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평 (작가)
연표
1908
경상북도 영천군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잠시 청송군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성장 과정은 불분명하며,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현철의 조선배우학교에서 연기를 공부했다.
1931
[극작가 및 배우 활동 시작]
조선연극사의 전속 작가로 활동하며 여러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배우로서도 예명 왕평을 사용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현철의 조선배우학교에서 연기를 배웠고, 1930년대 초부터 조선연극사의 전속 작가로 작품을 발표했다. 이 시기부터 본명 이응호로는 작가 활동을, 예명 왕평으로는 배우 활동을 하며 다방면에서 재능을 선보였다.
1932
[포리돌레코드 문예부장 역임]
포리돌레코드 조선 지점 설립에 참여하여 문예부장을 맡았으며,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트로트인 이애리수의 '황성 옛터' 등 대중가요 작사가로서 대표작을 탄생시켰다.
1932년 포리돌레코드 조선 지점 설립에 깊이 관여하여 문예부장직을 수행했다. 이 시기에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본격적인 트로트로 평가받는 이애리수의 '황성 옛터'와 선우일선의 신민요 '조선팔경가' 등 다수의 인기 대중가요의 작사가로 이름을 알렸다.
1933
[인기 극반 '항구의 일야' 발표]
8장으로 발매되며 큰 인기를 얻은 극반 '항구의 일야'를 발표하고 직접 주연을 맡아 다재다능한 면모를 과시했다.
1933년부터 여러 장으로 나누어 발매된 인기 극반 '항구의 일야'의 작품을 쓰고 전옥과 함께 주연을 맡아 대중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이 작품은 그의 작가 및 배우로서의 역량을 동시에 보여준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1937
일제 강점기 말기 성봉영화원 소속으로 영화 '나그네'(1937년)와 '군용열차'(1938년)에 출연하며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그는 풍채 좋은 외모를 바탕으로 영화 속에서 듬직한 오빠 이미지로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1940
[젊은 나이에 요절]
연극 '남매' 공연 도중 무대 위에서 쓰러져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며, 당시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940년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연극 '남매'를 공연하던 중 갑작스럽게 무대에서 쓰러져 30대 초반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다재다능한 예술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당대 예술계와 대중에게 큰 안타까움을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