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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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사회사업가 영화/드라마 배우

- 할리우드 황금기의 전설적인 배우이자 사회사업가로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아역 배우로 시작해 성인 연기자로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두 차례 수상하며 뛰어난 연기력을 인정받았습니다.- 보라빛 눈동자와 관능적인 외모는 그녀의 상징으로, 미국 영화 연구소 선정 위대한 영화 스타 7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8번의 결혼생활과 건강 문제 등 개인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후천면역결핍증후군(AIDS) 퇴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회적 귀감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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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32

[엘리자베스 테일러 출생]

영국 런던 햄프스티드에서 미국인 부모 프랜시스 렌 테일러와 사라 비올라 웜브롯 사이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태어남과 동시에 영국 국적을 부여받았습니다.

엘리자베스 로즈먼드 테일러는 영국에 거주했던 미국인 부모 프랜시스 렌 테일러 (1897–1968)와 사라 비올라 웜브롯 (1895–1994) 사이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런던의 햄프스티드에서 태어났고, 당시 집은 런던 북서쪽 교외에 있는 햄프스티드 가든 서버브 지역의 8 와일드우드로였습니다. 테일러의 오빠인 하워드 테일러는 1929년 태어났습니다. 미국인이었지만 영국의 속지주의 국적법에 의해 영국에서 태어난 그녀에게는 자동으로 영국 국적이 함께 부여되었습니다.

1935

[발레 레슨 시작]

3세 때 바카니와 함께 발레 레슨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3세 때, 테일러는 바카니와 함께 발레 레슨을 받았습니다.

1939

[제2차 세계대전 피난을 위해 미국으로 귀국]

7세 때 가족들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미국으로 귀국하여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습니다.

7세 때 그녀의 가족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을 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1939년 그녀의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뉴욕으로 갔고, 그녀의 아버지는 런던에 남아서 사업을 마무리하고 11월 뉴욕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정착을 했는데, 그 곳은 당시 사라의 가족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1941

[유니버설 픽처스와 첫 계약]

메트로-골드윈-메이어(MGM)와 계약에 실패한 후, 유니버설 픽처스와 주급 100달러에 6개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메트로-골드윈-메이어(줄여서 MGM)는 곧 이 영국소녀에게 관심을 나타냈지만, 제작자인 존 콘시다인과 비공식적인 오디션을 본 후에 테일러가 노래를 잘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계약을 하는데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1941년 9월 18일 6개월 계약으로 주급 $100에 계약을 했습니다.

1942

[영화 데뷔작 《There's One Born Every Minute》 출연]

유니버설 픽처스에서 영화 《There's One Born Every Minute》에 데뷔하며 9살의 나이로 연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9살의 나이로 《''There's One Born Every Minute''》에 데뷔를 했고, 이것이 그녀의 유일한 유니버설 픽처스의 작품이었습니다. (추가: 10살 때인 1942년 《''There's One Born Every Minut''e》의 단역으로 영화 데뷔했습니다.)

1943

[MGM과 계약 및 《명견 랫시의 귀로》 출연]

유니버설 픽처스와의 계약 만료 후 메트로-골드윈-메이어(MGM)와 7년 계약을 맺고, 영화 《명견 랫시의 귀로》에 출연했습니다.

유니버설 픽처스와 계약을 통해 그녀는 《명견 랫시의 귀로》(''Lassie Come Home'')의 영화화를 위한 배역을 구하던 MGM과 7년 계약을 맺습니다.

1944

[《녹원의 천사》로 스타덤 등극]

12살에 찍은 MGM 영화 《녹원의 천사》에서 벨벳 브라운 역을 맡아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그녀의 삶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고, 이 영화로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그녀를 스타덤에 올려준 것은 12살 때 찍은 MGM의 영화 《녹원의 천사》(''National Velvet'')에서 맡은 벨벳 브라운 역으로, 그녀가 맡은 벨벳 브라운은 그랜드 내셔널에서 우승하기 위해 애마를 길들이는 소녀였습니다. 또한 이 영화는 믹키 루니와 영국의 신인 안젤라 랜스베리를 스타로 만들어주었으며, 1944년 12월 개봉이후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테일러의 삶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녀의 일생에서 발생된 많은 건강 문제들은 이때 《녹원의 천사》를 촬영하던 중 입은 척추 부상으로 야기된 것입니다.

1948

[첫 성인 연기 도전]

퀸매리호를 타고 영국으로 가서 영화 《공모자》를 찍었으며, 이 작품에서 최초로 성인 역을 맡아 연기 변신을 시도했습니다.

1948년 10월 퀸매리호를 타고 영국으로 가서 《공모자》(''Conspirator'')를 찍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최초로 성인 역을 맡았습니다.

