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페론
연표
1919
[에바 페론 탄생]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주 로스톨도스에서 농장주 후안 두아르테와 후아나 이바르구렌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그녀를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데 페론, 본명 에바 마리아 이바르구렌이 부에노스아이레스주 로스톨도스의 농장에서 부유한 농장주인 후안 두아르테와 그의 정부인 후아나 이바르구렌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후안 두아르테는 정식 부인이 따로 있었고, 후아나와의 사이에서 난 에바 및 다른 딸들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1934
[부에노스아이레스 이주 및 연예 활동 시작]
15살에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옮겨 연예계 진출을 시도, 모델, 연극배우, 영화배우, 라디오 성우 등으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에바는 15살인 1934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옮겨 연예계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처음에는 모델로 활동하다가, 연극배우, 영화배우, 라디오 성우 등으로 차츰 이름을 알렸습니다.
1940
1940년 경부터 유명 연예인이 되었고, 라디오 방송국을 소유하는 등 경제적으로도 크게 성공했습니다.
1944
[후안 페론과의 운명적 만남]
산후안 지진 피해 구호를 위한 기금 마련 행사에서 당시 노동부 장관이던 후안 페론과 처음 만나 연인이 되었습니다.
1944년, 산후안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6천명 이상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육군 대령 출신으로 당시 정부의 노동부 장관이던 후안 페론은 이재민 구호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려고 했으며, 이때 에바 두아르테와 후안 페론은 처음 만났습니다. 첫 번째 부인을 잃고 독신으로 살던 후안 페론은 에바 두아르테의 젊음과 미모에 빠져들었으며, 두 사람은 곧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1945
후안 페론과 에바 두아르테는 1945년 정식으로 결혼했으며, 그 다음해 대통령 선거를 준비했습니다.
1946
[영부인으로서의 활동 시작 및 '에비타' 애칭 획득]
남편 후안 페론이 대통령에 취임하며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대중적 인기를 얻었고, 정부 내 공식 직책 없이 실질적인 보건부 장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에바는 남편의 선거 유세 자리에 동행하며 대중으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불린 것도 이 무렵부터입니다. 후안 페론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 1946년 6월 정식으로 취임했습니다. 에바는 정부 내에서 공식적인 직책에 오른 적은 없으나, 노동자 및 하층민들에게 후한 정책을 펼칠 수 있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며 사실상의 보건부 장관 자리에 있었습니다.
1947
[유럽 순방 및 국제적 활동]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스페인 아동 구호 활동을 펼치고 프랑스에 식량 지원을 약속하는 등 국제적 영향력을 과시했습니다.
1947년에는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하였으며, 대통령인 남편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스페인에서는 가난한 아동들에게 구호 활동을 펼쳤고, 프랑스에서는 샤를 드 골을 만나 식량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여성 운동과 자선 재단 설립]
정의당 분파인 여성 페론당을 결성해 여성 참정권 도입에 기여하고,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하여 학교, 병원 건립 등 자선사업을 펼쳐 민중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정의당의 분파인 여성 페론당을 결성하여 그 대표로 있었으며, 이를 통하여 여성 참정권 도입 등의 여성 운동에 기여하였습니다. 그리고 노동단체, 기업 등의 헌금으로 운영되는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하여 그 대표를 겸했습니다. 에바 페론 재단의 기금은 학교, 병원, 양로원 등을 건립하고 각종 자선사업을 하는 데 쓰여지며 민중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상류층 및 군부와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50
차츰 그의 개혁에 대한 모순이 드러나는 가운데, 그는 1950년, 자궁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1951
건강이 차츰 악화되어 가는 가운데, 1951년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군부는 부통령 지명을 철회하도록 강요하여, 10월 부통령 후보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1952
[33세의 나이로 사망]
남편의 두 번째 임기 시작 전 '영적 지도자' 자리에 올랐으나, 33세의 젊은 나이에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은 재선에 성공했으나, 에바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갔습니다. 그 다음해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되기 전에 남편은 그를 '영적 지도자'의 자리에 올렸습니다. 그러면서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위해 자신의 병마를 이를 악물고 숨겨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암은 상태가 더욱 악화돼, 1952년 7월 26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1955
[후안 페론 축출 및 시신 은닉]
사망 이후 후안 페론이 쿠데타로 축출되자, 새 정부는 페론주의의 상징인 에바의 시신을 이탈리아로 빼돌려 은닉했습니다.
개혁의 결함으로 인하여 남편은 정치적 궁지에 몰렸으며, 결국 1955년 쿠데타로 축출되었습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새 정부에서 먼저 한 일은 페론주의의 상징인 그를 아르헨티나 정계에서 몰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방부 처리되어 있던 그의 시신을 은닉하여 이탈리아로 빼돌렸습니다.
1971
1971년 시신은 스페인에 망명중이던 후안 페론측에 인도되었습니다.
1975
[시신 아르헨티나 송환 및 안치]
후안 페론의 다음 부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이 된 후 시신이 아르헨티나로 송환되어 대통령궁에 안치되었습니다.
1975년 후안 페론의 다음 부인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이 된 후 아르헨티나로 송환하여 대통령궁에 안치하였습니다.
1976
[최종 안장]
다시 쿠데타가 발생하여 군사정권이 유해를 제거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 레콜레타 구역의 두아르테 가족묘지에 최종 안장되었습니다.
다시 쿠데타가 일어난 후 군사정권은 유해를 제거했으며, 유해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레콜레타 구역의 공동묘지의 두아르테 가족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1978
[뮤지컬 에비타 초연]
1978년 영국 에서 초연되었으며 삽입곡 'Don't cry for me Argentina'(아르헨티나여, 날 위해 울지 말아요)가 널리 알려져 있는 에비타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곡을 쓰고 팀 라이스가 가사를 쓴 뮤지컬로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었던 후안 페론과 그 부인이었던 에바 페론이 권력을 잡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