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크라위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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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선수, 축구 감독, 스포츠인 축구 선수

네덜란드의 전설적인 축구 선수이자 감독. '토털 풋볼' 전술을 꽃피우고 현대 축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약스와 바르셀로나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수많은 우승과 개인상을 거머쥐며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1974년 월드컵 준우승을 이끌며 골든볼을 수상했다. 2016년 폐암으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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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47

[출생]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헨드릭 요하네스 크라위프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헨드릭 요하네스 크라위프라는 본명으로 태어났다. 그는 이후 '요한 크라위프'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1957

[아약스 유소년팀 입단]

10세의 나이에 AFC 아약스 유소년팀에 입단하며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 야구에 관심이 많았으나 재능을 알아본 코치의 눈에 띄어 축구로 전향, 10세의 나이에 AFC 아약스 유소년 클럽에 입단했다.

1964

[아약스 1군 데뷔]

아약스 1군에 데뷔하여 흐로닝언과의 경기에서 데뷔골을 기록했다.

1964년 아약스 1군에 데뷔했으며, 그해 FC 흐로닝언을 상대로 한 에레디비시 데뷔전에서 팀의 3:1 패배에도 불구하고 득점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였다.

1965

[아약스 리그 우승 주역]

1965-66 시즌부터 아약스 주전으로 자리매김하며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1965-66 시즌, 10월 24일 AFC DWS전에서 2골을 넣은 이후 주전으로서 입지를 굳혔고, 그 시즌 23경기에서 25골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이는 그의 선수 경력에서 첫 주요 우승이었다.

1967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데뷔]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 데뷔하며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1967년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 데뷔하여 1977년까지 48경기에 출전해 33득점을 기록하며 대표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1971

[첫 발롱도르 수상]

유럽 최고의 축구 선수에게 주어지는 발롱도르를 처음으로 수상하며 개인 기량의 정점을 찍었다.

1971년, 유럽 축구에서 가장 권위 있는 개인상인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세계적인 선수로 인정받았다. 그는 1973년, 1974년에도 수상하여 총 3회 수상 기록을 세웠다.

[아약스 유러피언컵 3연패]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아약스의 유러피언컵(현 UEFA 챔피언스리그) 3연패를 이끌며 '토털 풋볼'의 시대를 열었다.

아약스 소속으로 1971년, 1972년, 1973년 유러피언컵을 연달아 우승하며 유럽 축구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이 시기는 리뉘스 미헐스 감독과 함께 발전시킨 '토털 풋볼' 전술이 세계 축구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때였다.

1973

[FC 바르셀로나 이적]

당시 세계 최고 이적료를 기록하며 FC 바르셀로나로 이적, 첫 시즌에 팀의 14년 만의 라리가 우승을 선사했다.

1973년 8월 19일, 600만 네덜란드 길더(2025년 기준 약 210억 원)라는 당시 세계 최고 이적료로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이적 첫 시즌에 발롱도르를 수상함과 동시에 바르셀로나에 1960년 이후 첫 라리가 우승 트로피를 안겨주며 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1974

[FIFA 월드컵 준우승 및 골든볼]

FIFA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결승으로 이끌고 '크라위프 턴' 등 혁신적인 플레이로 골든볼을 수상했다.

1974년 FIFA 월드컵에서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의 주장으로 활약하며 '토털 풋볼'을 앞세워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비록 서독과의 결승전에서 패했지만, 그는 대회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골든볼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스타로 각광받았다.

1976

[UEFA 유로 3위]

UEFA 유로 1976에서 네덜란드 대표팀의 3위를 이끌었다.

UEFA 유로 1976에 네덜란드 대표로 참가하여 팀이 3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1977

[국가대표팀 은퇴]

자택에서 발생한 납치 미수 사건 이후 가족의 안전을 위해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1977년, 바르셀로나 자택에서 자신과 가족을 노린 납치 미수 사건을 겪은 후, 가족을 두고 떠날 수 없다는 이유로 국가대표 은퇴를 발표하며 1978년 월드컵 불참을 결정했다. 이는 오랫동안 군부 독재 비판 때문으로 와전되기도 했다.

1978

[선수 은퇴]

FC 바르셀로나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1977-78 시즌 FC 바르셀로나에서 코파 델 레이 우승을 달성한 후 1978년 선수 생활 은퇴를 선언했다.

1979

[현역 복귀]

투자 실패로 재산을 잃은 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아즈텍스에서 현역으로 복귀했다.

1978년 은퇴했으나 투자 실패로 재산 대부분을 잃게 되자 1979년 5월 미국 북미 사커 리그의 로스앤젤레스 아즈텍스에서 현역으로 복귀했으며, 그 해 북미 사커 리그 MVP를 수상했다.

1980

[워싱턴 디플로매츠 이적]

미국의 워싱턴 디플로매츠로 이적하여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1980년 2월 미국의 워싱턴 디플로매츠로 이적하여 모든 경기를 소화하며 활약했다.

1981

[레반테 UD 임대]

스페인 레반테 UD로 임대되어 잠시 활동했다.

1981년 2월 스페인 세군다 디비시온의 레반테 UD와 계약하여 임대 선수로 활동했다.

[워싱턴 디플로매츠 복귀]

레반테 임대 후 워싱턴 디플로매츠로 다시 복귀했다.

1981년 6월 레반테 UD 임대 활동을 마친 후 워싱턴 디플로매츠로 복귀했으나, 그해 12월 친정팀 아약스로 이적하며 유럽 무대로 돌아왔다.

