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털루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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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1815년 6월 18일, 현재의 벨기에 워털루 남쪽에서 벌어진 나폴레옹 전쟁 최후의 결정적인 전투입니다. 엘바섬을 탈출해 권력을 되찾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북부군이 웰링턴 공작의 영국-네덜란드 연합군, 그리고 블뤼허 원수의 프로이센군과 맞붙었습니다. 밤새 내린 폭우로 프랑스군의 공격이 지연된 사이 프로이센군이 극적으로 합류하였고, 나폴레옹의 무리한 기병 돌격과 최후의 근위대 투입마저 실패로 돌아가며 프랑스군이 처참히 궤멸되었습니다. 이 패배로 나폴레옹은 며칠 뒤 최종적으로 퇴위하며 백일천하의 막을 내렸고, 유럽에는 빈 체제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연표
1815
1815
[제7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
유배지를 탈출한 황제가 다시 권력을 잡자 유럽 국가들이 모여 새로운 동맹을 결성합니다. 이들은 연합군을 구성하여 그를 타도하기 위한 거대한 군사 행동을 결의합니다. 다가올 거대한 충돌의 서막이 오릅니다.빈 회의에 모여 있던 유럽 열강들은 나폴레옹의 복귀에 대항해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습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8세는 헨트로 도피했고, 웰링턴의 연합군은 벨기에 영토에 주둔하며 프러시아군의 합류를 기다리게 됩니다.
1815
[프랑스군의 샹브르강 도하]
동맹군이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하려는 전략을 세우고 국경을 넘습니다. 제국군은 신속한 기동으로 적의 허를 찌르며 공격적인 행보를 시작합니다. 방어 대신 선제공격을 택한 과감한 결단이었습니다.나폴레옹은 웰링턴의 영국-네덜란드 연합군과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이 합치기 전에 이들을 분리하여 격파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전략에 따라 프랑스군은 샤를루아(Charleroi)에서 샹브르강(Sambre)을 건너며 신속하게 벨기에 영토로 진입했습니다.
1815
[부르몽 장군의 탈영]
진격을 앞두고 고위 장교가 참모들과 함께 적진으로 도망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군대 내부에 배신에 대한 의심과 심리적 동요가 크게 번집니다. 작전의 기밀이 누설될 위험에 처하며 불안한 출발을 알립니다.프랑스 제6사단을 지휘하던 루이 드 부르몽(Louis de Bourmont) 장군이 리니 전투 전날 밤 참모들을 데리고 연합군 측으로 탈영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훗날 그가 연합군에게 프랑스군의 작전 계획을 유출했다고 비난했으며, 이 배신은 프랑스 군대 내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습니다.
1815
[리치먼드 공작부인의 무도회]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연합군 지휘부와 현지 귀족들이 모인 성대한 연회가 열립니다. 파티가 무르익을 무렵, 프랑스군이 가까이 진격해 왔다는 다급한 전령의 보고가 당도합니다. 지휘관들은 파티장을 빠져나와 다급히 전투를 준비하게 됩니다.브뤼셀에 거주하던 리치먼드 공작 부부가 주최한 무도회에 웰링턴 공작을 비롯한 다수의 연합군 장교들이 참석했습니다.
자정 직전 오라녜 공의 참모장이 보낸 전령이 프랑스군이 접근했다는 소식을 전했고, 지휘관들은 무도회장에서 조용히 빠져나와 부대로 복귀했습니다.
1815
[워털루를 향한 웰링턴 출발]
동맹국의 긴급한 전갈을 확인한 총사령관이 신속하게 전선을 향해 말을 달립니다. 흩어져 있던 연합군 부대들에게 즉각적인 집결 명령이 하달됩니다. 본격적인 방어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위기의 중심지로 직접 뛰어듭니다.무도회장을 빠져나와 짧은 휴식을 취한 웰링턴 공작은 이른 아침 전장인 카트르브라(Quatre-Bras)를 향해 직접 말을 타고 달려갔습니다.
