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턴 FC

num_of_likes 105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축구 클럽, 스포츠 구단 축구 구단

에버턴 FC는 1878년에 창단되어 잉글랜드 풋볼 리그 원년 멤버로 참여한 유서 깊은 축구 클럽입니다. '블루스'라는 애칭처럼 파란 유니폼으로 상징되며, 9번의 리그 우승과 5번의 FA컵 우승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전설적인 스트라이커 딕시 딘의 활약과 1985년 유럽 대회 우승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지역 라이벌 리버풀과의 '머지사이드 더비'는 열정적인 승부로 유명하며, 2025년 새로운 홈구장인 힐 디킨슨 스타디움으로의 이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878

[에버턴 FC 창단]

세인트 도밍고스 교구 감리 교회 신자들을 중심으로 크리켓 팀이 창단된 후, 축구 구단인 세인트 도밍고스 FC가 결성되며 에버턴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축구를 통해 신자들의 활동을 장려하려는 취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878년, 세인트 도밍고스 교회는 여름철에만 활동 가능한 크리켓 팀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축구 구단을 창설했습니다. 이 구단이 바로 세인트 도밍고스 FC이며, 이는 오늘날 에버턴 FC의 모태가 됩니다. 구단은 빠르게 성장하며 지역 사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1879

[구단 명칭 '에버턴 FC'로 변경]

세인트 도밍고스 FC는 교회 신자 외 일반인의 참여를 허용하면서, 구단 명칭을 인접 지역명을 따라 '에버턴 FC'로 변경하여 더 넓은 팬층을 포용하게 됩니다.

창단 1년 후, 세인트 도밍고스 FC는 교회 외부의 사람들에게도 문을 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었고, 구단은 인접한 에버턴 지역의 이름을 따 '에버턴 FC'로 명칭을 바꾸며 지역 클럽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1888

[풋볼 리그 원년 멤버 참여]

잉글랜드 축구 리그인 '풋볼 리그'가 창설될 때, 에버턴 FC는 그 역사적인 첫걸음을 함께하는 원년 멤버로 참여하며 잉글랜드 축구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됩니다.

에버턴 FC는 1888년 창설된 잉글랜드 프로 축구의 근간인 풋볼 리그의 원년 멤버로 합류했습니다. 이는 클럽의 위상과 잉글랜드 축구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리그의 초창기부터 참여하며 경쟁력을 입증했습니다.

1891

[첫 리그 우승 달성]

풋볼 리그 창설 3년 만인 1890-91 시즌, 에버턴은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잉글랜드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루며 강력한 팀으로 부상합니다.

풋볼 리그의 창설 멤버로 참여한 에버턴은 빠르게 전력을 다듬어 1890-91 시즌, 마침내 구단 역사상 첫 1부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습니다. 이는 클럽이 잉글랜드 축구계의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잠재력을 입증한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1892

[구디슨 파크로 홈 구장 이전]

안필드를 떠난 에버턴은 스탠리 파크 북측에 위치한 '구디슨 파크'로 홈 구장을 이전합니다. 구디슨 파크는 잉글랜드 최초의 축구 전용 구장으로, 에버턴의 오랜 상징이자 역사의 산실이 됩니다.

안필드에서 나와 새로운 홈 구장을 물색하던 에버턴은 1892년, 구디슨 파크를 건설하고 이전했습니다. 구디슨 파크는 완공과 동시에 잉글랜드 최초의 축구 전용 구장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으며, 이는 에버턴이 더욱 전문적인 축구 클럽으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후 수많은 역사적인 순간들이 구디슨 파크에서 펼쳐졌습니다.

[안필드에서의 마지막 경기 및 리버풀 FC 창단 계기]

구장 임대료 갈등으로 에버턴은 홈구장이었던 안필드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치르고, 당시 에버턴 회장이었던 존 호울딩은 이 사태를 계기로 리버풀 FC를 창단하게 됩니다. 이는 오늘날 '머지사이드 더비'의 시작점이 됩니다.

