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타 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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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검객, 신선조 대장 + 카테고리

에도 막부 말기, 천재적인 검술 실력으로 신선조 1번대 대장 및 검술 사범을 맡았다. 어린 시절 시위관에 입문하여 콘도 이사미, 히지카타 토시조와 동문이 되었고, 신선조 결성 후 이케다야 사건 등 주요 임무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폐결핵으로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드라마틱한 생애는 수많은 창작물의 영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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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42

[오키타 소지 탄생]

에도 시대 말기의 무사 오키타 소지가 시라카와 번사인 오키타 가쓰지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정확한 생년은 1842년과 1844년 두 가지 설이 있으며, 여름에 태어났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에도 막부 말기, 시라카와 번사인 오키타 가쓰지로의 장남으로 오키타 소지가 태어났다. 생년월일의 월, 일은 특정할 수 없으나 여름에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그의 생년은 1842년 또는 1844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으며, 어느 쪽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정확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본성은 후지와라씨를 칭했고, 아명은 소지로였다.

1846

[부친 오키타 가쓰지로 사망]

오키타 소지가 4살 되던 해, 그의 아버지 오키타 가쓰지로가 사망했다. 이후 어머니와도 사별하며 어린 시절 부모를 모두 잃었다.

오키타 소지가 4살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 오키타 가쓰지로가 사망했다. 이후 어머니와도 사별하며 어린 시절에 부모를 모두 잃는 아픔을 겪었다.

1851

[천연이심류 시위관 입문]

9살 때 천연이심류 도장 시위관에 입문하여 콘도 슈스케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후에 신선조 결성 시 핵심 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오키타 소지는 9살 때 천연이심류 도장인 시위관에 입문하여 콘도 슈스케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천연이심류의 숙두를 맡으며 천재 검사로 불렸고, 콘도 이사미, 히지카타 토시조와는 동문이다. 후에 신선조 결성의 핵심 인물이 된다.

1862

[검술 명인으로의 재능 인정]

신선조 결성 전, 코지마 시카노스케는 오키타의 검술에 대해 "이 사람의 검술은, 만년에 반드시 명인에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평가하며 그의 뛰어난 재능을 예견했다.

신선조가 결성되기 전인 분큐 2년 7월, 코지마 시카노스케는 "이 사람의 검술은, 만년에 반드시 명인에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코지마 일기》에 서술하며 오키타 소지의 비범한 검술 실력과 미래의 명성을 예견했다. 이는 그의 뛰어난 재능이 일찍부터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1863

[신선조 결성 및 주요 임무 활약]

낭사대 결성에 참가하여 교토로 상경, 분열 후 콘도를 따라 신선조를 결성했다. 오키타의 1번대는 항상 주요 임무를 수행했으며, 세리자와 카모 암살 등 신선조의 핵심 작전에서 활약하며 뛰어난 검술 실력을 증명했다.

분큐 3년, 오키타 소지는 낭사대 결성에 참여하여 교토로 상경했다. 낭사대가 분열된 후, 그는 콘도 이사미를 따라 남아 신선조를 결성하는 데 기여했다. 신선조 1번대 대장으로서 오키타는 항상 주요 임무를 수행했으며, 검호들로 넘쳐나는 신선조 내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으로 많은 사람을 베었다. 같은 해 9월에는 세리자와 카모 암살, 우치야마 히코지로 암살 등 중요한 작전을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첫 살해 기록]

오키타 소지가 사람을 베었다는 첫 기록이 분큐 3년 3월 24일 밤, 키요카와 하치로의 호소에 모인 낭사대 1번대 소속 토노우치 요시오의 기록에서 확인되었다.

