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제프 괴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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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괴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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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나치 독일 고위 관료, 선전장관 + 카테고리
파울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는 나치 독일의 제국 대중계몽선전부 장관을 지낸 핵심 정치인이자 아돌프 히틀러의 가장 충성스러운 추종자 중 한 명입니다. 1897년 라인란트의 라이트에서 태어난 그는 1922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문헌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24년 나치당에 입당하여 베를린 대관구장(가울라이터)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뛰어난 대중 연설 능력과 악랄한 반유대주의를 바탕으로 나치당의 선전 활동을 이끌었으며, 1933년 나치 집권 이후에는 선전장관으로서 언론, 예술, 정보를 완전히 통제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베를린 스포츠궁전 연설에서 '총력전'을 주창했고, 1944년에는 총력전 전권대사로 임명되었습니다. 1945년 4월 히틀러가 자살하기 전 그를 독일 국가총리로 지명했으나, 임명된 지 하루 만인 5월 1일 아내 마그다와 함께 여섯 자녀를 독살하고 동반 자살하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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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97

[독일 라이트 출생]

독일 묀헨글라트바흐 남쪽의 공업 도시인 라이트(Rheydt)에서 파울 요제프 괴벨스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는 모두 평범한 집안 출신의 로마 가톨릭 신자였으며 아버지는 공장 서기였습니다. 어린 시절 앓은 질병과 선천적 기형으로 인해 오른쪽 다리를 절었으며, 이 신체적 결함 때문에 훗날 제1차 세계대전 징집에서 면제되었습니다.

1917

[김나지움 졸업 및 아비투어 합격]

김나지움을 수석으로 졸업하며 대학 입학 자격 시험인 아비투어(Abitur)를 통과했습니다.
최상위권 성적 덕분에 시상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연설하는 전통적인 영예를 안았습니다. 부모는 그가 가톨릭 사제가 되기를 희망했고 본인도 이를 진지하게 고민했으나, 점차 종교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1922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박사 학위 취득]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문헌학 박사(PhD in philology)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본, 뷔르츠부르크, 프라이부르크, 뮌헨 등 여러 대학교를 거치며 문학과 역사를 전공했습니다. 학업 과정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협회의 장학금 지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1923

[일기 작성 시작]

26세 생일을 앞두고 실직 상태로 고향 부모님 집에 머무는 동안 훗날 역사적 사료가 될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연인이었던 엘제 얀케에게 선물 받은 일기장에 그녀와의 관계 등 개인적인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이후 거의 매일 일기를 쓰며 이 기록은 나치당과 제3제국의 내막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남게 됩니다.

1924

[나치당 입당 및 활동 개시]

아돌프 히틀러의 뮌헨 폭동(맥주홀 폭동) 재판을 지켜보며 그에게 깊이 매료되어 나치당에 정식으로 입당했습니다.
히틀러가 재판을 선전의 무대로 활용하는 모습에서 강력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후 나치당 북부 지부에서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함께 일하며 열성적인 나치 활동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1926

[베를린 대관구장(가울라이터) 임명]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당내 요직인 베를린 대관구장(Gauleiter)으로 전격 임명되었습니다.
수도 베를린이라는 핵심 지역에서 나치당의 메시지와 프로그램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히틀러의 굳건한 신임을 얻게 되었습니다.

1927

[선전 신문 '데어 앙그리프(Der Angriff)' 창간]

베를린에서 나치의 입장을 대변하는 선전 중심의 신문 '데어 앙그리프(Der Angriff, 공격)'를 직접 창간했습니다.
이 신문은 반유대주의를 노골적으로 선동하고 반대파를 억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행되었습니다. 특히 베를린 경찰 부청장 베른하르트 바이스를 표적으로 삼아 끊임없이 비방하는 캠페인을 주도했습니다.

1928

[국가의회(Reichstag) 의원 당선]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가의회 선거에서 나치당 소속 의원으로 선출되어 중앙 정계에 공식 진출했습니다.
국회의원이 된 그는 1933년까지 의원직을 유지하며, 합법적인 의회 제도의 틀 안에서 나치당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종국적으로는 민주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려는 목표를 향해 매진했습니다.

1930

[나치당 선전 책임자 발탁]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나치당(NSDAP) 전체를 통괄하는 선전 책임자(Head of party propaganda)로 승진했습니다.
미국의 반전 영화인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독일 내 상영을 금지시키기 위해 폭동 시위를 성공적으로 조직하는 등, 그의 탁월한 대중 선동과 여론 조작 능력을 인정받은 결과였습니다.

