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_of_likes 110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인물, 군인, 삼국시대, 촉한 + 카테고리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 촉한을 지킨 용맹한 노장입니다. 관우 유비 제갈량 강유 등 촉한의 핵심 인물들과 함께하며 일생을 나라에 바쳤습니다. 오나라 탈출이라는 기지를 발휘해 유비에게 돌아왔고 음평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뛰어난 무용을 보였습니다. 70세가 넘는 고령에도 최전선에서 활약하며 촉한의 마지막까지 함께한 충신이자 지혜로운 조언자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88

[요화의 출생]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 요화가 태어났다. 그의 정확한 생년은 알 수 없으나, 258년에 이미 70세가 넘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188년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요화는 형주 양양군 중로현 사람으로, 자는 원검이다. 본래 이름은 순이었다. 그의 생몰 연대는 188년 이전 ~ 264년으로 알려져 있으며, 삼국지 촉서 종예전에 따르면 258년에 그의 나이가 이미 70살이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188년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219

[관우 휘하에서 주부로 활동]

유비 휘하 무장 관우의 밑에서 주부로 관직을 시작했다. 이는 관우가 손권에게 패하기 전의 일로, 정확한 시점은 불분명하다.

요화는 유비 휘하 무장 관우의 밑에서 주부(主簿)를 지내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 시기는 관우가 손권에게 패배하기 전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유비 세력에 합류하여 활동했음을 보여준다.

220

[유비에게 재합류 및 의도태수 임명]

관우가 손권에게 패하자 어쩔 수 없이 투항했지만, 유비에게 돌아가기 위해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노모와 함께 탈출했다. 돌아가던 길에 유비와 재회하여 촉한군에 재합류했고, 유비는 그를 의도태수로 삼았다.

관우가 손권의 여몽에게 패하자 요화는 잠시 투항했다. 그러나 유비에게 돌아갈 의지를 가지고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린 후 노모와 함께 탈출을 감행했다. 탈출 도중 자귀에서 오 정벌을 나서던 유비와 극적으로 재회하여 촉한군에 다시 참전하게 되었고, 유비는 이에 기뻐하며 요화를 의도태수로 임명했다.

223

[제갈량 참군 및 독광무 임명]

유비 사망 후 승상 제갈량의 참군이 되었으며, 이후 독광무에 임명되었다. 이는 촉한의 핵심 인물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인사 조치였다.

유비가 죽은 후, 요화는 승상 제갈량의 참군(參軍)으로 임명되어 촉한의 주요 행정 및 군사 업무에 참여했다. 이후 독광무(督廣武)에 임명되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고, 장완이 자신에게 주어진 무재 직위를 요화에게 양보하려 했을 정도로 능력과 신임을 인정받았다.

238

[탕심 진영 공격 및 위군 격파]

음평태수로서 위나라 수선강후 탕심의 진영을 공격했다. 위 옹주자사 곽회가 보낸 지원군을 물리치고, 위나라 장수 왕윤을 화살에 맞아 숨지게 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연희 원년(238년), 음평태수였던 요화는 위나라 수선강후 탕심의 진영을 공격했다. 이에 위나라 옹주자사 곽회가 광위태수 왕윤과 남안태수 유혁에게 군사를 빌려 요화를 공격했으나, 황제의 칙명이 도착하기 전에 요화는 유혁군을 물리쳤고 왕윤은 요화의 공격에 화살을 맞아 전사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248

[강유 북벌 참여 및 성중산 축성]

강유의 북벌에 참여하여 성중산에 성을 쌓고 강족들로부터 인질을 받았다. 곽회의 공격에도 강유의 구원으로 북벌은 실패했으나, 곽회에게 토벌당한 강족 치무대가 촉으로 오도록 도왔다.