프랑스군의 진격 속도가 예상보다 빠름을 인지하고 흩어진 연합군 부대를 결집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1815
[카트르브라에서의 지연전]
중요한 교차로를 선점하기 위해 파견된 부대 지휘관이 머뭇거리며 귀중한 시간을 허비합니다. 그 사이 연합군의 증원군이 속속 도착하며 방어선이 굳건해집니다. 이 지체로 인해 적의 퇴로를 차단하려던 제국군의 초기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합니다.나폴레옹은 미셸 네(Ney) 원수에게 좌익 부대를 맡겨 카트르브라 교차로를 장악하라고 지시했으나, 네 원수는 우물쭈물하며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이로 인해 웰링턴의 연합군이 병력을 보충할 시간을 얻게 되었고, 프랑스군은 연합군의 퇴로를 끊는 데 실패했습니다.
1815
[리니 전투와 프로이센의 후퇴]
제국군의 주력 부대가 동맹군의 한 축을 담당하는 군대와 정면으로 충돌하여 승리를 거둡니다.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며 패배한 동맹군은 전장에서 후퇴합니다. 그러나 제국군은 적을 완전히 섬멸하지 못하고 질서 정연하게 퇴각하도록 내버려두는 치명적 실수를 범합니다.나폴레옹은 리니(Ligny) 전투에서 블뤼허 원수의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1만 2천 명의 피해를 강요하며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은 완전히 궤멸되지 않고 참모장 그나이제나우의 뛰어난 지휘 아래 와브르(Wavre) 방향으로 질서 있게 철수하여 연합군과 합류할 불씨를 살려냈습니다.
1815
[몽생장으로의 전술적 후퇴]
우방국의 패퇴 소식을 접한 총사령관은 병력을 물려 방어에 유리한 고지대로 이동합니다. 적군의 압박을 피해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철수 작전이 전개됩니다. 훗날 운명을 건 거대한 전투가 벌어질 장소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합니다.프로이센군의 패배 소식을 들은 웰링턴 공작은 아침 일찍 병력을 몽생장(Mont-Saint-Jean) 고원 지대로 후퇴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블뤼허가 반드시 합류하겠다는 약속을 굳게 믿고, 웰링턴은 퇴로를 확보함과 동시에 방어에 매우 유리한 능선 지형을 선점하여 결전을 준비했습니다.
1815
[그루시 원수의 별동대 파견]
패각하는 적군을 쫓아내기 위해 대규모 별동대가 파견됩니다. 그러나 방향을 잘못 잡고 느리게 진격하는 바람에 적의 주력 부대를 완전히 놓치고 맙니다. 이 부대의 부재는 훗날 본대의 뼈아픈 수적 열세로 직결됩니다.나폴레옹은 우익을 담당하는 에마뉘엘 드 그루시(Grouchy) 원수에게 3만 4천 명의 병력을 주어 프로이센군의 뒤를 쫓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루시 원수는 프로이센군이 나뮈르나 리에주로 철수했다고 착각하여 잘못된 방향으로 추격을 지연시켰고, 정작 결정적인 전투에는 합류하지 못했습니다.
1815
[폭우가 쏟아지는 진흙탕]
하늘에서 쏟아지는 맹렬한 폭우가 전장을 거대한 진흙탕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추격하던 군대 역시 악천후와 진흙에 발이 묶여 더 이상의 기동을 멈춥니다. 양측 모두 비에 흠뻑 젖은 채로 다가올 아침의 피비린내 나는 결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탐보라 화산 폭발의 영향으로 추정되는 기상이변으로 인해 이틀 동안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네 원수가 연합군의 철수를 늦게 눈치채어 추격이 지연되었고, 진흙탕으로 변한 지형 탓에 양측 군대 모두 기병과 포병의 기동이 극도로 제한되며 빗속에서 밤을 지새웠습니다.
1815
[연합군 후위대 추격 작전]
뒤늦게 적의 후퇴를 알아챈 제국군이 기병대를 앞세워 거센 추격을 시작합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양측 기병대 간의 치열한 소규모 교전이 벌어집니다. 연합군은 아슬아슬하게 적의 추격을 뿌리치며 성공적으로 본대에 합류합니다.나폴레옹은 웰링턴의 철수를 엄호하던 옥스브리지(Uxbridge) 기병대를 상대로 맹렬한 추격전을 전개했습니다.
