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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국제기구 수장, 사회 운동가 + 카테고리

버마(미얀마)의 저명한 외교관이자 제3대 유엔 사무총장(1961년~1971년)을 지냈다. 쿠바 미사일 위기 해결, 콩고 내전 종식 등 주요 국제 위기에서 탁월한 중재 능력을 발휘하며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 비동맹 운동의 태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유엔개발계획 등 수많은 유엔 기구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사후 버마 군사 정부와의 갈등으로 장례식에서 큰 논란을 겪었으나, 그의 유산은 '우딴 섬'과 유엔 대학교 등으로 계승되어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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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85

[우 딴의 탄생]

버마 판타나우에서 유복한 지주이자 쌀 상인 가족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저널리스트를 열망했으며, 16세에 영어로 첫 기사를 발간하는 등 글쓰기에 재능을 보였다.

우 포 흐티트와 다우 난 타웅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양곤에서 투리야 신문을 설립하는 데 기여하고 버마 연구 사회의 창립 일원이기도 했다. 후에 그의 가족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1928

[랑군 대학교 졸업 및 교사 활동]

랑군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20세에 졸업한 후, 판타나우 국립 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전 버마 교사 증명서 시험에서 1등을 차지했다.

교사직을 통해 가족을 부양했고, 훗날 미얀마 총리가 되는 우 누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틸라와"라는 필명으로 여러 신문과 잡지에 기고했으며, 유엔의 전신 국제연맹에 대한 책을 포함하여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1935

[아웅 산과의 대중적 활동]

진취적인 국수주의 지도자 아웅 산과 함께 신문에 편지를 쓰며 대중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친구 우 누는 법학을 전공하러 랑군 대학교로 돌아갔고, 딴은 교장에 추가로 학교 교육장의 역할을 맡으며 버마 학교 교과서 위원회, 국립 교육 회의, 버마 연구 사회에서 교육자로서의 명성을 쌓았다.

1945

[버마 독립 운동 참여]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 점령 하에 교육 재결성 위원회 서기관을 지냈으며, 이후 친구 우 누의 설득으로 반국수주의 인민 자유 연맹(AFPFL) 지도부에 합류하며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딴은 AFPFL 정보부의 기자 계급 우두머리로 빠르게 진급했고, 우 누가 총리가 된 후 1948년 방송국 국장, 1949년 정보부 서기로 임명되며 버마 정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55

[반둥 회의 서기 역임]

비동맹 운동을 탄생시킨 중요한 국제 회의인 반둥 회의에서 서기로 활동하며 버마의 정치적 정세에서 주요한 지도자로 부상했다.

1951년부터 1957년까지 총리 서기로서 우 누를 위한 연설문 작성, 외국 순방 조정, 외국 방문객 접견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시기 동안 우 누의 절친한 친구이자 조언자로서 그의 동의 없이는 주요 결정을 내리지 않을 정도로 깊은 신뢰 관계를 유지했다.

1961

[아시아 최초 유엔 사무총장 대행 취임]

전임자 다그 함마르셸드의 갑작스러운 사망 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유엔 총회의 만장일치 추천으로 아시아인 최초로 유엔 사무총장 대행직을 맡게 되었다.

그는 1957년부터 1961년까지 버마의 영구적 유엔 대사로 활동하며 알제리 독립 협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국제 외교 무대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1960년에는 버마 정부로부터 "마하 트레이 시투"라는 칭호를 수여받기도 했다.

1962

[쿠바 미사일 위기 해결 공헌]

첫 번째 임기 동안 쿠바 미사일 위기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콩고 내전을 종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여 국제 사회로부터 광범위한 찬사를 받았다.

1962년 11월 30일 유엔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정식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후, 국제 평화와 안보를 위한 그의 역량이 본격적으로 발휘되었다. 그는 1966년 11월 30일에 첫 임기를 마쳤다.

1966

[유엔 사무총장 두 번째 임기]

본인은 원치 않았으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만장일치 추천과 유엔 총회의 승인으로 사무총장으로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재임명 당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사무총장직에 대한 그의 명확한 공헌을 인정하며 만장일치로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의 두 번째 임기는 1971년 12월 31일 퇴직까지 지속되었다.

1967

[미국과 관계 악화 및 베트남 전쟁 비판]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지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미국 정부와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었고, 미국과 베트남 정부 간의 비밀 평화 교섭 시도는 결국 린든 B. 존슨 행정부에 의해 거절되었다.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의 6일 전쟁 당시 이집트의 요청으로 시나이반도에서 유엔군을 철수시키는 데 동의하여 미국과 이스라엘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사실 인도와 유고슬라비아 등 군인을 공헌한 나라들은 이미 철수에 동의했었고, 딴은 전쟁을 막기 위해 카이로로 날아가 나세르 대통령을 설득하려 노력했다.

1971

[유엔 사무총장 3번째 임기 거부]

사무총장으로서 3번째 임기를 맡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며 재임을 거부했다. 이는 그의 직무에 대한 부담감과 신념에 따른 결정이었다.

그는 1971년 12월 31일 유엔 사무총장직에서 퇴임했다. 재임 기간 동안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의 유엔 가입을 주최하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또한 유엔개발계획, 유엔 대학교, 유엔 무역 개발 회의, 유엔 연구 사업소, 유엔 환경 계획 등 많은 유엔의 개발과 환경 기관, 기금, 프로그램들을 설립하는 데 기여하며 국제 협력의 지평을 넓혔다.

1972

[뉴욕에서 사망, 버마 장례식 논란]

뉴욕에서 폐암으로 사망했으나, 당시 버마 군사 정부는 그의 국제적 위상과 대중의 존경을 질투하여 어떠한 공식적 연루나 장례식도 없이 매장되기를 명령했다.

유엔 본부에서 버마 랑군으로 운구된 시신은 공항에서 의장대나 고위 공무원 없이 아무도 환영하지 않았다. 12월 5일 그의 장례식 날 수만 명의 국민들이 거리에 나와 조의를 표했지만, 학생 단체에 의해 관이 강탈되어 랑군 대학교 학생 연합 운동장에 임시 대영묘가 세워졌다. 정부군은 이를 진압하며 시위 학생들을 살해하고 관을 시웨다곤 파고다 언저리에 재안장했고, 이 "우딴 위기"는 버마에서 폭동과 계엄령 선포로 이어졌다.

1975

[유엔 대학교 설립 및 '우딴 섬' 명명]

딴의 비전이었던 유엔 대학교가 도쿄에서 설립되었으며, 유엔 본부 건너편 이스트강의 벨몬트 섬은 그의 유산을 기려 비공식적으로 '우딴 섬'으로 개명되었다.

그의 회고록 <유엔에서 바라본 조망>이 1978년 사후 출간되었고, 그의 딸은 아버지의 '하나의 세계' 철학을 추진하기 위해 우딴 연구소를 창립했다. 손자 딴 민트 우 또한 역사가이자 유엔 고위 공무원으로서 조부의 평화 선례를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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