시 원수가 서로 상대방에게 사로잡히는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기즈 공작의 활약으로 가톨릭 진영이 승리했으나 프랑스 귀족 사회 전체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 전투는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서막이었습니다.
1563
[기즈 공작 프랑수아 암살]
오를레앙을 포위 중이던 가톨릭의 영웅 기즈 공작이 위그노 청년의 총격에 목숨을 잃습니다. 이 사건으로 가톨릭 진영은 강력한 구심점을 잃고 일시적인 휴전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암살자 폴트로 드 메레는 위그노의 지도자 콜리니 제독의 사주를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암살은 기즈 가문과 콜리니 가문 사이의 대를 이은 원한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양측이 지도자를 잃거나 포로가 된 상황에서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다시 중재에 나섭니다.
[앙부아즈 칙령과 첫 평화]
위그노들에게 일정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는 화의안이 체결되며 제1차 전쟁이 종결됩니다. 하지만 이는 진정한 평화가 아닌, 양측이 힘을 비축하기 위한 불안한 휴전이었습니다.
귀족들에게는 자신의 영지 내에서 예배의 자유를 주었으나 평민들에게는 제한된 구역에서만 예배를 허용했습니다.
위그노들은 이 칙령이 자신들의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가톨릭 강경파 역시 개신교도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 조치를 강력히 반대하며 불만을 품었습니다.
1567
[모 기습 사건]
위그노들이 국왕 샤를 9세를 납치하여 왕실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국왕은 이 사건 이후 위그노들에 대해 강한 적대감과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위그노 군대가 모(Meaux)에 머물던 왕실 일행을 기습하여 가둘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로 끝났습니다.
국왕과 왕대비는 파리로 간신히 탈출했으며, 이는 위그노들이 결코 믿을 수 없는 존재임을 왕실에 각인시켰습니다.
이 배신감은 훗날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로 이어지는 정서적 배경이 됩니다.
[생드니 전투와 희생]
파리 외곽 생드니에서 왕실 군대와 위그노 군대가 격돌하여 제2차 전쟁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합니다. 가톨릭 측 사령관 몽모랑시 원수가 전사하며 왕실에 큰 타격을 줍니다.
압도적인 숫자의 왕실 군대를 상대로 위그노 군대는 매우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전투 결과는 왕실의 승리였으나, 건국 공신이었던 몽모랑시 원수의 죽음으로 승리의 빛이 바랬습니다.
전쟁은 소강상태에 빠졌고 양측은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됩니다.
1568
[롱쥐모 화의 체결]
이전의 앙부아즈 칙령 내용을 복구하며 제2차 전쟁을 끝내기로 합의합니다. 하지만 국왕의 신뢰는 이미 무너졌으며 탄압의 기회만을 엿보는 긴장 상황이 지속됩니다.
재정적 압박 때문에 왕실이 어쩔 수 없이 맺은 평화 조약이었습니다.
위그노 군대는 해산되었으나 가톨릭의 박해는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사적인 폭력이 늘어났습니다.
불과 몇 달 뒤, 국왕은 위그노 예배를 전면 금지하는 새로운 칙령을 내리며 제3차 전쟁을 촉발합니다.
1569
[자르나크 전투의 참패]
제3차 전쟁의 격전지 자르나크에서 위그노 군대가 국왕군에 대패합니다. 위그노의 정신적 수장이었던 콩데 친왕이 전장에서 생포된 후 처형되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국왕군의 지휘관 안주 공작(훗날 앙리 3세)이 큰 전공을 세운 전투입니다.
지도자를 잃은 위그노 세력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으나 콜리니 제독이 잔여 군력을 재정비했습니다.
이 승리로 가톨릭 진영은 사기가 충천했으나 위그노들은 더욱 처절한 저항을 이어갔습니다.
[몽콩투르 전투의 대결]
위그노 군대가 다시 한번 안주 공작이 이끄는 국왕군에게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습니다. 하지만 콜리니 제독은 기적적으로 군을 수습하여 남부로 퇴각하며 항전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전통적인 기사도적 전투에서 보병과 포병을 앞세운 근대적 전술이 돋보인 전투였습니다.