켈레르만의 흉갑기병과 근위대 기마포병까지 동원되었으나 악천후로 인해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했고, 연합군 후위대는 무사히 방어선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1815
[나폴레옹의 건강 악화]
전투 당일, 제국군의 최고 사령관은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말에 오래 앉아있지 못할 정도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로 인해 전장을 직접 누비며 세밀하게 정찰하고 지휘하는 데 큰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지휘관의 건강 문제가 군대 전체의 유기적인 움직임에 악영향을 미쳤습니다.나폴레옹은 심한 치질 등으로 인해 전투 중 말에 오래 타지 못하고 마차나 야전 침대에 의존해야 했으며 지휘에 심각한 지장을 겪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아편 팅크(로다넘)를 복용하여 판단력이 흐려졌을 가능성도 제기하며, 이는 제국군의 원활한 전술 전개에 큰 악재로 작용했습니다.
1815
[연합군의 치밀한 방어선 구축]
언덕의 능선 뒤편에 주력 부대를 숨기고 적의 포격을 피하는 교묘한 진형이 완성됩니다. 측면과 후방의 퇴로까지 철저히 계산된 완벽한 방어 태세였습니다. 다가오는 거대한 포격으로부터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탁월한 지휘였습니다.웰링턴 공작은 몽생장 고원의 능선 뒤편(역사면)에 6만 8천 명의 병력을 절묘하게 배치하여 프랑스군의 무자비한 포격 피해를 최소화했습니다.
또한 서쪽에 많은 병력을 배치하여 만약의 사태에 바다 쪽으로 후퇴할 수 있는 생존로까지 철저히 확보해 두는 주도면밀함을 보였습니다.
1815
[세 개의 요새화된 거점]
주 방어선 전방에 위치한 견고한 벽돌 건물들을 요새화하여 적의 공격을 분산시키는 방파제로 삼았습니다. 건물 벽에 총안구를 뚫고 정예 병력을 배치해 난공불락의 진지로 만들었습니다. 이 거점들은 다가오는 거대한 파도를 막아낼 가장 중요한 핵심 방어막이 됩니다.웰링턴은 방어선 앞쪽의 우고몽(Hougoumont), 라 에 생트(La Haye Sainte), 파플로트(Papelotte)라는 세 개의 농장과 건물을 요새로 개조했습니다.
이 세 거점은 프랑스군의 진격로를 가로막아 병력을 분산시키고 공격 속도를 크게 지연시키는 결정적인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1815
[프랑스군의 거대한 진형 배치]
전투가 임박하자 황제는 보병과 기병을 아우르는 거대한 군단을 평원에 일제히 전개합니다. 군악을 울리며 전진하는 대군단의 위용은 적군에게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가했습니다. 대규모 포병대까지 앞세우며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진을 분쇄할 준비를 마쳤습니다.약 7만 1천 명의 프랑스군은 몽생장 고원 남쪽 1km 지점에 일제히 전개하였으며, 좌익에는 레유의 제2군단, 우익에는 데를롱의 제1군단을 배치했습니다.
후방에는 로보의 제6군단과 예비 기병대, 그리고 황제의 최정예 부대인 제국 근위대가 포진하며 전면전을 위한 진형을 완벽히 구축했습니다.
1815
[치명적인 공격 지연]
땅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공격 개시 시각을 늦춘 결단이 전황을 뒤흔들게 됩니다. 포병의 위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선택이었으나, 이는 적의 원군이 도착할 수 있는 금쪽같은 시간을 내어준 셈이 되었습니다. 훗날 가장 뼈아픈 실책 중 하나로 역사에 기록됩니다.나폴레옹은 밤새 내린 비로 진흙탕이 된 땅이 굳기를 기다리며 원래 계획했던 총공격 시간을 오전 늦게까지 대폭 미뤘습니다.
대포의 포탄이 마른 땅에 튕겨 피해를 주는 도탄 사격의 효과를 노린 결정이었으나, 이 치명적 지연으로 인해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이 전장에 도착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습니다.