분큐 3년 3월 24일 밤, 키요카와 하치로의 호소에 모인 낭사대 1번대에 소속해 있던 토노우치 요시오의 기록을 통해 오키타 소지가 사람을 베었다는 첫 기록이 남았다. 이는 그의 초기 활동과 냉철한 면모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1864

[이케다야 사건에서의 활약과 발병]

막부 토벌파 간부들을 숙청하며 이케다야 사건에서 크게 활약했으나, 폐결핵으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그의 건강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겐지 원년 6월 5일에 발생한 이케다야 사건에서 오키타 소지는 막부 토벌파의 여러 간부를 숙청하며 큰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이때 폐결핵으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며, 그 뒤로도 의연하게 활동한 기록이 있어 당시 폐결핵이 아닌 탈수증세로 쓰러졌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그의 건강 이상설이 처음으로 제기된 중요한 시점으로 평가된다.

1865

[야마나미 케이스케 추격 및 할복 시중]

신선조 총장 야마나미 케이스케가 탈주하자 추격대로 파견되어 그를 잡았다. 오키타는 야마나미를 형처럼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할복을 시중드는 비극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게이오 원년 2월, 신선조 총장 야마나미 케이스케가 탈주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오키타 소지는 추격대로 파견되어 오미국 쿠사츠시에서 야마나미를 붙잡았다. 야마나미는 오키타의 시중을 받아 할복했는데, 오키타는 야마나미를 형처럼 따랐다고 알려져 있어 이 사건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1866

[폐결핵 발병 기록 (추정)]

막부 의관 마츠모토 료쥰이 신선조를 집단 검진했을 때 '폐결핵 환자 1명'을 기록했는데, 이 인물이 오키타 소지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는 그의 병세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게이오 2년 경, 막부 의관 마츠모토 료쥰이 신선조 대원들을 집단 검진했을 때 '폐결핵 환자가 1명 있다'고 기록했다. 이 환자가 오키타 소지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는 이케다야 사건 때 폐결핵으로 쓰러졌다는 설과는 별개로 그의 병세가 이미 게이오 2년경에 시작되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867

[제1선 활동 중단]

게이오 3년 이후부터는 신선조의 제1선에서 활약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는 그의 병세가 악화되었음을 시사하며, 도바 후시미 전투에도 참가하지 못하고 오사카로 후송된다.

게이오 3년 이후 오키타 소지는 신선조의 제1선에서 활약하지 않게 되었다. 그의 건강 악화로 인해 도바 후시미 전투에도 참가하지 못하고 오사카로 후송되었으며, 현재는 도바 후시미 전투를 향해 가던 중 부상을 입어 오사카로 후송되는 배 안에서 폐결핵 증상이 나타났다는 설이 유력하다.

[어릉위사의 콘도 애첩 집 습격 (오키타 화를 면함)]

오키타가 요양 중이던 콘도의 애첩 집을 어릉위사 세 명이 습격했다. 이는 이토 카시타로 살해에 대한 복수였으나, 오키타는 후시미 봉행소로 떠난 후라 화를 면했다.

게이오 3년 12월 18일, 오키타 소지가 요양하기 위해 머물고 있던 콘도의 애첩의 집을 어릉위사 아베 쥬로, 사하라 타로, 우츠미 지로 세 명이 습격했다. 이는 그들의 지도자였던 이토 카시타로를 살해한 신선조에 대한 복수였으나, 오키타는 이미 후시미 봉행소로 떠난 후라 재난을 면할 수 있었다. 같은 날 저녁, 아베 일행은 니조성에서 돌아오던 콘도 이사미를 총격하여 부상을 입혔다.

1868

[오키타 소지 사망]

콘도 이사미가 참수당한 지 약 두 달 뒤, 스승의 죽음도 알지 못한 채 폐결핵으로 센다가야에서 사망했다. 그의 향년은 25~27세로 추정된다.

게이오 4년 5월 30일(양력 7월 19일), 오키타 소지는 센다가야의 정원사로 숨겨져 요양하던 중 사망했다. 그는 콘도 이사미가 참수당한 지 약 2개월 뒤였으며, 스승의 죽음도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생년이 명확하지 않아 향년은 약 25~27세로 여러 설이 존재한다. 그의 묘지는 도쿄도 미나토구 모토아자부 3 센쇼지 외에 있으며, 계명은 현광원인예명도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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