존 호울딩은 안필드의 소유주이자 에버턴의 회장이었으나, 임대료 인상과 구장 운영 방식을 두고 이사회와 마찰을 빚었습니다. 결국 에버턴은 안필드를 떠나게 되었고, 호울딩은 새로운 클럽인 리버풀 FC를 창단했습니다. 1892년 4월 18일, 볼턴 원더러스와의 경기가 에버턴이 안필드에서 치른 마지막 경기였으며, 이 분열은 두 클럽 간의 치열한 라이벌 관계인 '머지사이드 더비'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1901

[상징적인 감청색 유니폼 첫 착용]

에버턴의 상징적인 '감청색' 유니폼이 1901-02 시즌에 처음으로 착용됩니다. 이는 클럽의 대표 색상이 되었고, '블루스(The Blues)'라는 애칭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창단 이후 여러 유니폼을 입었던 에버턴은 1901-02 시즌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감청색 유니폼을 처음으로 도입했습니다. 이 색상은 에버턴의 정체성을 상징하게 되었고, 팬들 사이에서 '블루스'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가끔 색상 톤의 변화가 있었지만, 감청색은 에버턴의 대표 색상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습니다.

1906

[첫 FA컵 우승]

에버턴은 1905-06 시즌 FA컵 결승전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꺾고 구단 역사상 첫 FA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립니다.

창단 이후 여러 차례 FA컵 결승에 진출했으나 준우승에 머물렀던 에버턴은 1905-06 시즌, 마침내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승리하며 감격적인 첫 FA컵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 우승은 클럽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1915

[24년 만의 두 번째 리그 우승]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리그가 취소될 위기 속에서 진행된 1914-15 시즌, 에버턴은 치열한 경쟁 끝에 24년 만에 두 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합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치러진 1914-15 시즌, 에버턴은 올덤 애슬레틱과의 접전 끝에 1점 차로 앞서며 리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 우승은 1891년 첫 우승 이후 24년 만의 쾌거로, 전쟁 중에도 강팀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1925

[전설적인 딕시 딘 영입]

에버턴은 이웃 팀 트랜미어 로버스에서 전설적인 스트라이커 '딕시 딘'을 영입하며 클럽의 '딕시 딘 시대'를 열게 됩니다. 그는 데뷔전에서 2골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1925년, 에버턴은 당시 유망주였던 딕시 딘을 영입했습니다. 딕시 딘은 이적 후 첫 시즌부터 38경기 32골을 기록하는 등 놀라운 득점력을 선보이며 에버턴의 공격을 이끄는 핵심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영입은 에버턴의 새로운 전성기를 예고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1928

[딕시 딘의 리그 60골 대기록 및 3번째 리그 우승]

딕시 딘은 1927-28 시즌, 단 29경기에서 무려 60골이라는 경이로운 리그 최다골 기록을 세우며 에버턴의 세 번째 리그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이 기록은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으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1927-28 시즌은 딕시 딘의 전설이 확립된 해였습니다. 그는 단일 시즌 리그 29경기 출전 만에 60골을 폭발시키며 잉글랜드 1부 리그 역대 개인 최다골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의 압도적인 득점력에 힘입어 에버턴은 통산 세 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딕시 딘은 구단과 잉글랜드 축구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 기록은 현대 축구에서도 깨지기 어려운 금자탑으로 남아있습니다.

1933

[4번째 리그 우승 및 2번째 FA컵 우승]

2부 리그로 강등되는 아픔을 겪었으나 딕시 딘의 활약으로 한 시즌 만에 승격한 에버턴은 1932-33 시즌에 4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맨체스터 시티를 꺾고 통산 두 번째 FA컵 우승을 달성하며 '더블'을 기록합니다.

2부 리그 강등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지만, 딕시 딘의 압도적인 득점력(37경기 39골)으로 단 한 시즌 만에 1부 리그로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1932-33 시즌, 승격팀임에도 불구하고 딕시 딘의 45골에 힘입어 4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같은 해 FA컵에서도 맨체스터 시티를 물리치고 두 번째 FA컵 우승을 차지하며 구단의 저력을 다시 한번 증명했습니다. 이때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등번호가 도입되었고, 딕시 딘은 9번을 달고 출전했습니다.

1937

[딕시 딘 시대의 마무리]

에버턴의 전설적인 스트라이커 딕시 딘이 1937년 에버턴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치르며, 그의 눈부셨던 '딕시 딘 시대'가 막을 내립니다.

에버턴에서 1925년부터 1937년까지 활약하며 수많은 기록을 세우고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딕시 딘이 마지막 경기를 치르고 팀을 떠났습니다. 그의 은퇴는 에버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의 시대가 저물었음을 의미했습니다.

