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마 시게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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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교육자 + 카테고리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핵심 인물이자 와세다 대학을 설립한 교육자입니다. 제8대와 제17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일본의 정치, 경제, 외교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불평등 조약 개정, 지조 개혁, 산업 진흥 등 급진적인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으며, 일본 최초의 정당 내각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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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38

[출생]

일본 히젠국 사가시에서 사가번 번사 오쿠마 노부야스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오쿠마 시게노부는 1838년 3월 11일, 히젠국 사가시에서 사가번 번사 오쿠마 노부야스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아명은 하치타로였습니다.

1845

[번교 퇴학과 서양 학문 탐구]

7세 때 번교 고도칸에 입교하여 한학을 배웠으나, 유교 이념에 반발하며 번교 개혁을 주장하다 퇴학당했습니다. 이후 국학자에게 국학을 배우고 난학료에서 서양 학문을 공부했습니다.

7세 무렵, 번교 고도칸에 입교하여 한학을 배웠으나, 이곳의 유교 이념에 반발하여 동료들과 번교 개혁을 주장하다 퇴학당하는 일을 겪었습니다. 이후 국학자에게 국학을 배우고, 난학료에 입학하여 서양 학문을 공부하며 새로운 지식을 탐구했습니다. 난학료와 고도칸이 합쳐진 후에는 네덜란드 학문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1865

[영어 학습과 존왕파 활동]

사가 번이 나가사키에 영어학교 지엔칸을 개설하자 이를 지도하고 직접 영어를 배웠으며, 막부 전복과 왕정복고를 추구하는 존왕파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사가 번이 1865년 나가사키에 영어학교 지엔칸을 열자, 번주인 후쿠시마 다네도미와 함께 이를 지도하고 자신도 직접 영어를 배웠습니다. 이 시기부터 막부를 전복하고 왕정복고를 추구하는 존왕파로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1867

[쇼군 하야 권고 시도와 체포]

막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하야를 권고하기 위해 상경하던 중 체포되어 사가로 송환되었습니다.

1867년,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하야를 권고하려고 상경하던 중 체포되어 고향인 사가로 송환되었습니다.

1868

[메이지 유신 후 정계 진출]

메이지 유신 성공 후 존왕파였던 그는 외국사무국 판사에 임명되어 외국과의 교섭을 담당했습니다.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자 존왕파였던 오쿠마 시게노부는 외국사무국의 판사(담당자)에 임명되어 외국과의 교섭을 담당하게 되며 정계에 진출했습니다.

1869

[재정 금융 분야 책임]

외국사무국 판사로서 외교 업무를 수행하던 중, 회계관 부지사에 임명되어 재정 금융 분야까지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1869년부터 외국사무국 판사로서 외국과의 교섭을 담당하던 오쿠마는 회계관 부지사에 임명되어 국가의 재정 및 금융 분야까지 책임지는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1873

[대장경 취임 및 근대화 추진]

대장성 사무 총재에 임명된 후, 10월에는 대장경이 되어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 젊은 인재를 등용하며 급진적인 근대화를 추진했습니다.

1873년 5월 대장성 사무 총재에 임명되었고, 10월부터는 대장경이 되었습니다. 오쿠마는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와 같은 젊은 인재를 등용하고 기도 다카요시와 연합하여 급진적인 근대화를 추진하며 오쿠보 도시미치를 견제했습니다. 그가 담당한 대장성은 봉건적인 토지제도를 근대화하는 지조(地租) 개혁사업을 담당했고, 산업 진흥 정책도 추진했습니다.

1874

[정한론 반대와 세이난 전쟁 재정 책임]

당시 국내 개혁에 집중하기 위해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에 반대했으며, 이후 사이고가 반란을 일으킨 세이난 전쟁에서는 전비 지출에 관한 재정 운용을 책임졌습니다.

당시 이러한 국내 개혁작업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오쿠마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에 반대하였습니다. 실각한 사이고가 고향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세이난 전쟁), 오쿠마는 전비지출에 관한 재정운용을 책임졌습니다.

1875

[자유 민권 운동 동조]

자유 민권 운동에 동조하여 헌법 제정과 국회 개설을 요청하는 의견서를 제출하며 민주화 개혁에 앞장섰습니다.

자유 민권 운동이 전개되자 오쿠마는 이에 동조하여 헌법 제정과 국회 개설을 요청하는 의견서를 제출하며 일본의 민주화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1881

[정부 해임과 하야]

정책 차이로 이토 히로부미와 사쓰마 파벌과 대립하다 재정 운용 실패를 이유로 참의에서 해임되어 정부를 떠났습니다.

이후 정책 차이를 둘러싸고 친구였던 이토 히로부미, 사쓰마 파벌과 대립하였습니다. 오쿠마는 재정 운용의 실패 때문에, 1881년 참의에서 해임되어 정부를 떠나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1882

[입헌개진당 창당 및 도쿄전문학교 설립]

정부에서 물러난 후 국회 개설에 대비하여 입헌개진당을 창당했으며, 같은 해 10월 와세다 대학의 전신인 도쿄전문학교를 창립했습니다.

재야에서 오쿠마는 국회 개설에 대비하여 1882년 입헌개진당을 창당했습니다. 여기에는 고노 아즈사, 오자키 유키오, 이누카이 쓰요시, 야노 류케이 등이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현재 와세다 대학의 전신이 되는 도쿄전문학교를 도쿄 교외인 와세다에 창립하며 교육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1888

[총리 교체에도 외무대신 유임]

구로다 기요타카가 총리에 취임했지만, 그는 외무대신직에 유임되었습니다.