연희 11년(248년), 강유가 북벌을 시작하며 서쪽으로 진출해 위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강족 치무대를 맞이할 때, 요화는 성중산에 성을 쌓고 강족들로부터 인질을 받았다. 곽회가 군세를 둘로 나누어 한편으로 요화를 공격했지만, 강유가 요화를 구원하면서 곽회의 토벌을 피할 수 있었다. 비록 북벌은 실패했지만, 치무대 무리를 무사히 촉으로 오도록 도왔다.

249

[등애와 백수에서 대치]

강유의 북벌 중 백수 남쪽 물가에 포진하여 위나라 장수 등애와 대치했다. 강유가 도성을 탈취하려는 전략을 세웠으나, 등애가 이를 간파하고 도성을 수비하여 계획은 무산되었다.

248년 북벌 실패 이듬해 가을, 강유가 다시 북으로 진군했으나 곽회에 의해 저지당하고 철수했다. 이후 곽회가 강족을 토벌하기 위해 서쪽으로 간 틈을 타, 요화는 군세를 이끌고 백수 남쪽 물가에 포진하여 위나라 장수 등애와 대치했다. 요화의 역할은 등애를 저지하여 강유가 동쪽으로 진군해 도성(洮城)을 탈취하는 것이었으나, 등애는 이를 간파하고 도성으로 돌아가 수비에 성공하여 강유의 전략은 실패했다.

259

[우거기장군 등 최고위직 승진]

공적을 인정받아 우거기장군, 가절, 영병주자사에 임명되고 중향후에 봉해지는 등 촉한의 최고위직으로 승진했다. 장익과 함께 촉한의 대장으로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

요화는 오랜 군공과 능력을 인정받아 우거기장군(右車騎將軍) · 가절(假節) · 영병주자사(領幷州刺史)에 임명되었고, 중향후(中郷侯)에 봉해졌다. 장익(張翼)과 함께 촉한의 대장으로 활약하며 당시 사람들로부터 '앞에는 왕평과 구부가 있고, 뒤에는 장익과 요화가 있다'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로 높은 지위와 명성을 얻었다. 그의 우거기장군 임기는 대략 259년부터 촉한 멸망 시점인 263년까지로 추정된다.

262

[강유의 북벌 비난]

강유가 군사를 이끌고 적도로 진출하자, 요화는 '지략과 역량이 적에 미치지 못하는데 억지로 계속하면 필시 곤경에 처할 것'이라며 그의 무리한 북벌에 대해 강하게 비난하고 우려를 표했다.

경요 5년(262년), 강유가 군세를 이끌고 적도(狄道)로 진출하자, 요화는 강유의 무리한 북벌 전략에 대해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전쟁을 그치지 않으면 필시 우리는 곤경에 처해질 것입니다. 지략이 적에 미치지 못하며 역량 또한 그러하거늘, 억지로 계속한다 하더라도 성공하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촉한의 국력 소모와 위험을 경고했다.

263

[위나라 침공 저항 및 항복]

위나라의 촉한 침공 시 강유, 장익과 함께 검각을 수비하며 마지막까지 항전했다. 그러나 수도 성도가 함락되자, 결국 위나라 장수 종회에게 항복하며 촉한의 멸망을 맞이했다.

262년 강유의 북벌 비난 이듬해인 263년, 위나라가 대규모로 촉한을 침공해오자 요화는 강유, 장익과 함께 전략적 요충지인 검각(劍閣)을 수비하며 끝까지 위나라에 저항했다. 하지만 촉한의 수도 성도(成都)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더 이상 항전할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위나라 장수 종회(鍾會)에게 항복했다. 이는 촉한의 멸망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사건이었다.

264

[병사]

촉한 멸망 후 위나라 수도 낙양으로 연행되던 도중 병사했다. 그는 촉한의 건국부터 멸망까지 모든 과정을 지켜본 인물이었다.

함희 원년(264년), 촉한이 위나라에 의해 멸망한 후 요화는 다른 촉한의 관리 및 장수들과 함께 위나라의 수도 낙양(洛陽)으로 연행되던 도중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유비가 거병한 시점부터 촉한의 멸망까지 거의 모든 과정을 함께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요화
+ 사건추가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