위그노는 수많은 귀족 전사자를 냈으나 콜리니의 뛰어난 후퇴 작전 덕분에 전멸은 면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프랑스의 국고는 바닥을 드러냈고, 국왕 샤를 9세는 다시 평화 조건을 제시합니다.
1570
[생제르맹 앙 레 화의]
위그노들에게 네 곳의 안전한 도시를 보장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제3차 전쟁이 끝납니다. 콜리니 제독이 왕궁으로 복귀하여 국왕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자 가톨릭 세력은 큰 위협을 느낍니다.
라 로셸 등 전략적 요충지를 위그노에게 넘겨준 이 조약은 가톨릭 강경파를 격분시켰습니다.
국왕 샤를 9세는 콜리니를 '아버지'라 부르며 의지했고, 이는 섭정 왕대비 카트린의 질투와 불안을 자극했습니다.
이 불길한 균형은 훗날 프랑스 역사상 가장 끔찍한 대학살의 전조가 되었습니다.
1572
[세기의 정략결혼]
개신교 지도자 앙리 드 부르봉과 가톨릭 공주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결혼식이 파리에서 열립니다. 종교 화합을 위한 축제였으나 파리 시민들은 수천 명의 위그노 귀족들이 입성하자 살의를 품습니다.
화해를 상징하는 결혼식이었으나, 교황은 이교도와의 결혼을 끝내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축제 분위기 속에서도 가톨릭 시민들은 무장한 위그노 귀족들의 행차를 보며 증오를 불태웠습니다.
이 결혼식은 피의 학살을 위한 완벽한 덫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새벽 종소리와 함께 파리 전역에서 위그노들에 대한 무차별 대학살이 자행됩니다. 콜리니 제독을 비롯한 수천 명의 위그노가 살해되며 종교 화합의 꿈은 피바다 속에 침몰합니다.
왕실의 묵인 하에 기즈 공작 세력과 파리 시민들이 합세하여 일어난 전대미문의 학살입니다.
파리의 거리는 시체로 뒤덮였고 학살은 프랑스 전역으로 번져 약 1만 명에서 3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앙리 드 부르봉(훗날 앙리 4세)은 가톨릭으로의 강제 개종을 조건으로 겨우 목숨을 구했습니다.
1573
[불로뉴 칙령의 선포]
학살 이후에도 굴복하지 않은 라 로셸의 저항 끝에 제4차 전쟁이 마무리됩니다. 위그노들의 자유는 극도로 제한되었으나 그들은 생존을 위해 조직력을 더욱 강화합니다.
학살로 큰 타격을 입은 위그노 세력은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정치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안주 공작이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어 떠나야 했기 때문에 왕실은 전쟁을 서둘러 끝내야 했습니다.
이 시기 위그노들은 더 이상 왕권에 순종하지 않는 공화국 형태의 조직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1574
[앙리 3세의 즉위]
샤를 9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폴란드 국왕이었던 안주 공작이 돌아와 앙리 3세로 즉위합니다. 그는 위그노와 가톨릭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왕권을 수호하려 분투합니다.
앙리 3세는 매우 지적이었으나 변덕스러운 성격으로 귀족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의 동생 프랑수아 에르퀼이 위그노들과 손을 잡으며 왕실 내부분열까지 가속화되었습니다.
국가는 파산 직전에 몰렸고, 왕은 반대 세력들을 달래기 위해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맺게 됩니다.
1576
[보리외 칙령의 관용]
위그노들에게 전례 없는 폭넓은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이 내려지며 제5차 전쟁이 끝납니다. 이 파격적인 대우에 격분한 가톨릭 강경파들은 국왕을 불신하며 독자적인 무장 단체를 조직합니다.
위그노들에게 파리를 제외한 전 프랑스에서의 예배 자유와 8개의 안전 지대를 제공했습니다.
가톨릭 강경파들은 이 칙령을 '평화의 치욕'이라 부르며 대대적인 반대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정치는 국왕, 위그노, 가톨릭 강경파라는 삼각 갈등 구조로 재편됩니다.
[가톨릭 동맹의 결성]
기즈 공작 앙리를 중심으로 위그노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가톨릭 신성 동맹이 탄생합니다. 이 조직은 국왕의 권위보다 가톨릭 수호를 앞세우며 국가 속의 또 다른 국가가 됩니다.
전국의 가톨릭 세력이 결집하여 위그노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무력 시위를 벌였습니다.