1938

[새로운 구단 엠블럼 디자인]

운영진 비서 테오 켈리가 에버턴의 상징인 루퍼트 왕자 탑, 월계관, 그리고 'Nil Satis Nisi Optimum(최고가 아니면 안 된다)'이라는 라틴어 문구를 포함한 새로운 구단 엠블럼을 디자인했습니다.

1937-38 시즌이 끝난 후, 테오 켈리는 에버턴 지역의 상징인 루퍼트 왕자 탑과 승리를 의미하는 월계관, 그리고 구단의 정신을 담은 라틴어 슬로건 'Nil Satis Nisi Optimum'을 결합한 새로운 엠블럼을 디자인했습니다. 이 엠블럼은 1938-39 시즌부터 클럽 관련 의류에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현재까지 에버턴의 중요한 상징으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1939

[5번째 리그 우승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황금기 마무리]

1938-39 시즌, 19세의 어린 타미 로튼이 34골을 기록하며 팀의 5번째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인해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에버턴의 첫 번째 황금기가 마무리됩니다.

1938-39 시즌은 에버턴이 딕시 딘 시대 이후 젊은 선수들을 앞세워 다시 한번 리그 우승(5번째)을 차지하며 황금기를 맞이하는 듯 보였습니다. 특히 타미 로튼의 활약이 눈부셨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발발한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리그가 중단되면서, 클럽의 상승세는 꺾였고, 이는 에버턴의 첫 번째 황금기가 예상치 못하게 막을 내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48

[구디슨 파크 최다 관중 기록]

구디슨 파크에서 열린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에버턴 역사상 최다 홈 관중인 78,299명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테일러 리포트 이후 전 좌석 경기장으로 바뀌면서 깨지지 않는 대기록으로 남았습니다.

1948년 9월 18일, 구디슨 파크에서 열린 라이벌 리버풀과의 머지사이드 더비는 에버턴 역사상 가장 많은 관중이 운집한 경기로 기록되었습니다. 무려 78,299명의 관중이 경기장을 찾아 뜨거운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이후 테일러 리포트의 권고에 따라 모든 축구장이 전 좌석 경기장으로 전환되면서, 구디슨 파크의 수용 인원이 감소하여 이 기록은 영원히 깨지지 않는 클럽의 전설적인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1951

[두 번째 2부 리그 강등]

전쟁 후 황금기를 이끌던 주역들이 떠나고 재정난과 감독 능력 부재로 인해, 에버턴은 1950-51 시즌에 구단 역사상 두 번째 2부 리그 강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에버턴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주요 선수들이 팀을 떠나고, 클리프 브릿튼 감독 체제에서 재정난과 부진한 성적이 겹치면서 1950-51 시즌에 2부 리그로 강등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는 클럽 역사상 두 번째 강등으로, 어려운 시기를 예고했습니다.

1955

[4시즌 만의 1부 리그 복귀]

3시즌 동안 2부 리그에 머물던 에버턴은 1954-55 시즌 마지막 날 극적으로 2위를 차지하며, 4시즌 만에 1부 리그로의 복귀를 확정 짓습니다.

1951년 2부 리그로 강등된 후 3시즌 동안 승격에 실패했던 에버턴은 1954-55 시즌 마지막 라운드에서 2위를 확보하며 마침내 1부 리그로 복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승격은 클럽의 재건을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되었으며, 다시 한번 잉글랜드 최상위 리그에서 경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1961

[해리 케터릭 감독 부임 및 두 번째 황금기 시작]

과거 에버턴 선수였던 해리 케터릭이 감독으로 부임하며 에버턴의 '두 번째 황금기'가 시작됩니다. 그의 체계적인 축구 전술은 과거의 '스쿨 오브 사이언스'라는 별칭을 다시 얻게 했습니다.

1961년, 과거 에버턴의 센터포워드였던 해리 케터릭이 감독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1920년대 에버턴의 전통적인 축구 방식에 체계적인 접근법을 도입하며 팀을 재건했습니다. 이로 인해 에버턴은 '스쿨 오브 사이언스'라는 별칭을 다시 얻게 되었고, 1960년대 클럽의 최전성기, 즉 '두 번째 황금기'를 이끌었습니다.