1815
[우고몽 양동 작전 개시]
적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조공 작전으로 전방의 요새화된 저택에 대한 공격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방어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히며 양측 모두 엄청난 병력을 쏟아붓는 수렁으로 변해버립니다. 단순한 교란 작전이 전투 내내 끝을 알 수 없는 맹렬한 소모전으로 번졌습니다.나폴레옹은 연합군 우익을 분산시키기 위해 제롬 보나파르트 사단에게 우고몽(Hougoumont) 농장을 먼저 공격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영국 근위병들의 결사적인 수비에 막혀 요새를 점령하지 못했고, 오히려 막대한 프랑스 병력이 이곳에 발이 묶이는 자충수가 되었습니다.
1815
[제1군단의 거대한 대공세]
거대한 대포들의 일제 사격에 이어 대규모 보병 군단이 중앙 방어선을 향해 묵직하게 진격합니다. 빽빽한 밀집 대형으로 언덕을 오르던 보병들은 적의 기병대에게 강력한 역습을 당하며 큰 피해를 입고 맙니다. 방어선을 돌파하려던 첫 번째 거대한 파도가 덧없이 부서졌습니다.대규모 포격 지원과 함께 드루에 데를롱(Drouet d'Erlon)이 이끄는 프랑스 제1군단이 연합군 중앙을 겨냥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과도하게 횡대로 밀집된 진형으로 인해 기동성이 떨어졌고, 연합군 보병의 사격과 영국 중기병대의 맹렬한 역습을 받아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했습니다.
1815
[무모한 대규모 기병 돌격]
적의 진형 변경을 퇴각으로 오인한 현장 지휘관이 보병의 지원 없이 대규모 기병 돌격을 감행합니다. 방어군은 촘촘한 방진을 짜고 일제 사격으로 돌진하는 기병들을 무자비하게 쓰러뜨립니다. 섣부른 판단으로 인해 제국의 자랑이던 정예 기병대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습니다.미셸 네 원수는 연합군의 부대 이동을 철수로 오판하여 보병과 포병의 적절한 지원 없이 대규모 기병 돌격을 연속해서 무리하게 지시했습니다.
영국군 보병들은 사각형의 튼튼한 방진(Square)을 구축하고 일제 사격을 퍼부어 수많은 프랑스 기병들의 맹렬한 공격을 완전히 무력화시켰습니다.
1815
[프로이센군의 전장 도착]
먼 길을 우회하여 행군해 온 동맹군이 마침내 전장의 측면에 거대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지친 방어군에게는 구원의 빛이었고, 제국군에게는 측면이 붕괴될 위기를 알리는 절망의 신호였습니다. 전투의 양상이 급격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결정적 전환점이 마련됩니다.오후 4시 30분경, 폰 뷜로(von Bülow)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 제4군단이 진흙탕을 뚫고 프랑스군의 우측 측면에 나타나 맹공을 개시했습니다.
그루시의 부대가 올 것이라 헛된 희망을 품고 있던 나폴레옹은 우측면 방어를 위해 로보(Lobau)의 군단을 긴급히 파견해야만 했습니다.
1815
[로보 군단의 퇴각과 위기]
측면을 노리고 달려드는 새로운 적군을 막아내기 위해 파견된 부대가 압도적인 수적 열세를 견디지 못하고 밀려납니다. 이로 인해 전략적 요충지인 작은 마을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며 본대의 후방이 완전히 노출될 위기에 처합니다. 제국군의 진영에 짙은 패색이 드리우기 시작합니다.오후 6시경 프로이센 제4군단의 거센 압박에 밀려 로보 군단이 붕괴될 위기에 처하자, 결국 플랑스누아(Plancenoit) 마을이 프로이센군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이 마을은 나폴레옹의 우측 후방에 위치한 핵심 요충지였기에, 완전히 돌파당할 경우 프랑스군의 퇴로가 차단되는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1815
[청년 근위대의 탈환 시도]
후방의 붕괴를 막기 위해 황제는 아껴두었던 예비대 중 젊은 정예 병력들을 급히 투입합니다. 치열한 시가전 끝에 마을을 일시적으로 되찾는 데 성공하지만, 밀려드는 적의 파상 공세에 이내 다시 마을을 내어주고 맙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피 튀기는 난전이 계속됩니다.나폴레옹은 뒤에므(Duhesme) 장군이 지휘하는 청년 근위대(Jeune Garde) 사단을 투입하여 뺏긴 플랑스누아를 다시 점령하려 시도했습니다.