앙리 3세는 이 조직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스스로 동맹의 수장을 자처하며 영향력을 억제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주도권은 기즈 공작에게 있었으며, 이는 장차 왕실에 대한 위협으로 돌아옵니다.
1577
[베르주라크 화의]
가톨릭 동맹의 압박으로 위그노의 권리를 대폭 축소하는 조약이 체결되며 제6차 전쟁이 종료됩니다. 왕은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을 억제하며 중앙집권화를 시도하지만 지방 귀족들의 저항에 부딪힙니다.
보리외 칙령의 파격적인 조건을 철회하고 가톨릭 동맹을 해산시키는 조건으로 맺은 타협안입니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은 조약으로 사라지지 않았고, 지방에서는 크고 작은 국지전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프랑스는 전쟁의 피로 속에 잠시 숨을 고르며 다음 폭풍을 기다리게 됩니다.
1580
[플렉스 화의 체결]
제7차 전쟁을 마무리하며 위그노들에게 약속했던 안전 도시의 보유 기간을 연장해 줍니다. 앙리 3세는 평화를 갈구했으나 왕실의 후계 구도가 꼬이면서 새로운 위기가 찾아옵니다.
비교적 사소한 충돌들로 이루어진 전쟁이었으나 국가 경제에는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위그노의 지도자 앙리 드 부르봉은 남부에서 세력을 점진적으로 키우고 있었습니다.
이후 몇 년간은 대규모 전쟁 없는 기묘한 평화가 이어졌으나 권력의 뇌관은 서서히 타들어가고 있었습니다.
1584
[왕위 계승의 위기]
앙리 3세의 마지막 남동생인 안주 공작이 사망하면서 개신교도인 앙리 드 부르봉이 공식적인 왕위 계승자가 됩니다. 가톨릭 프랑스가 개신교 국왕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에 가톨릭 진영은 경악합니다.
발루아 가문의 대가 끊기게 되자 프랑스의 근본법에 따라 나바라 왕 앙리가 1순위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가톨릭 동맹은 이를 막기 위해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기즈 가문의 인물을 왕으로 옹립하려 획책했습니다.
이후 벌어지는 제8차 전쟁은 단순히 종교 전쟁을 넘어 프랑스의 주인 자리를 놓고 다투는 거대한 전쟁이 됩니다.
1585
[느무르 조약의 압박]
가톨릭 동맹의 위협에 굴복한 앙리 3세가 개신교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앙리 드 부르봉의 계승권을 무효화하는 조약에 서명합니다. 이 결정으로 이른바 '세 앙리의 전쟁'이 발발합니다.
위그노들에게 개종 아니면 망명을 강요하는 가장 극단적인 탄압의 문서였습니다.
국왕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톨릭 동맹의 꼭두각시 노릇을 해야 하는 처지에 분노했습니다.
나바라 왕 앙리는 이 조약을 거부하고 무력 항전을 선포하며 전군을 집결시켰습니다.
1587
[쿠트라 전투의 승리]
나바라 왕 앙리가 이끄는 위그노 군대가 국왕의 주력 부대를 격파하며 압승을 거둡니다. 이는 위그노 전쟁 시작 이래 개신교 측이 거둔 최초의 정규전 대승이었습니다.
앙리 드 부르봉의 뛰어난 전술과 용맹함이 돋보였으며, 국왕의 총신 조아유즈 공작이 전사했습니다.
이 승리로 앙리 드 부르봉은 단순한 반란군 수장이 아닌 진정한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만천하에 알렸습니다.
반면 파리의 가톨릭 세력은 국왕의 패배에 분노하며 더욱 과격하게 변해갔습니다.
1588
[바리케이트의 날]
기즈 공작의 입성에 환호하는 파리 시민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국왕군에 저항합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앙리 3세는 수도를 버리고 비참하게 도주하며 왕권은 땅에 떨어집니다.
파리 시민들이 국왕보다 가톨릭 동맹의 기즈 공작을 더 추앙하며 일으킨 폭동입니다.
파리를 장악한 기즈 공작은 사실상의 국왕 행세를 하며 앙리 3세에게 굴욕적인 요구를 계속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앙리 3세는 비극적인 해결책을 선택하기로 결심합니다.