1963

[24년 만의 6번째 리그 우승]

해리 케터릭 감독 지휘 아래 1962-63 시즌, 로이 버논과 알렉스 영의 뛰어난 활약으로 에버턴은 24년 만에 6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합니다.

해리 케터릭 감독의 지휘 아래 1962-63 시즌, 에버턴은 로이 버논과 알렉스 영이 총 46골을 합작하는 강력한 공격력을 바탕으로 24년 만에 통산 6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했습니다. 이는 에버턴의 두 번째 황금기를 본격적으로 알리는 중요한 우승이었습니다.

1966

[FA컵 대역전승으로 3번째 우승]

에버턴은 FA컵 결승에서 셰필드 웬즈데이에게 0-2로 뒤지고 있던 경기를 3-2로 대역전승하며 3번째 FA컵 우승을 기록합니다.

1966년 FA컵 결승전에서 에버턴은 셰필드 웬즈데이에게 0-2로 뒤지며 패색이 짙었으나, 놀라운 집중력과 투지로 3-2 대역전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극적인 승리로 에버턴은 통산 3번째 FA컵 우승을 차지하며 팬들에게 잊지 못할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1970

[조 로일 활약으로 7번째 리그 우승]

1969-70 시즌, 조 로일의 활약과 케터릭 감독의 토탈 풋볼 전술을 앞세워 라이벌 리즈 유나이티드를 9점 차로 따돌리고 에버턴의 7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합니다.

1969-70 시즌, 에버턴은 조 로일, 브라이언 라본, 하워드 켄달, 앨런 볼, 콜린 하비 등 공격수들이 주축이 된 토탈 풋볼 전술을 구사하며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라이벌 리즈 유나이티드를 9점 차로 제치고 통산 7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이는 팬들에게 '최고의 공격 스쿼드'로 회자되는 황금기의 정점을 찍은 순간이었습니다.

1974

[해리 케터릭 감독 사임 및 두 번째 황금기 종료]

팀 성적 부진과 건강 악화로 인해 해리 케터릭 감독이 사임하며, 에버턴의 찬란했던 '두 번째 황금기'가 아쉽게 막을 내립니다.

1961년부터 팀을 이끌며 두 차례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일궈낸 해리 케터릭 감독은 1970년대 초반 팀 성적의 급격한 하락과 본인의 건강 악화로 인해 1974년 감독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의 사임은 에버턴의 '스쿨 오브 사이언스'로 불렸던 영광스러운 두 번째 황금기가 마무리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1977

[빌리 빙엄 감독 사임과 고든 리 감독 부임]

빌리 빙엄 감독이 리그 컵 결승에서 애스턴 빌라에 패배한 후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고든 리가 후임으로 부임하며 새로운 변화를 모색합니다.

해리 케터릭 감독 이후 부임한 빌리 빙엄 감독은 첫 시즌 4위를 기록하며 기대를 모았으나, 이후 중위권을 맴돌았습니다. 특히 1977년 리그 컵 결승에서 애스턴 빌라에 패배한 후 감독직을 사임했으며, 그 자리는 고든 리가 이어받아 팀의 분위기 전환을 꾀했습니다.

1980

[전설 딕시 딘 사망]

에버턴의 역대 최다 득점자이자 전설적인 스트라이커인 딕시 딘이 구디슨 파크에서 라이벌 리버풀과의 머지사이드 더비를 관람하던 중 사망합니다.

에버턴의 상징이자 잉글랜드 축구의 위대한 전설로 기억되는 딕시 딘이 1980년, 자신의 홈구장인 구디슨 파크에서 리버풀과의 머지사이드 더비를 관전하던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사망 소식은 축구계에 큰 충격을 안겼으며, 팬들에게 깊은 슬픔을 주었습니다.

1981

[고든 리 감독 사임 및 하워드 켄달 감독 부임]

고든 리 감독이 2부 리그 강등 위기를 겨우 넘긴 후 성적 부진으로 사임하고, 과거 '스쿨 오브 사이언스'의 일원이었던 하워드 켄달이 감독으로 부임하며 팀의 재건을 이끌게 됩니다.