이들은 맹렬한 공격으로 마을을 잠시 탈환했으나, 끊임없이 밀려드는 프로이센군의 압도적인 병력을 견디지 못하고 이내 다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1815
[고참 근위대의 마을 점령]
거듭된 위기 속에 마침내 제국 최고의 역전의 용사들이 마을로 투입됩니다. 이들은 단 한 발의 총알도 쏘지 않은 채 오직 총검만으로 적진을 유린하며 요충지를 완벽하게 탈환해냅니다. 무적의 부대가 발휘한 경이로운 투혼으로 무너져가던 우측 방어선이 기적적으로 안정화됩니다.오후 7시 직후, 나폴레옹은 최정예 고참 근위대(Vieille Garde) 두 개 대대를 추가로 투입하는 강수를 두었습니다.
이들은 압도적인 위압감과 함께 무자비한 총검 돌격만으로 프로이센군을 플랑스누아에서 완전히 몰아내며 프랑스군의 우측 측면을 일시적으로 고착화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1815
[라 에 생트 전초기지 함락]
중앙의 핵심 요새를 끈질기게 지키던 방어군이 탄약 고갈로 끝내 항복하며 전초기지가 적의 손에 넘어갑니다. 이로 인해 방어선의 정중앙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며 총사령관은 전투 시작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황제에게 승리의 여신이 미소 지을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습니다.오후 6시 30분경, 프랑스 제2군단 소속 부대의 맹공 끝에 연합군 중앙의 핵심 요충지인 라 에 생트(La Haye Sainte) 농장이 마침내 프랑스군에게 함락되었습니다.
네 원수는 이 틈을 타 대포를 전진 배치하여 연합군 중앙 방어선을 직사로 정밀 타격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고지를 단숨에 점령했습니다.
1815
[네 원수의 지원 요청 거절]
중앙 돌파의 결정적 기회를 잡은 전선 지휘관이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황제에게 추가 병력을 다급하게 요청합니다. 그러나 측면의 위협에 신경이 곤두선 황제는 남은 예비대를 내어주는 것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었던 찰나의 순간이 허무하게 지나가 버립니다.라 에 생트를 점령한 후 완벽히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네 원수는 나폴레옹에게 보병 지원군을 강력히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의 압박에 시달리던 나폴레옹은 병력 지원을 매몰차게 거절했고, 결과적으로 연합군을 완전히 붕괴시킬 최고의 타이밍을 허무하게 놓치고 말았습니다.
1815
[치텐 군단의 측면 방어 지원]
위태롭던 방어군의 좌측면으로 동맹국의 또 다른 군단이 극적으로 당도합니다. 이들의 합류로 여유가 생긴 총사령관은 좌측의 병력을 빼내어 붕괴 직전이던 중앙 방어선을 두텁게 보강합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 최후의 일전을 준비할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이 되었습니다.오후 7시 30분경, 폰 치텐(von Zieten)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 제1군단이 연합군의 좌익에 성공적으로 도착하여 방어선을 인계받았습니다.
덕분에 웰링턴 공작은 좌익에 방어 중이던 부대를 빼내어 포격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중앙 전선을 두텁게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1815
[제국 근위대 총공격 명령]
승패의 갈림길에서 황제는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최정예 부대에게 최후의 진격 명령을 내립니다. 적진을 향해 묵묵히 전진하는 무적의 군단을 보며 아군은 환호했고 적군은 숨을 죽였습니다. 제국의 명운을 건 마지막 카드가 전장 한가운데로 던져집니다.측면의 위협이 일시적으로 진정되자, 나폴레옹은 연합군 중앙을 완전히 뚫어버리기 위해 오후 7시 30분경 불패의 상징이던 제국 근위대를 투입했습니다.