1931

[마그다 리첼과 결혼]

나치당 지지자이자 열성 당원이었던 마그다 리첼(Magda Ritschel)과 결혼했습니다.
마그다는 괴벨스의 연설에 감명받아 당에 가입한 후 연인으로 발전했습니다. 결혼 후 그들의 베를린 아파트는 히틀러와 다른 주요 나치 고위직들이 자주 모이는 회합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1932

[가계도 팸플릿 출판]

자신의 외할머니가 유대인 혈통이라는 정치적 루머가 퍼지자, 이를 강력히 반박하기 위해 공식 가계도를 담은 팸플릿을 제작해 배포했습니다.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나치당의 핵심 인물로서, 혈통에 대한 논란은 매우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아리아인 혈통을 증명하는 데 각별히 신경을 썼습니다.

1933

[제국 대중계몽선전부 장관 취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한 직후 신설된 국가 기관인 제국 대중계몽선전부의 장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직책을 거머쥐며 나치 독일 내의 신문, 라디오, 영화, 예술 등 모든 뉴스 매체와 정보 흐름에 대한 강력한 통제권을 확보했습니다. 특히 라디오와 영화를 나치 이데올로기 선전 도구로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1938

[수정의 밤(Kristallnacht) 선동]

선전장관으로서 독일 전역에서 벌어진 유대인 대상 대규모 폭동인 '수정의 밤' 사태를 조장하고 선동했습니다.
대중이 유대인의 상점, 주택, 유대교 회당을 파괴하는 폭력 행위에 가담하거나 동조하도록 반유대주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퍼뜨렸습니다. 이는 홀로코스트로 향하는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40

[주간지 '다스 라이히(Das Reich)' 창간]

독일 내의 지식인층과 엘리트 독자를 겨냥한 고급 주간 신문 '다스 라이히'를 새롭게 창간했습니다.
이 신문은 1944년에 이르러 140만 부 이상이 발행될 정도로 성공적이었습니다. 괴벨스는 이 매체에 직접 218편의 사설을 쓰며 독일의 전쟁 수행을 지지하고 적국을 비난하는 정교한 선전을 펼쳤습니다.

1941

['처칠의 거짓말 공장' 사설 발표]

주간지 기고를 통해 이른바 '큰 거짓말(Big Lie)' 선전 기법의 개념과 연관된 내용이 담긴 사설을 발표했습니다.
이 사설에서 그는 선전의 본질이 객관적 진실의 규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이해할 때까지 유리한 내용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하며 선전의 무자비한 본질을 스스로 드러냈습니다.

1943

[베를린 스포츠궁전 '총력전' 연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세가 역전되자 베를린 스포츠궁전에서 대규모 청중을 앞에 두고 '총력전(Total War)'을 주창하는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를 대중에게 간접적으로 시인하며, 볼셰비즘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국가의 모든 자원을 전쟁에 쏟아부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여 군중의 광기를 이끌어냈습니다.

1944

[베를린시 최고 책임자(Stadtpräsident) 임명]

루트비히 슈테크의 뒤를 이어 수도 베를린 시의 행정을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Stadtpräsident)로 공식 취임했습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당의 베를린 대관구장(Gauleiter) 직책과 더불어 시의 실질적 행정권까지 장악하게 되면서 베를린 지역에 대한 절대적인 권력을 쥐게 되었습니다.

[총력전 제국 전권대사 임명]

히틀러에 의해 독일의 모든 전시 동원을 책임지는 '총력전 제국 전권대사'라는 막강한 직책에 임명되었습니다.
무기 생산 증가와 국방군 인력 보충을 위해 전쟁 수행에 불필요한 사업장을 강제 폐쇄하고, 여성을 포함한 전 국민을 노동 및 군무에 징집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으나 이미 기운 전황을 뒤집지는 못했습니다.

1945

[총통 지하 벙커(Vorbunker)로 대피]

소련의 붉은 군대가 베를린 외곽까지 밀고 들어오자, 아내 및 여섯 자녀를 모두 데리고 히틀러가 머물던 지하 벙커 구역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패전이 눈앞에 다가온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괴벨스는 도주하지 않고 가족과 함께 베를린에 남아 끝까지 히틀러의 곁을 지키는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여주었습니다.

[독일 국가총리(Chancellor) 지명]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하기 직전 작성한 정치적 유언장에 따라 제3제국의 새로운 국가총리로 공식 지명되었습니다.
총리에 오른 직후 괴벨스는 베를린에 주둔한 소련군 사령관에게 히틀러의 사망을 알리고 휴전을 요청하는 서한을 전달했으나, 소련 측에 의해 조건 없는 항복만을 요구받으며 거절당했습니다.

[가족 독살 및 동반 자살]

소련군에 의한 휴전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아내 마그다와 함께 청산가리를 사용해 4세에서 12세 사이의 자녀 6명을 모두 살해하고 자신들도 자살했습니다.
히틀러가 없는 세상에서는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극단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결과였습니다. 이들의 비참한 최후는 권력을 쥔 나치 수뇌부의 붕괴와 제3제국의 완전한 멸망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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