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보 (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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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왕보(王甫)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관료로, 자는 국산(國山)이며 광한군 처현 사람입니다. 풍채가 훌륭하고 인물과 시사 비평을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기에는 유장(劉璋)을 섬겼으나, 유비(劉備)가 익주를 평정한 후 발탁되어 면죽령과 형주 의조종사(議曹從事)를 역임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222년 이릉대전(효정 전투) 당시 유비의 동정(동쪽 정벌)에 참여했다가 자귀(秭歸)에서 오나라 군대와의 전투 중 전사하였습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의 수하로서 형주를 지키다 관우의 부고를 듣고 성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는 충신으로 각색되어 대중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아들 왕우(王佑) 역시 촉한의 관료로 활동하며 부친의 명성을 이었습니다.
연표
214
본래 유장을 섬기던 왕보는 유비가 촉 땅을 차지한 후 그 재능을 인정받았습니다.
유비는 그를 면죽령(綿竹令)으로 삼아 해당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215
그는 인물을 평가하고 정치적 논의를 하는 데 능하여 의조종사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촉한 정권의 중요한 실무 관료로서 입지를 다졌습니다.
219
역사적 사실과 달리 소설에서는 관우를 보좌하며 봉화대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는 등 지략가로 등장합니다.
특히 형주 수비의 불안요소인 반준을 경계하라고 관우에게 충언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220
맥성을 지키던 중 관우와 관평 부자가 오나라에 잡혀 처형당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됩니다.
이에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성벽 아래로 몸을 던져 주군을 따라 죽는 충절을 보여줍니다.
221
유비가 황제에 즉위하고 동쪽으로 군사를 일으키자 왕보도 이를 수행했습니다.
그는 유비의 본대와 함께 형주 지역으로 진군하여 오나라 군대와 대치했습니다.
222
왕우는 자가 문휴(文修)로, 부친을 닮아 용모가 준수하고 사람을 평하기를 좋아했습니다.
훗날 촉한에서 상서우선랑(尚書右選郎)이라는 관직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육손이 이끄는 오나라 군대의 화공과 반격으로 촉한군이 대패할 때 최전선인 자귀에 있었습니다.
혼란스러운 전장 속에서 끝까지 싸우다 목숨을 잃어 생을 마감했습니다.
230
왕우가 양희에 대해 '말이 너무 없다'고 평하자 맹광이 '그는 훌륭한 인물이니 가볍게 평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이 일화는 《삼국지》 양희전에 기록되어 왕보 가문의 인물 비평 성향을 보여주는 예시로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