[기즈 공작 앙리 암살]
국왕 앙리 3세가 자신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왕궁으로 기즈 공작을 유인하여 살해합니다. 가톨릭 동맹의 상징을 제거했으나 이는 오히려 가톨릭 세력의 대대적인 반란을 불러옵니다.
기즈 공작뿐만 아니라 그의 동생인 로렌 추기경까지 함께 살해되는 잔인한 복수극이었습니다.
앙리 3세는 '이제야 내가 프랑스의 왕이다'라고 외쳤으나, 파리를 포함한 주요 도시들은 국왕을 살인자로 규정하고 등을 돌렸습니다.
고립된 왕은 생존을 위해 어제의 적이었던 위그노 지도자 앙리 드 부르봉과 손을 잡습니다.
1589
[앙리 3세의 피습]
파리 탈환을 준비하던 앙리 3세가 가톨릭 광신도 수도사의 칼에 찔려 치명상을 입습니다. 그는 임종 직전 앙리 드 부르봉을 후계자로 지목하며 발루아 왕조의 비극적인 종말을 고합니다.
자크 클레망이라는 수도사가 비밀 서신을 전달하는 척하며 국왕의 복부를 찔렀습니다.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왕은 숨을 거두며 나바라 왕 앙리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평화를 찾으라'고 유언했습니다.
이제 위그노의 수장이 프랑스의 법적 국왕 앙리 4세가 되어 왕국 전체를 정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1590
[이브리 전투의 승전]
앙리 4세가 가톨릭 동맹의 연합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군사적 승리를 거둡니다. 투구의 하얀 깃털을 이정표 삼아 적진을 돌파한 그의 용맹함은 전 프랑스에 전설처럼 퍼져나갑니다.
앙리 4세는 병사들에게 '길을 잃거든 나의 하얀 깃털을 따르라'는 유명한 연설을 남겼습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파리 포위망이 좁혀졌으나, 스페인 군대의 개입으로 파리 입성은 지체되었습니다.
앙리 4세는 무력만으로는 파리 시민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1593
[앙리 4세의 개종]
전쟁을 끝내기 위해 앙리 4세가 개신교를 버리고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전격 발표합니다. '파리는 미사를 드릴 가치가 있다'는 명언과 함께 그는 실질적인 프랑스의 왕이 되기 위한 결단을 내립니다.
전략적인 결단이었으나 위그노 동료들에게는 큰 배신감을, 가톨릭 교도들에게는 경계심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개종은 명분 없는 내전에 지쳐있던 중도파 가톨릭 세력을 대거 국왕 편으로 끌어들이는 신의 한 수가 되었습니다.
교황청의 사면까지 받아내며 그는 프랑스 내전의 마침표를 찍을 준비를 마쳤습니다.
1594
[파리 입성과 환대]
개종한 앙리 4세가 마침내 파리에 무혈 입성하여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습니다. 그는 자신을 끝까지 반대했던 이들까지 사면하며 진정한 통합의 군주로 거듭납니다.
스페인 주둔군을 명예롭게 퇴각시키며 그는 파리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습니다.
오랜 기근과 전쟁에 시달린 파리 시민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며 민심을 빠르게 장악했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지방에 잔존한 가톨릭 동맹 세력을 토벌하고 위그노들에게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1598
[낭트 칙령의 선포]
위그노들에게 종교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공식적으로 보장하는 낭트 칙령을 선포합니다. 이로써 36년간 프랑스를 피로 물들였던 위그노 전쟁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립니다.
유럽 역사상 최초로 국가 내에서 두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법적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위그노들에게는 100여 개의 안전한 도시를 보유할 권리와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이 칙령은 근대적 의미의 종교적 관용을 선언한 인류사의 위대한 문서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베르뱅 화의와 완전한 평화]
프랑스 내전에 개입해 온 스페인과 평화 조약을 맺으며 외부의 위협까지 완전히 제거합니다. 앙리 4세는 마침내 대내외적으로 인정받는 명실상부한 프랑스의 지배자가 됩니다.
스페인 군대가 프랑스 영토에서 완전히 철수하기로 합의한 조약입니다.
이로써 프랑스는 내전의 상처를 딛고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재도약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앙리 4세는 이후 경제 재건과 농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정책에 매진하며 성군으로 추앙받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