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너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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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부인, 인권 운동가, 외교관, 사회운동가 + 카테고리

엘리너 루스벨트는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영부인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활동적인 영부인 중 한 명입니다. 남편의 소아마비 발병 이후 정치적 활동을 시작했으며, 영부인 재임 중 전국 강연, 기자 회견, 글쓰기를 통해 인권과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습니다. 특히 유엔 인권 이사회 의장으로서 세계인권선언 작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여 인류 인권 증진에 크게 기여했으며, 사후에도 미국 최고의 대통령 배우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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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84

[엘리너 루스벨트 출생]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부인이자 미국의 가장 활동적인 영부인 중 한 명인 안나 엘리너 루스벨트가 뉴욕에서 태어났다.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자신의 인도주의적 활동으로 명성을 얻고 정치와 공동 분야에서 여성을 위한 역할 모델이 되었다. 그녀는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딸이다.

1892

[모친 사망]

어린 나이에 모친을 잃는 슬픔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외조모의 손에 길러지게 되었다.

어린 시절 수줍은 소녀였던 엘리너 루스벨트는 1892년 모친이 사망하고 2년 후 부친마저 사망하는 큰 손실을 경험하며 외조모의 손에서 자랐다.

1894

[부친 사망]

모친 사망 2년 후 부친마저 잃으면서 외조모의 손에서 길러지게 되었다.

어린 시절 수줍은 소녀였던 엘리너 루스벨트는 1892년 모친이 사망하고 2년 후 부친마저 사망하는 큰 손실을 경험하며 외조모의 손에서 자랐다.

1898

[런던 유학]

10대 시절 런던의 앨린스우드 아카데미에서 유학하며 마음을 터놓는 소중한 경험을 쌓았다.

엘리너는 10대 시절에 런던에 있는 앨린스우드 아카데미에 보내져 그녀의 마음을 터놓는 도움을 준 경험이 되었다.

1902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만남]

백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소개로 먼 친척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처음 만났다.

1902년 백부 시어도어의 소개로 먼 친척뻘인 프랭클린을 만났다. 촌수로 따지면 13촌 아저씨뻘이다.

1903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약혼]

미래의 미국 대통령이 될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약혼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1902년 프랭클린을 만난 후, 이듬해인 1903년에 약혼하였다.

1905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결혼]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정치적 파트너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들은 1903년 약혼을 하고 1905년 3월 17일 결혼하였다. 루스벨트 부부는 6명의 자녀를 두었다: 안나, 제임스, 프랭클린(유아기 때 사망), 엘리엇, 프랭클린 주니어와 존.

1916

[미국 적십자사 활동]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국 적십자사를 위해 일하며 공공 서비스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정치에서 성공을 이루면서 엘리너는 공공 서비스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 미국 적십자사를 위하여 일하였다.

1921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소아마비와 엘리너의 정치 활동 시작]

남편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소아마비에 걸리자, 그를 대신하여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하며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21년 프랭클린이 소아마비로 몸이 불편해지자, 엘리너는 그를 대신하여 정치적 활동을 시작하였다. 프랭클린의 뉴욕주 지사와 후에 대통령 재임 동안에 엘리너는 그를 위하여 진상 조사 여행을 자주 다녔다고 한다.

1925

[미국 국무부 국제외교행정특보비서관 임명]

미국 국무부 국제외교행정특보비서관직을 맡아 공직 생활을 경험했다.

1925년 12월 3일부터 1926년 2월 19일까지 미국 국무부 국제외교행정특보비서관으로 재직했다.

1933

[영부인으로서의 새로운 역할 시작]

남편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되자 영부인의 역할을 혁신적으로 바꾸며 적극적인 공적 활동을 펼쳤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1933년 대통령 임기를 시작할 때 엘리너 여사는 드라마적으로 영부인의 역할을 바꾸었다. 배경에 머물고 국내적 문제들을 다루는 데 만족하지 않고 전국적으로 강의, 350회의 기자 회견, 일간 신문 및 잡지 기고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또한 젊은이들과 소수 민족들을 위한 인권 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1942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군 방문]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군들을 방문하기 위해 전 세계를 순회하며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 미군들을 방문하러 세계를 순회하였다. 그녀는 1945년 4월 12일 프랭클린의 사망 때까지 영부인의 역할을 맡았다.

1945

[유엔 총회 사절단 임명]

남편 사망 후 공공 서비스 지속 계획이 없었으나,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유엔 총회 사절단으로 임명되어 활동을 재개했다.

남편의 사망에 이어 엘리너 여사는 기자 회견에서 자신이 공공적 서비스를 지속할 계획들이 없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엘리너 여사를 유엔 총회의 사절단으로 임명하여 그녀는 그 직에 1945년부터 1953년까지 지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사망]

남편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사망하며 12년간의 영부인 역할을 마쳤다.

그녀는 1945년 4월 12일 프랭클린의 사망 때까지 영부인의 역할을 맡았다.

1948

[세계인권선언 작성 주도]

유엔 인권 이사회 의장으로서 세계인권선언을 작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인류 역사에 큰 공헌을 했다.

엘리너 루스벨트는 유엔인권이사회의 의장이 되어 세계인권선언을 쓰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이를 자신의 거대한 성과로 여겼다. 그녀는 1945년부터 1953년까지 유엔 총회 사절단으로 활동했다.

1961

[유엔 미국 사절단 재임명 및 공직 복귀]

존 F.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유엔의 미국 사절단으로 재임명되었고, 미국 평화 봉사단 국가 안보 위원회 및 대통령 여성 지위 자문회의 의장직을 맡았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그녀를 유엔의 미국 사절단으로 재임명하였고, 후에 미국 평화 봉사단의 국가 안보 위원회와 대통령 여성 지위 자문회의 의장으로 임명하였다.

1962

[엘리너 루스벨트 사망]

78세의 나이로 재생불량성빈혈, 결핵,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고, 하이드파크 가족 사유지에 안장되었다.

1962년 11월 7일 78세의 나이에 재생불량성빈혈, 결핵과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 사후 그는 하이드파크에 있는 가족 사유지에 안장되었다. 장애가 있던 남편을 적극적으로 내조하면서 오랜 기간 대통령 배우자 자격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으며, 남편의 서거로 백악관을 떠난 이후에도 사회운동을 지속했기에 오늘날 미국의 역사에 그녀는 꽤나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현재도 돌리 매디슨과 함께 미국 역사상 최고의 대통령 배우자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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