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보 도시미치
연표
1830
오쿠보 도시미치가 일본 가고시마현 사쓰마노쿠니에서 태어났다. 그는 훗날 메이지 유신을 이끌고 일본 근대화에 크게 공헌한 인물로 평가된다.
1866
같은 사쓰마번 출신 사이고 다카모리 등과 뜻을 같이하며, 막부 타도 운동을 이끄는 개혁파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군대가 힘을 합쳐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기로 결심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수립된 태정관 정권에서 참의(參議)가 되어, 과감한 제도 개혁을 추진하며 근대 일본 정부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68
[메이지 유신 선언]
사쓰마번과 조슈번 군대가 교토 고쇼를 공략하여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선언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쓰마번과 조슈번 군대가 교토 고쇼를 공략하여 264년간 이어져 온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선언하는 핵심 주역으로 활약했다.
1871
[이와쿠라 사절단 참가]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서양 각국을 방문하여 서구 문물을 시찰하고 일본의 근대화와 경제 발전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다.
메이지 유신 정부의 구성원으로서 이와쿠라 도모미를 중심으로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서양 각국을 둘러보았다. 귀국 후 그는 일본의 빠른 경제 발전을 위한 기술 학교 설립, 국채 승인, 개인 사업 임시세, 정부 공장 건설 및 경영 등을 후원했다.
1873
[정한론 반대 및 개혁 주도]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 주장에 반대하며 일본 국내 개혁과 성장을 우선시했고, 메이지 6년 정변 이후 정부의 핵심 인물로서 지조 제도 개혁과 식산진흥책을 추진하다.
동료 사이고 다카모리가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을 주장하자, 이에 오쿠보는 일본 국내의 개혁과 성장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역설했다. 일본 정부가 오쿠보의 편을 들면서 사이고 다카모리 일파가 하야한 뒤, 오쿠보는 정부의 핵심 인물로서 지조(地祖) 제도 개혁과 식산진흥책 등 국가 근대화 정책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다.
1877
정한론으로 인해 정부에서 물러나 고향 사쓰마로 돌아간 사이고 다카모리가 불만을 품은 무사들을 이끌고 1877년 세이난 전쟁을 주도했으나, 오쿠보는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사이고는 결국 자결했다.
1878
[기오이자카의 변으로 암살]
도쿄 기오이자카에서 시마다 이치로 일당에게 암살당하며 일본 근대화의 한 주역으로 생을 마감하다.
세이난 전쟁을 진압한 뒤, 오쿠보 도시미치는 1878년 도쿄 기오이자카에서 정한론에 불만을 품은 이시카와현 사족 시마다 이치로 등 6명에게 암살당했다. 이는 '기오이자카의 변'으로 불리며, 일본 근대화의 핵심 주역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