프리앙(Friant)과 모랑(Morand) 장군이 이끄는 근위대는 북소리에 맞춰 전진했으나, 이미 웰링턴은 강화된 중앙 방어선에 강력한 화망을 구축하고 이들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815
[프랑스군의 전면적 궤멸]
언덕 뒤에 숨어 있던 방어군이 일제히 일어나 쏟아부은 맹렬한 사격에 무적의 부대가 무너져 내립니다. 결코 물러서지 않던 이들이 후퇴하는 모습을 본 제국군은 극심한 공포와 패닉에 휩싸입니다. 무패의 신화가 깨지며 군대의 전선은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고지대에 숨어 대기하던 영국 근위보병대와 52경보병연대가 측면에서 제국 근위대를 향해 파괴적인 일제 사격을 가했습니다.
불패를 자랑하던 제국 근위대가 견디지 못하고 뒤돌아 후퇴하기 시작하자, 이를 목격한 프랑스군 전체가 극심한 공황 상태에 빠져 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1815
[연합군의 총공세와 추격]
적의 대열이 붕괴되는 것을 본 총사령관이 모자를 벗어 흔들며 전군의 대대적인 전진을 명령합니다. 방어선에 웅크리고 있던 모든 병력이 산을 넘어 적을 향해 거침없이 쇄도합니다. 제국군은 저항할 의지를 잃고 완전히 궤멸되어 무질서하게 흩어지기 시작합니다.오후 8시 30분경, 웰링턴 공작은 붕괴되는 프랑스군을 향해 전군 총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압도적인 연합군과 프로이센군의 양면 공격을 견디지 못한 프랑스군은 완전히 통제력을 상실한 채 대포와 장비를 모두 버리고 무작정 도주했습니다.
1815
[벨 알리앙스에서의 조우]
처절했던 전장의 한복판에서 두 동맹군 사령관이 마침내 얼굴을 마주합니다. 무수한 희생 끝에 얻어낸 값진 승리를 축하하며 서로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피로 얼룩진 이 만남은 치열했던 전쟁의 종식과 평화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인 순간이 되었습니다.오후 9시경, 웰링턴 공작과 블뤼허 원수는 프랑스군의 본부가 있던 벨 알리앙스(La Belle Alliance) 여관 근처에서 우연히 조우하여 눈부신 승리를 축하했습니다.
블뤼허 원수는 이 전투를 '벨 알리앙스의 승리'라 부르기를 원했으나, 웰링턴이 승전보를 쓴 본부의 이름을 따서 '워털루 전투'로 영원히 굳어졌습니다.
1815
[참혹한 전장과 시신 수습]
날이 밝자 끔찍한 대학살의 현장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비좁은 평원에 수만 명의 사상자와 쓰러진 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지옥 같은 참상을 이루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거대한 구덩이를 파고 시신들을 묻으며 전쟁의 참혹함에 깊이 탄식했습니다.전투 다음 날, 좁은 전장에는 4만 5천 명 이상의 전사자와 부상자, 그리고 1만 2천 마리의 죽은 말들이 널브러져 끔찍한 광경을 연출했습니다.
수많은 시신들은 서둘러 화장되거나 거대한 구덩이에 매장되었고, 부상자들은 브뤼셀 등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으나 열악한 의료 환경으로 많은 이들이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1815
[황제의 두 번째 퇴위]
전장에서 참패하고 수도로 돌아온 황제는 든든했던 모든 정치적 지지를 상실합니다. 결국 거센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서 두 번째로 물러나게 됩니다. 이로써 세상을 뒤흔들었던 짧고 강렬했던 제국의 부활 시도는 완전히 막을 내립니다.파리로 도주한 나폴레옹은 의회와 정치인들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 더 이상 권력을 유지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결국 전투 4일 만인 6월 22일, 아들 나폴레옹 2세에게 양위한다는 조건으로 두 번째 퇴위 문서에 서명하며 백일천하(Cent-Jours)의 완전한 종말을 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