1949

[아역 활동 마무리 및 성인 배우로 전환]

영화 《작은 아씨들》이 아역으로서의 마지막 배역이 되었고, 이어서 개봉한 《공모자》에서 성숙한 연기를 선보이며 성공적으로 성인 연기자로 전환했습니다.

아미의 역할을 한 《작은 아씨들 (1949년 영화)|작은 아씨들》(''Little Women'', 1949)은 그녀의 아역으로는 마지막 배역이었습니다. 1949년 《공모자》가 나오기 전에 《타임 (잡지)|타임》은 기사를 통해 그녀를 ‘엄청난 가치를 지닌 보석, 진정한 스타 사파이어’라고 찬사를 보냈으며, 헐리우드에서는 몽고메리 클리프트나 커크 더글라스 그리고 에바 가드너와 같은 차세대 스타로 손꼽았습니다. 그 영화는 박스오피스에서는 실패했지만, 남 몰래 공산주의 스파이와 결혼한 21살짜리 연기를 한 16살의 테일러는 비평가들 사이에서 성숙한 연기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1950

[콘래드 힐튼 주니어와 첫 결혼]

콘래드 힐튼 주니어와 결혼하며 첫 번째 결혼 생활을 시작했지만 이듬해 이혼했습니다.

콘래드 니키 힐튼(Conrad Hilton Jr.) (1950-1951)

[《신부의 아버지》로 박스오피스 성공]

로맨틱 코미디 영화 《신부의 아버지》에 출연하여 박스오피스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성인 연기자로서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박스오피스에서 성공한 최초의 작품은 로맨틱 코미디로 스펜서 트레이시와 조안 베넷과 호흡을 맞춰 케이 뱅크스역을 맡아 성인 연기를 한 1950년작 《신부의 아버지 (1950년 영화)|신부의 아버지》이었습니다.

1951

[《젊은이의 양지》로 연기 경력 전환점]

조지 스트븐스 감독의 영화 《젊은이의 양지》에 출연하여 비평가들에게 호평받았고, 그녀의 연기 경력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영화가 1951년 개봉되자, 테일러는 조지 이스트먼(클리프트)와 그의 가난하고 임신한 여공 앨리스 트립(셸리 윈터스) 사이에 끼어든 망가진 사교계 명사 안젤라 비커스의 연기로 환호를 받았습니다. 이 영화는 비평가들이 다음 50년 영화 역사를 통틀어 평판을 얻은 고전이라는 평과 같이 그녀의 연기 경력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뉴욕타임즈의 A.H. 웨일러는 "엘리자베스의 풍부하고, 아름다운 연기는 그녀의 경력에서 최고의 노력이다."라고 썼으며, 박스오피스 평론가들은 "테일러양은 아카데미상감이다."라고 언급했습니다.

1952

[마이클 와일딩과 결혼]

배우 마이클 와일딩과 재혼하며 두 번째 결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마이클 와일딩(Michael Wilding) (1952-1957)

1953

[첫 아들 마이클 하워드 와일딩 출산]

마이클 와일딩과의 사이에서 첫 아들 마이클 하워드 와일딩을 낳았습니다.

마이클 하워드 와일딩 (1953년 1월 6일)

1955

[둘째 아들 크리스토퍼 워드워드 와일딩 출산]

마이클 와일딩과의 사이에서 둘째 아들 크리스토퍼 워드워드 와일딩을 낳았습니다.

크리스토퍼 워드워드 와일딩 (1955년 2월 27일)

1956

[영화 《자이언트》 출연]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서사영화 《자이언트》에서 록 허드슨, 제임스 딘과 함께 주연을 맡으며 보다 중요한 역할을 소화했습니다.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1956년 서사영화 《자이언트 (1956년 영화)|자이언트》에서 록 허드슨이나 제임스 딘의 상대역으로 보다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이후 테일러는 4년 연속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됩니다.

1957

[마이크 토드와 세 번째 결혼]

마이클 와일딩과 이혼 후 마이크 토드와 세 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마이크 토드(Mike Todd) (1957-1958)

[《레인트리 카운티》 출연 및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

영화 《레인트리 카운티》에서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호흡을 맞추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1957년 《레인트리 카운티》에서는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상대역을 맡았고, 아카데미상 후보–여우주연상.

[딸 엘리자베스 프랜시스 리자 토드 출산]

마이크 토드와의 사이에서 딸 엘리자베스 프랜시스 리자 토드를 낳았습니다.

엘리자베스 프랜시스 리자 토드 (1957년 8월 6일)

1958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출연 및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

영화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에서 폴 뉴먼의 상대역으로 열연하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또다시 이름을 올렸습니다.

1958년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에서는 폴 뉴먼의 상대역으로, 아카데미상 후보–여우주연상.

1959

[에디 피셔와 네 번째 결혼]

에디 피셔와 결혼하며 네 번째 결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에디 피셔 (1959-1964)

[유대교로 개종]

크리스천 사이언스에서 유대교로 종교를 개종했습니다.