[아약스 재이적]

친정팀 아약스로 돌아와 두 번의 리그 우승을 추가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1981년 12월 친정팀 아약스로 재이적하여 1981-82, 1982-83 시즌 에레디비시 우승과 1982-83 시즌 KNVB 베커르 우승을 달성하며 여전한 기량을 과시했다.

1983

[페예노르트 이적]

36세의 나이로 페예노르트로 이적하여 리그와 컵 우승을 차지했다.

36세가 되던 1983년, 아약스의 라이벌 팀인 페예노르트로 이적하여 에레디비시와 KNVB 베커르 우승을 달성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1984

[선수 생활 완전 마감]

페예노르트에서의 마지막 시즌 후 공식적으로 선수 경력을 완전히 마감했다.

페예노르트에서의 1983-84 시즌을 끝으로 공식적으로 선수 생활을 완전히 마감했으며, 이후 축구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1985

[아약스 감독 부임]

친정팀 아약스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고, 1987년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끌었다.

1984년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 후 1985년 친정팀 아약스의 감독이 되어 축구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선수 시절 리뉘스 미헐스에게 배운 '토털 풋볼' 전술을 활용해 팀을 이끌었고, 1987년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달성했다.

1988

[FC 바르셀로나 감독 부임]

FC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부임, 전설적인 '드림팀'을 구축하며 라리가 4연패와 구단 첫 유러피언컵 우승 등 총 11개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1988년 FC 바르셀로나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주젭 과르디올라, 호마리우 등 걸출한 선수들을 영입해 전설적인 '드림팀'을 구축했다. 그는 프리메라리가 4연패(1990–91, 1991–92, 1992–93, 1993–94)와 1992년 구단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현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등 총 11개의 트로피를 획득하며 구단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1991

[혈관 이식 수술 및 금연 캠페인]

담배 애호가였던 그는 혈관 이식 수술 후 금연 캠페인에 참여하며 경각심을 일깨웠다.

담배 애호가였던 크라위프는 1991년 혈관 이식 수술을 받았고, 이후 금연해야만 했다. 그는 카탈루냐 보건부의 금연 캠페인에 참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금연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1996

[바르셀로나 감독직 마감]

바르셀로나 감독직을 마감하며 구단을 떠났지만, 그의 축구 철학은 여전히 큰 영향을 미쳤다.

1996년 바르셀로나 감독직을 마감하고 팀을 떠났지만, 그의 지도 방식과 축구 철학은 바르셀로나 유소년 클럽 및 성인 클럽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며 현재까지 이어지는 윙어 활용 전술 등의 기반이 되었다.

1999

[세기의 선수 선정]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IFFHS)이 주최한 투표에서 유럽 세기의 선수, 펠레에 이어 세계 세기의 선수 2위로 선정되었다.

1999년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IFFHS)이 주최한 투표에서 유럽 세기의 선수로 선정되었으며, 펠레에 이어 FIFA 세기의 선수 투표에서 2위를 차지하는 영예를 안았다. 또한 프랑스 풋볼의 세기의 축구 선수 투표에서도 3위에 올랐다.

2004

[FIFA 100 포함]

펠레가 선정한 'FIFA 100'에 이름을 올리며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100인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2004년 펠레가 선정한 'FIFA 100'에 포함되었고, 1998년 '20세기 월드 팀', 2002년 'FIFA 월드컵 드림 팀'에도 이름을 올리는 등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선수로 평가받았다.

2008

[아약스 기술 이사 부임 및 사임]

아약스의 기술 이사로 부임했으나, 감독과의 의견 차이로 빠르게 사임했다.

2008년 2월 20일 아약스의 기술 이사로 부임했으나, 감독 마르코 판 바스턴과의 의견차가 심하여 그해 3월 7일 자리를 떠났다.

2009

[카탈루냐 대표팀 감독 부임]

카탈루냐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여 2013년까지 활동했다.

2009년 11월 카탈루냐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했으며, 2013년까지 이 직책을 수행하며 다시 한번 축구 현장에서 열정을 불태웠다.

2015

[폐암 진단]

폐암 진단을 받고 1년간의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2015년 10월 폐암 선고를 받았으며, 이후 1년여간의 투병 생활을 이어갔다.

2016

[사망]

폐암 투병 끝에 68세의 나이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하며 전 세계 축구 팬들에게 큰 슬픔을 안겼다.

2016년 2월 몇 차례 항암 치료를 받았으나, 폐암 선고 1년여 만인 2016년 3월 24일 68세의 나이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전 세계 축구계에 큰 애도 분위기를 가져왔다.

2017

2017.3 사후 1년

[바르셀로나 훈련장 개명]

FC 바르셀로나 훈련장 명칭이 '에스타디 요한 크라위프'로 변경되어 그의 업적을 기렸다.

요한 크라위프 사망 1주기를 맞아 2017년 3월 FC 바르셀로나의 훈련장 명칭이 '에스타디 요한 크라위프'로 변경되며 그의 업적과 유산을 기렸다.

2018

2018.8 사후 2년

[아약스 홈구장 개명]

AFC 아약스의 홈구장 '암스테르담 아레나'가 '요한 크라위프 아레나'로 공식 개명되었다.

2017년 10월 25일 AFC 아약스의 홈구장 명칭을 '암스테르담 아레나'에서 '요한 크라위프 아레나'로 변경하는 프로젝트가 추진되어 2018년 8월 공식적으로 개명되었다. 이는 그의 고향 팀에서 남긴 업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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