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헵번
연표
1929
본명 오드리 캐슬린 러스턴으로, 벨기에 브뤼셀 익셀 지역 케이엔벨트 거리 48번지에서 태어났으며, 가족들 사이에서는 '아드리안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1935
부모는 1930년대 중반 영국 파시스트 연합을 후원했으나, 1935년 아버지는 가족을 떠나 더욱 극단적인 파시즘 활동에 몰두하며 헵번을 다시 찾지 않았다. 헵번은 이를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라 회고했다.
1937
아버지가 딸이 영국에서 교육받기를 원함에 따라, 헵번은 1937년 영국 켄트 지역 엘햄의 소규모 사립학교에 보내져 '오드리 러스턴' 또는 '리틀 오드리'라는 이름으로 교육을 받았다.
1938
1938년 오드리 헵번의 부모는 공식적으로 이혼했으며, 그녀는 이후 부모의 이혼이 자신의 삶에 끼친 영향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1939
1939년 9월, 영국이 독일에 전쟁을 선포하자 헵번의 어머니는 네덜란드가 중립을 유지할 것이라 믿고 딸과 함께 아른헴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헵번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아른헴 음악원(콘서버토리)에 다녔다.
1940
1940년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하자, 헵번은 영국식 이름이 점령 상황에서 위험하다고 여겨져 '에다 판 헤임스트라'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42
1942년 헵번의 외삼촌 오토 판 림뷔르흐 스티럼이 저항군의 사보타주 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군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 사건은 이전까지 나치즘에 어느 정도 동조했던 헵번 어머니의 태도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944
1944-45년 겨울, 네덜란드 대기근으로 인해 헵번 가족은 튤립 구근을 갈아 빵과 비스킷을 만들어 연명해야 했으며, 기근과 영양실조로 전쟁이 끝난 후 심각한 질병을 앓게 되었다.
1945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헵번은 어머니, 형제들과 함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네덜란드 발레계 거장 소냐 가스켈과 러시아 출신 교사 올가 타라소바에게 본격적인 발레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후 기근과 영양실조로 황달, 빈혈 등 심각한 질병을 앓던 헵번을 위해 1945년 10월 어머니가 도움을 요청, 암시장에서 담배를 팔아 페니실린을 구입하여 헵번의 생명을 구했다.
1948
1948년, 헵번은 찰스 판 더 린덴과 헨리 조셉슨이 제작한 교육용 여행 영화 《네덜란드어로 배우는 일곱 가지 수업》에서 비행기 승무원 역할로 출연하며 영화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1948년 말, 헵번은 런던 노팅힐의 발레 람베르에서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런던으로 이주했다. 생계를 위해 모델 활동을 병행했으며, 이때부터 성에서 '러스턴'을 제외하고 '오드리 헵번'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51
[《로마의 휴일》 스크린 테스트]
《로마의 휴일》 주연 캐스팅을 위한 스크린 테스트를 촬영하여 윌리엄 와일러 감독에게 보내졌다.
1951년 9월 18일, 감독 소로울드 디킨슨이 헵번의 스크린 테스트 영상을 제작하여 《로마의 휴일》을 준비 중이던 윌리엄 와일러 감독에게 보냈고, 와일러는 이에 감명받아 헵번을 주연으로 발탁하였다.
[브로드웨이 연극 《지지》 초연]
브로드웨이 연극 《지지》에서 주연을 맡아 연기력을 극찬받았으며, 시어터 월드 어워드를 수상했다.
1951년 11월 24일, 뉴욕 풀턴 극장에서 브로드웨이 연극 《지지》가 초연되었고, 헵번은 주연을 맡아 극찬을 받으며 시어터 월드 어워드를 수상했다. 이 연극은 1952년 5월 31일까지 219회 공연되었다.
1953
[《로마의 휴일》 개봉 및 스타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앤 공주 역을 맡아 첫 주연으로 출연, 전 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랐다.
1953년 개봉한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앤 공주 역을 맡아 첫 주연을 맡았으며, 이 작품의 흥행과 비평적 성공으로 오드리 헵번은 전 세계적인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다.
1953년 9월 7일, 헵번은 《타임》지 표지를 장식하며 대중의 큰 주목을 받았고, 이때부터 그녀의 독창적이고 세련된 패션 감각 또한 대중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1954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1954년 오드리 헵번은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의 뛰어난 연기로 제2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 골든글로브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과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도 함께 수상하며 연기자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
1954년, 헵번은 빌리 와일더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사브리나》에 출연해 부유한 형제들의 사랑을 받는 운전기사의 딸 '사브리나' 역을 연기했다.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같은 해 영국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54년, 헵번은 장 지로두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연극 《옹딘》에서 주연을 맡아 제8회 토니상 연극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는 그녀가 영화뿐만 아니라 연극 무대에서도 최고 수준의 연기력을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1954년 9월 25일, 헵번은 배우 그레고리 펙의 소개로 만난 배우 멜 페레와 스위스 뷔르겐슈토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연극 《옹딘》에 함께 출연하며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1955
1955년, 오드리 헵번은 새로운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12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세계가 사랑하는 영화배우'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배우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1959
1959년, 헵번은 영화 《파계》에서 루크 수녀 역을 맡아 깊이 있는 내면 연기를 선보였다.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되었으며, 1960년 제13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60
1960년 6월 17일, 오드리 헵번은 멜 페레와의 사이에서 첫 아들 숀 헵번 페러를 출산했다. 숀을 낳기 전 헵번은 두 차례 유산을 경험했다.