1888년 구로다 기요타카가 총리에 취임했지만, 오쿠마는 외무대신직에 유임되었습니다.

[외무대신 취임 및 폭탄 테러]

당시 총리 이토 히로부미의 요청으로 외무대신에 임명되어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개정을 추진했으나, 극우단체 테러로 오른쪽 다리를 잃고 사임했습니다.

오쿠마의 외교 능력을 높이 평가하던 당시 총리 이토 히로부미는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1888년 2월 정적이었던 오쿠마를 외무대신으로 임명했습니다. 같은 해 구로다 기요타카가 총리에 취임했지만 오쿠마는 외상에 유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오쿠마의 정책에 반대하는 극우단체 겐요샤의 조직원이 던진 폭탄에 의해 오른쪽 다리를 잃고, 이 사건으로 인해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1896

[두 번째 외상 취임과 사임]

제2차 마쓰카타 내각에서 다시 외상에 임명되었으나, 사쓰마 파벌과의 대립으로 1897년 사임했습니다.

1896년 제2차 마쓰카타 내각에서 다시 외상에 임명되었지만, 사쓰마 파벌과의 대립으로 인해 1897년에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1897

[사쓰마 파벌과의 대립으로 사임]

사쓰마 파벌과의 대립으로 인해 외무대신직에서 사임했습니다.

사쓰마 파벌과의 대립으로 1897년 외무대신직에서 사임했습니다.

1898

[8대 총리 취임 및 일본 최초 정당 내각 수립]

헌정당을 창당하고 메이지 유신 이후 최초로 사쓰마·조슈 파벌이 아닌 총리대신(제8대)으로 취임, 일본 최초의 정당 내각을 수립했습니다.

1898년 6월 다시 헌정당을 창당하였고, 이어 메이지 유신 이후 정계를 지배하던 사쓰마파, 조슈파가 아닌 최초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는 일본 최초로 정당이 조직한 내각이었습니다. 그는 6월 30일에 제8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했습니다.

[제8대 내각총리대신 취임]

제8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했습니다.

1898년 6월 30일 제8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했습니다.

[내각 총사직과 총리 퇴임]

당내 파벌 다툼이 격심해져 헌정당이 해산되면서, 취임 4개월 만에 내각이 총사직하고 총리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당내의 파벌 다툼이 격심하여 헌정당은 해산되고, 4개월 만인 1898년 11월 8일에 내각은 총사직하며 총리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후 옛 헌정당에서 자신의 파벌이었던 진보당을 주체로 한 헌정본당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1899

[헌정본당 조직]

옛 헌정당의 파벌을 주체로 한 헌정본당을 이끌며 다시 정치적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내각 총사직 후, 옛 헌정당에서 자신의 파벌이었던 진보당을 주체로 한 헌정본당을 이끌며 정치적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07

[정계 은퇴와 와세다 대학 총장 취임]

정계를 은퇴하고 와세다 대학 총장에 취임하여 서유럽 문헌 번역 사업과 남극 탐험 사업 등을 추진했습니다.

1907년 정계를 은퇴하고 와세다 대학 총장에 취임하였습니다. 또한 서유럽의 문헌의 일본어 번역 사업, 남극탐험사업 등을 추진하며 학술과 탐험 분야에 기여했습니다.

1914

[정계 복귀]

정계에 복귀하여 야마모토 곤노효에의 뒤를 이어 다시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후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1914년 야마모토 곤노효에의 뒤를 이어 다시 총리가 되었습니다.

[17대 총리 취임과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17대 총리로 취임했습니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중국에 '21개조 요구'를 하는 등 제국주의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습니다.

1914년 야마모토 곤노효에의 뒤를 이어 다시 총리(제17대)로 취임하며 정계에 복귀했습니다. 이해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국 대륙에서의 독일 제국의 이권을 빼앗기 위해 8월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다음 해 외상 가토 다카아키와 함께 중화민국에 제국주의적인 21개조 요구를 하며 강경한 외교 정책을 펼쳤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총리 재임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독일 선전포고]

중국 대륙에서의 독일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중국 대륙에서의 독일 제국의 이권을 빼앗기 위해 8월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1915

[중화민국에 21개조 요구]

외상 가토 다카아키와 함께 중화민국에 제국주의적인 21개조 요구를 했습니다.

1915년 외상 가토 다카아키와 함께 중화민국에 제국주의적인 21개조 요구를 하며 강경한 외교 정책을 펼쳤습니다.

[후작 작위 수여]

총리 재임 중 후작 작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총리 재임 시 후작 작위를 받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1916

[독직사건으로 총리 사퇴 및 정계 은퇴]

내무상 오우라 마사다케의 독직사건으로 국민의 지지를 잃고 사퇴하며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했습니다.

내무상 오우라 마사다케의 독직사건이 일어나면서 국민의 지지를 잃고 1916년 10월에 사퇴하며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했습니다.

[제17대 내각총리대신 퇴임]

내무상 오우라 마사다케의 독직사건으로 국민의 지지를 잃고 제17대 내각총리대신 직에서 사퇴했습니다.

내무상 오우라 마사다케의 독직사건이 일어나면서 국민의 지지를 잃고 1916년 10월 9일에 사퇴하며 제17대 내각총리대신 직에서 물러났습니다.

1922

[사망과 국민장]

도쿄 와세다에서 사망했습니다. 그의 장례는 전례 없는 추모 인파 속에서 국민장으로 치러지며 국민적 존경을 받았습니다.

1922년 1월 10일 도쿄 와세다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는 국민으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영결식이 치러지던 히비야 공원에는 전례가 없이 가득 모인 추모 인파가 운구가 지나는 연도에도 동참하며 그를 추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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