고든 리 감독은 팀을 상위권으로 끌어올리려 노력했으나, 당시 최전성기였던 리버풀에 밀리고 1981년에는 강등권까지 내몰리자 결국 성적 부진으로 사임했습니다. 이후 에버턴의 레전드 선수이자 해리 케터릭 감독 시절 '스쿨 오브 사이언스'의 주축이었던 하워드 켄달이 감독으로 부임하며 클럽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1982

[리버풀에게 0-5 대패]

하워드 켄달 감독 체제에서 에버턴은 홈에서 라이벌 리버풀에게 0-5로 치욕적인 대패를 당하며 팀의 고전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하워드 켄달 감독이 부임 초기 팀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1982년 11월 6일, 에버턴은 홈 구디슨 파크에서 라이벌 리버풀에게 0-5라는 충격적인 대패를 당했습니다. 이 경기는 당시 에버턴의 어려운 상황과 리버풀의 전성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아있습니다.

1984

[18년 만의 FA컵 우승으로 위기 극복]

리그 컵 결승에서 리버풀에게 패배하며 해임 위기에 몰렸던 하워드 켄달 감독은 왓포드를 꺾고 18년 만에 FA컵 우승을 차지하며 감독으로서의 위기를 극복합니다.

1983-84 시즌, 에버턴은 리그에서 부진했고 리그 컵 결승에서도 라이벌 리버풀에 패배하며 하워드 켄달 감독이 해임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FA컵 결승에서 왓포드를 꺾고 18년 만에 FA컵 우승을 차지하며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고, 이는 켄달 감독이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우승은 1966년 이후 에버턴의 세 번째 FA컵 우승이었습니다.

1985

[8번째 리그 우승 및 유일한 유럽 대회 우승 (UEFA 컵 위너스 컵)]

하워드 켄달 감독 지휘 아래 에버턴은 마침내 8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하고, UEFA 컵 위너스 컵에서 우승하며 구단 역사상 처음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유럽 대회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립니다.

1984-85 시즌은 에버턴 역사상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팀은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통산 8번째 잉글랜드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또한, UEFA 컵 위너스 컵 결승에서 오스트리아의 SK 라피트 빈을 꺾고 우승하며 클럽 역사상 처음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유럽 대항전 트로피를 획득했습니다. 특히 준결승에서 독일의 강호 바이에른 뮌헨을 꺾은 경기는 구디슨 파크 최고의 명승부로 회자됩니다. 이 시즌의 성공은 에버턴의 국제적인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헤이젤 참사 여파로 유럽대회 출전 금지]

리버풀 팬들이 일으킨 '헤이젤 참사'로 인해 잉글랜드 모든 축구 클럽이 5년간 유럽 대회 출전 금지 징계를 받게 되면서, 에버턴은 유럽에서의 추가적인 성공 기회를 아쉽게 놓치게 됩니다.

1985년 5월,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리버풀 팬들이 일으킨 '헤이젤 참사'로 인해 잉글랜드 모든 축구 클럽은 5년 동안 유럽 대회 출전 금지라는 중징계를 받았습니다.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유럽 무대에서 더 큰 성공을 꿈꾸던 에버턴에게는 큰 타격이었고, 추가적인 유럽 대회 우승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습니다.

1986

[FA컵 머지사이드 더비 결승 준우승]

FA컵 결승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머지사이드 더비'가 성사되지만, 에버턴은 라이벌 리버풀에게 역전패하며 아쉽게 준우승에 그칩니다.

1985-86 시즌 FA컵 결승전은 역사상 최초로 에버턴과 리버풀의 '머지사이드 더비'로 치러졌습니다. 에버턴은 라이벌과의 결승전에서 승리하여 트로피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리버풀에게 역전패를 당하며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이는 같은 시즌 리그 우승도 리버풀에 내주며 뼈아픈 시즌으로 기록되었습니다.