1961
[《티파니에서 아침을》 출연]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홀리 고라이틀리 역을 맡아 연기하며 패션 아이콘으로서의 이미지를 확고히 했다.
1961년, 헵번은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뉴욕의 여성 '홀리 고라이틀리' 역을 맡았다. 이 역할은 헵번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히며, 영화 속 검은 드레스는 20세기 패션의 상징이 되었다.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다시 올랐다.
1963
1963년, 헵번은 케리 그랜트와 함께 코믹 스릴러 영화 《셔레이드》에서 살해된 남편의 재산을 노리는 남성들에게 쫓기는 젊은 미망인 역을 연기했다. 이 작품으로 헵번은 1965년 제18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64
[《마이 페어 레이디》 초연]
뮤지컬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엘라이자 둘리틀 역으로 연기하며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였다.
1964년 10월, 조지 큐커 감독의 뮤지컬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가 초연되었다. 헵번의 엘라이자 둘리틀 역 캐스팅은 논란이 있었으나, 그녀의 연기는 비평가들로부터 '우아하고 매혹적이며 경력 중 최고의 연기'라는 찬사를 받았다.
1967
[《어두워질 때까지》 출연]
스릴러 영화 《어두워질 때까지》에서 시각장애 여성 역을 맡아 섬세한 연기를 선보이며 마지막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1967년, 헵번은 스릴러 영화 《어두워질 때까지》에서 공포에 시달리는 시각장애 여성 역을 연기하며 폭넓은 연기력을 선보였다. 이 작품으로 그녀는 생애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다.
1968
1954년 결혼했던 오드리 헵번과 멜 페레는 14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1968년 공식적으로 이혼했다. 멜 페레는 지나치게 통제적인 성향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69
1968년 지중해 크루즈 여행에서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1969년 1월 18일 결혼했다. 그녀는 다시 아이를 갖고 싶어 했으며 배우 활동도 줄일 계획이었다.
1970
1970년 2월 8일, 오드리 헵번은 안드레아 도티와의 사이에서 아들 루카 안드레아 도티를 낳았다. 그녀는 루카를 임신한 1969년에는 더욱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으며, 오랜 기간 안정을 취한 후 제왕절개로 출산했다.
1976
[《로빈과 마리안》으로 복귀]
영화 활동을 줄인 후, 숀 코너리와 함께 시대극 《로빈과 마리안》에 출연하며 연기 복귀를 시도했다.
1967년 이후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연기 활동을 점차 줄였던 헵번은 1976년, 숀 코너리가 로빈 후드 역을 맡은 시대극 《로빈과 마리안》에서 메이드 마리안 역으로 출연하며 복귀를 시도했다.
1980
1980년부터 오드리 헵번은 네덜란드 배우 로버트 월더스와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녀는 1989년 인터뷰에서 월더스와 함께한 9년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회고하며, '공식적이지 않을 뿐, 우리는 결혼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밝혔다.
1982
안드레아 도티와의 결혼 생활은 서로에게 충실하지 못했으며, 도티의 외도와 헵번의 관계가 알려지기도 했다. 결국 두 사람은 12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1982년 공식적으로 이혼했다.
1988
[유니세프 친선대사 활동 시작]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임명되어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 등 세계 곳곳의 가난한 나라에서 인도주의 활동을 시작했다.
오드리 헵번은 1954년부터 유니세프에 기여했으며,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의 가장 가난한 나라 공동체에서 직접 봉사하며 인도주의 활동에 헌신했다.
1989
[마지막 영화 유작]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영혼은 그대 곁에》에 천사 햅 역으로 카메오 출연하며 그녀의 마지막 영화 유작이 되었다.
1989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영혼은 그대 곁에》(원제: Always)에서 천사 햅 역으로 짧게 카메오 출연했다. 이 영화는 그녀의 생전 마지막 영화 출연 작품이 되었다.
1992
1992년 9월 말, 소말리아에서 인도주의 활동을 마치고 스위스로 돌아온 헵번은 심한 복부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이어진 검진에서 복부암이 진단되었다.
[복부암 진단 및 치료 시작]
미국에서 정밀 검사 후 희귀 복부암인 복막 가성점액종 진단을 받고 수술 및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1992년 11월 초, 로스앤젤레스에서 복강경 검사를 통해 복막 가성점액종이라는 희귀 복부암 진단을 받았다. 암은 소장에 전이된 상태였고, 헵번은 수술 후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1992년 12월, 오드리 헵번은 유니세프 친선대사로서 세계 각지에서 펼친 인도주의 활동을 인정받아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훈하는 영예를 안았다.
1993
1993년 1월 20일 저녁, 오드리 헵번은 스위스 보 주 토로셰나즈의 자택에서 복부암 투병 끝에 평온하게 잠든 채 생을 마감했다. 향년 63세였다.
[장례식 및 사후 수상]
스위스 토로셰나즈의 마을 교회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사후 에미상과 그래미상을 수상하며 업적을 인정받았다.
1993년 1월 24일, 오드리 헵번의 장례식은 그녀가 거주하던 스위스 토로셰나즈 마을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사후에도 그녀는 PBS 다큐멘터리 시리즈 《오드리 헵번과 함께하는 세계의 정원들》로 프라임타임 에미상 정보 부문 개인 업적상을, 낭독 음반 《오드리 헵번의 마법 같은 이야기들》로 그래미상 '아동 부문 최우수 낭독 앨범'을 수상하며 살아생전의 업적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