테일러는 1959년 크리스천 사이언스에서 유대교로 종교를 바꾸었습니다.

[《지난 여름 갑자기》 출연 및 골든 글로브상 수상]

영화 《지난 여름 갑자기》에 출연하여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골든 글로브상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1959년 《지난 여름 갑자기》에서는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캐서린 헵번 그리고 머시디스 매케임브리지와 호흡을 맞춰 연기를 했고, 아카데미상 후보–여우주연상. 1959년 골든 글로브상 여우주연상 (드라마 부문) 《지난 여름 갑자기》.

1960

[《버터필드 8》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첫 수상)]

당시 남편 에디 피셔와 함께 주연을 맡은 영화 《버터필드 8》로 생애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습니다.

1960년 《버터필드 8》에서는 당시 남편이었던 에디 피셔와 함께 주연을 맡았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1960년의 《버터필드 8》에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1961

[딸 마리아 버튼 입양]

딸 마리아 버튼을 입양하여 자녀가 4명이 되었습니다.

마리아 버튼 (1961년 8월 1일)

1964

[리처드 버턴과 다섯 번째 결혼]

에디 피셔와 이혼 후 리처드 버턴과 결혼하며 다섯 번째 결혼 생활을 시작했으며, 1974년 한 차례 이혼 후 1975년 다시 결혼하기도 했습니다.

리처드 버턴 (1964 ~ 1976 (1974년 한 차례 이혼했다가 1975년 다시 결혼했습니다.))

1966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두 번째 수상)]

당시 남편 리처드 버턴과 출연한 영화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서 마사 역으로 생애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1996년 테일러는 당시 남편 리처드 버턴과 함께 출연한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영화)|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서 마사 역으로 아카데미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생애 두 번째 아카데미상 수상을 했습니다. 1966년 영국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 하랴?》.

1971

[39세의 나이로 할머니가 됨]

39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할머니가 되었으며, 그녀의 임종 시 4명의 자녀들과 10명의 손자, 4명의 증손자가 곁을 지켰습니다.

1971년 테일러는 39세의 젊은 나이로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임종 시 4명의 자녀들과 10명의 손자, 4명의 증손자가 곁을 지켰습니다.

1972

[베를린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영화 《제인 대장장이》로 제22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은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다시 한번 인정받았습니다.

제인 대장장이''[[w:Hammersmith is Out|Hammersmith is Out]]'' || 지미 진 잭슨 ||[[여우주연상 은곰상]] at 22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1976

[존 워너와 일곱 번째 결혼]

리처드 버턴과 재결합 후 다시 이혼하고 존 워너와 결혼하며 일곱 번째 결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존 워너(John Warner) (1976-1982)

1991

[래리 포튼스키와 여덟 번째 결혼]

래리 포튼스키와 결혼하며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결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래리 포튼스키(Larry Fortensky) (1991 ~ 1996)

1992

[AIDS 활동으로 진 허숄트 박애상 수상]

수십 년간 후천면역결핍증후군(AIDS) 홍보 및 연구, 치료 지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공로로 진 허숄트 박애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녀는 또한 지병과 8번의 결혼생활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수십년 동안 활동해 온 사회사업가로서, 후천면역결핍증후군(AIDS) 홍보와 연구, 치료를 지원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목을 받았습니다. 1992년에는 AIDS와 싸우는 작품으로 진 허숄트 박애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2000

[대영 제국 훈장 수훈]

영국 여왕으로부터 대영 제국 훈장 2등급(DBE)을 수훈받아 '데임(Dame)' 작위를 받았습니다.

2000년 대영 제국 훈장 2등급(DBE, 작위급 훈장)

2004

[만성 심부전 진단]

만성 심부전을 앓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으며, 이후 심장 관련 건강 문제로 여러 차례 입원했습니다.

테일러는 말년에 여러 건강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2004년에는 만성 심부전을 앓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고, 2009년에는 심장판막 수술을 받았습니다.

2009

[심장판막 수술]

만성 심부전 증상으로 인해 심장판막 수술을 받았습니다.

2004년에는 만성 심부전을 앓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고, 2009년에는 심장판막 수술을 받았습니다.

2011

[심부전 치료를 위한 입원]

만성 심부전에 대한 새로운 증상으로 치료를 위해 세다스-시나이 메디컬 센터에 입원했습니다.

2011년 2월에는 만성 심부전에 대한 새로운 증상으로 치료를 위해 세다스-시나이 메디컬 센터에 입원을 했습니다.

[울혈성 심부전으로 사망]

로스앤젤레스 세다스-시나이 메디컬 센터에서 네 명의 자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79세를 일기로 울혈성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2011년 3월 23일 네 명의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심부전|울혈성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2011년 3월 23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세다스-시나이 메디컬 센터에서 네 명의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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