1987

[9번째 리그 우승 (마지막 리그 우승 기록)]

에버턴은 라이벌 리버풀과의 치열한 리그 우승 경쟁 끝에 9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영광을 재현합니다. 이는 에버턴의 마지막 리그 우승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1986-87 시즌, 에버턴은 다시 한번 리버풀과의 치열한 리그 우승 경쟁을 펼쳤고, 이번에는 에버턴이 승리하며 통산 9번째 잉글랜드 1부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습니다. 이 우승은 현재까지 에버턴의 마지막 리그 우승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하워드 켄달 감독의 위대한 업적을 다시 한번 증명했습니다. 하지만 이 우승 직후 켄달 감독이 스페인으로 떠나면서 팀은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1988

[잉글랜드 최고 이적료로 토니 코티 영입]

에버턴은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로부터 23세의 어린 스트라이커 토니 코티를 200만 파운드에 영입하며, 당시 잉글랜드 클럽 중 최고 이적료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하워드 켄달 감독이 떠난 후 콜린 하비 감독 체제였던 1988년, 에버턴은 팀의 공격력을 강화하기 위해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의 토니 코티를 200만 파운드에 영입했습니다. 이는 당시 잉글랜드 축구 클럽이 지불한 이적료 중 최고 기록이었으며, 코티는 에버턴의 공격을 이끄는 중요한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1990

[콜린 하비 감독 해임 및 하워드 켄달 감독 재부임]

1990-91 시즌 초반 선두를 달리다 10월 경 5위로 떨어진 콜린 하비 감독이 해임되고, 하워드 켄달이 다시 감독으로 복귀하며 팀의 재도약을 꿈꿨습니다.

콜린 하비 감독이 이끌던 에버턴은 1990-91 시즌 초반 선두를 달리며 기대를 모았으나, 10월에 급격히 순위가 하락하며 감독직에서 해임되었습니다. 이후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하워드 켄달이 다시 감독으로 복귀하여 침체된 팀 분위기를 쇄신하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 했습니다.

1992

[프리미어리그 창립 멤버 합류]

잉글랜드의 풋볼 리그가 '프리미어리그'로 재탄생하며, 에버턴은 새로운 시대의 창립 멤버로 참가하게 됩니다.

1992년, 잉글랜드 축구의 최상위 리그가 '풋볼 리그 1부'에서 '프리미어리그'로 재편되었습니다. 에버턴은 이 새로운 리그의 창립 멤버로 합류하며 잉글랜드 축구의 새로운 시대를 함께 열었습니다. 비록 초기에는 중위권 성적에 머물렀지만, 명문 클럽으로서의 위상을 지켰습니다.

1994

[극적인 프리미어리그 잔류]

하워드 켄달 감독이 세 번째 임기 중 사임하고, 강등 위기에 처했던 에버턴은 마지막 날 윔블던 FC를 상대로 0-2에서 3-2로 역전승을 거두며 극적으로 프리미어리그 잔류에 성공합니다.

하워드 켄달 감독이 1993-94 시즌 도중 사임한 후, 마이크 워커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으나 팀은 강등권으로 추락했습니다. 40년 만에 2부 리그 강등 위기에 몰렸던 에버턴은 시즌 마지막 날, 윔블던 FC와의 경기에서 0-2로 뒤지다 3-2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간신히 프리미어리그에 잔류했습니다. 이 경기는 클럽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로 기억됩니다.

[마이크 워커 감독 해고 및 조 로일 감독 부임]

마이크 워커 감독이 부임 1년 만에 해고되고, 과거 에버턴의 주역 중 한 명이었던 조 로일이 후임으로 부임하며 팀의 반전을 꾀합니다.

프리미어리그 잔류에 성공했음에도 팀의 부진이 계속되자, 마이크 워커 감독은 1994년 11월, 부임 1년 만에 해고되었습니다. 그 후, 1970년대 에버턴의 핵심 선수였던 조 로일이 감독으로 부임하며 침체된 팀의 분위기를 바꾸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려 했습니다. 로일 감독은 강등권 싸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수단 보강에 힘썼습니다.

1995

[5번째 FA컵 우승 (마지막 주요 우승 트로피)]

조 로일 감독 지휘 아래 FA컵 결승에서 당대 최강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꺾고 통산 5번째 FA컵 우승을 차지합니다. 이는 현재까지 에버턴의 마지막 주요 우승 트로피로 남아있습니다.

조 로일 감독이 이끌던 에버턴은 1995년 FA컵 결승전에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당시 프리미어리그 최강팀이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꺾는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승리로 에버턴은 통산 5번째 FA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으며, 이는 현재까지 클럽의 마지막 주요 우승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우승은 침체기에 빠져 있던 클럽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클럽 최고 이적료로 안드레이 칸첼스키스 영입]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부터 당시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오른쪽 날개로 평가받던 안드레이 칸첼스키스를 5백만 파운드에 영입하며 팀 역사상 최고 이적료를 경신합니다.

1995-96 시즌, 에버턴은 FA컵 우승의 기세를 이어가기 위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던 안드레이 칸첼스키스를 5백만 파운드에 영입했습니다. 이는 당시 클럽 역사상 최고 이적료 기록이었으며, 칸첼스키스는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오른쪽 날개로 평가받으며 에버턴의 공격력 강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998

[하워드 켄달 감독 3차 해임 및 월터 스미스 감독 부임]

하워드 켄달 감독이 세 번째 부임에서도 강등권을 면치 못하고 한 시즌 만에 해임되며, 구단은 심각한 재정난에 빠집니다. 이후 레인저스 FC를 성공적으로 이끈 월터 스미스가 새 감독으로 임명됩니다.

1997-98 시즌, 세 번째로 에버턴 감독으로 부임한 하워드 켄달은 팀을 강등권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했고, 볼턴 원더러스에 골득실에서 앞서 겨우 잔류한 후 한 시즌 만에 다시 해임되었습니다. 이 시기 에버턴은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했으며, 레인저스 FC에서 성공을 거둔 월터 스미스가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하며 위기 극복을 시도했습니다.

2000

['에버턴 자이언트' 제도 수립]

에버턴은 구단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선수들을 기리기 위해 '에버턴 자이언트(Everton Giant)' 제도를 처음으로 수립하고, 매 시즌 새로운 인물을 발표하며 클럽의 유산을 기념하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 이후, 에버턴은 클럽의 위대한 역사를 만들고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선수들을 기리기 위해 '에버턴 자이언트'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매 시즌 시작할 때마다 이 명단에 새로운 인물을 추가하며 클럽의 영웅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업적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딕시 딘, 하워드 켄달 등 수많은 레전드들이 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2002

[월터 스미스 감독 해임 및 데이비드 모예스 감독 부임]

심각한 강등 위기에 처한 에버턴은 월터 스미스 감독을 해임하고, 프레스턴 노스 엔드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데이비드 모예스를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하며 팀의 전환점을 마련합니다.

2001-02 시즌, 에버턴은 심각한 강등 위기에 직면하며 월터 스미스 감독을 해임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클럽은 프레스턴 노스 엔드를 3부 리그에서 2부 리그로 승격시킨 데이비드 모예스를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했습니다. 모예스 감독은 부임 직후 팀을 강등에서 구해냈으며, 이후 오랫동안 에버턴을 안정적으로 이끌며 '유럽 대항전의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2003

[웨인 루니의 최연소 득점 및 아스널 무패행진 저지]

유스 출신인 웨인 루니가 아스널을 상대로 결승골을 기록하며 아스널의 30경기 무패 행진을 깨뜨리고,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최연소 득점자로 등극하며 전국적인 명성을 얻습니다.

데이비드 모예스 감독 부임 후 2002-03 시즌, 에버턴 유스에서 성장한 16세의 웨인 루니가 혜성처럼 등장했습니다. 그는 아스널을 상대로 결승골을 터뜨려 아스널의 30경기 무패 행진을 중단시켰고, 이와 동시에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최연소 득점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루니에게 전국적인 명성을 안겨주었으며, 에버턴 팬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었습니다.

[창단 125주년 기념 '최고의 스쿼드' 발표]

구단 창단 1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서포터들의 투표를 통해 '에버턴 역사상 가장 훌륭했던 스쿼드'를 발표하며 클럽의 전설들을 기렸습니다.

2003-04 시즌을 앞두고 에버턴은 구단 창단 125주년을 기념하여 특별한 이벤트를 진행했습니다. 팬들의 투표를 통해 클럽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들로 구성된 '최고의 스쿼드'를 선정하여 발표했습니다. 네빌 사우스올, 딕시 딘, 앨런 볼 등 각 시대의 스타들이 이름을 올렸으며, 이는 팬들에게 클럽의 풍부한 역사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4

[웨인 루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

에버턴의 유스 출신이자 팀의 핵심 선수였던 웨인 루니를 2,700만 파운드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시키며 팀은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2004년 8월, 에버턴은 팀의 미래이자 스타 플레이어였던 웨인 루니를 2,700만 파운드(한화 약 450억 원)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시켰습니다. 이는 당시 클럽 역사상 최고 이적료 수입이었으나, 팀의 간판 선수를 떠나보낸 팬들에게는 아쉬움이 큰 결정이었습니다. 루니의 이적은 에버턴의 전력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2005

[34년 만의 챔피언스리그 진출]

데이비드 모예스 감독 지휘 아래 2004-05 시즌, 에버턴은 라이벌 리버풀을 제치고 리그 4위에 올라 34년 만에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룹니다.

웨인 루니의 이적 후 약체로 분류되던 에버턴은 데이비드 모예스 감독의 지도력 아래 2004-05 시즌 놀라운 선전을 펼쳤습니다. 지역 라이벌 리버풀을 제치고 프리미어리그 4위를 차지하며 34년 만에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획득했습니다. 이는 '헤이젤 참사'로 인해 출전 기회를 잃었던 아픔을 딛고 이룬 값진 성과였으며, 클럽의 새로운 영광을 알리는 순간이었습니다.

2008

[구단 최고 이적료로 마루안 펠라이니 영입 및 주니어 유니폼 스폰서 삭제]

벨기에의 마루안 펠라이니를 1500만 파운드에 영입하며 구단 역대 최고 이적료를 경신합니다. 이 시즌, 주니어 유니폼에 스폰서 이름을 삭제한 첫 프리미어리그 팀이 됩니다.

2008-09 시즌, 에버턴은 벨기에의 스탕다르 리에주에서 활약하던 미드필더 마루안 펠라이니를 1500만 파운드에 영입하며 구단 역사상 최고 이적료 기록을 다시 썼습니다. 또한 이 시즌, 에버턴은 아동용 주니어 레플리카 유니폼에서 주류 스폰서의 이름을 삭제한 첫 프리미어리그 팀이 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2009

[FA컵 결승 진출 및 준우승]

14년 만에 FA컵 결승에 진출했지만 첼시에 패해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2008-09 시즌, 에버턴은 데이비드 모예스 감독 지휘 아래 14년 만에 FA컵 결승에 진출하는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결승전에서 첼시에 아쉽게 패배하며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비록 우승컵은 들지 못했지만, 클럽의 저력을 다시 한번 보여준 중요한 시즌이었습니다.

2013

[유니폼 제조업체 엄브로로 변경]

에버턴의 유니폼 제조업체가 나이키에서 엄브로로 변경됩니다. 엄브로는 클럽의 전통적인 디자인 요소를 반영한 새로운 유니폼을 선보였습니다.

2013-14 시즌부터 에버턴의 유니폼 제조업체가 나이키에서 엄브로로 변경되었습니다. 엄브로는 에버턴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는 디자인을 선보이며 팬들의 기대를 모았습니다. 이 변화는 클럽의 시각적 정체성에도 영향을 미 미쳤습니다.

2014

[로멜루 루카쿠 완전 영입 및 구단 최고 이적료 기록]

임대 선수였던 벨기에 공격수 로멜루 루카쿠를 첼시 FC로부터 2800만 파운드에 완전 영입하며 구단 역대 최고 이적료 기록을 세웠습니다. 루카쿠는 에버턴의 핵심 공격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2013-14 시즌 첼시에서 임대되어 에버턴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로멜루 루카쿠를 2014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2800만 파운드에 완전 영입했습니다. 이는 당시 클럽 역사상 가장 높은 이적료였으며, 루카쿠는 이후 몇 시즌 동안 에버턴의 주포로 활약하며 팀 공격을 이끌었습니다.

2025

[새 홈 구장 힐 디킨슨 스타디움으로 이전 예정]

에버턴은 오랜 홈 구장이었던 구디슨 파크를 떠나, 리버풀 복스홀 브램리무어항에 위치한 52,769석 규모의 최신식 '힐 디킨슨 스타디움'으로 홈 구장을 이전했습니다. 이는 클럽의 새로운 시대를 열 것으로 기대됩니다.

1892년부터 130년 넘게 에버턴의 홈 구장이었던 구디슨 파크 시대를 마무리하고, 2025년 리버풀 복스홀 브램리무어항에 건설된 52,769석 규모의 힐 디킨슨 스타디움으로 이전했습니다. 이 새로운 구장은 클럽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투자이자, 팬들에게 현대적인 관전 환경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되며, 에버턴의 새로운 역사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입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에버턴 FC
+ 사건추가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