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난 코르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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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난 코르테스
콩키스타도르, 탐험가, 정복자, 스페인 제국 건설자, 귀족 + 카테고리

1. 16세기 초 아스텍 제국을 정복 오늘날 멕시코 본토를 스페인 식민지로 만든 정복자. 2.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화 초기 단계를 이끈 개척자 중 한 명. 3. 과감한 항명과 뛰어난 전략으로 거대한 제국을 무너뜨린 인물. 4. 논쟁적인 행적으로 인해 악당과 영웅으로 평가가 극명하게 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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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485

[에르난 코르테스 출생]

스페인 카스티야 왕국 메데인에서 하급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코르테스는 훗날 신세계를 정복하며 역사의 주인공이 될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카스티야 왕국의 하급 귀족 마르틴 코르테스 데 몬로이와 카탈리나 피사로 알타미라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외가를 통해 잉카 제국을 정복한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6촌 지간입니다. 어릴 적에는 병약했지만 총명했습니다.

1499

[살라망카에서 라틴어 수학]

14세에 살라망카의 삼촌에게 보내져 2년간 라틴어를 공부했습니다.이 경험은 훗날 그의 법률 지식 기반을 다져, 무단 원정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근대 역사학자들은 그가 살라망카 대학교에 다녔다고 오해하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삼촌에게서 사적으로 교육받은 것입니다. 살라망카에서의 학습은 그가 바야돌리드와 히스파니올라섬에서 공증인으로 일하는 데 필요한 법 지식을 제공했습니다.

1504

[신세계 히스파니올라 이주]

신세계 발견 소식에 매료된 코르테스는 먼 친척의 도움으로 히스파니올라섬으로 건너가 식민 개척의 첫발을 내딛습니다.이는 그의 야망이 광활한 신대륙에서 펼쳐질 서막이었습니다.

원래는 친척인 히스파니올라 도독 니콜라스 데 오반도의 연줄로 신세계에 가려 했으나 부상으로 계획이 무산되었습니다. 이후 스페인 남부 지방을 떠돌다 마침내 1504년, 히스파니올라 도독부의 수도 산토도밍고에 상륙하여 식민 개척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수아데콤포스텔라읍의 공증인으로 임명되고 원주민을 부릴 수 있는 엔코미엔다 권리도 받았습니다.

1506

[쿠바 정복 참여 및 노예 획득]

쿠바 정복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운 코르테스는 막대한 땅과 수많은 인디언 노예를 상으로 받으며 신세계에서의 입지를 단단히 다졌습니다.그의 부와 권력 기반이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히스파니올라 식민지 정착에 착실히 기여한 코르테스는 1506년 쿠바 정복에 참여하여 원정대장으로부터 큰 토지와 많은 인디언 노예를 받았습니다.

1511

[쿠바 원정 동행 및 회계관 임명]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쿠바 원정에 동행하여 회계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식민지 수익의 5분의 1을 국왕에게 상납하는 것을 감독하며 벨라스케스의 지배권 확보를 도왔습니다.

벨라스케스는 코르테스를 서기관으로 임명했고, 코르테스는 산티아고의 알칼데(시장)로 두 차례 임명되는 등 쿠바의 유력 자산가로 성장했습니다.

1518

[제3차 본토 원정대 총대장 임명]

미주대륙 본토에서 엄청난 금은 노다지가 터졌다는 소식에, 쿠바 도독 벨라스케스는 코르테스를 제3차 본토 원정대 총대장으로 임명합니다.코르테스의 인생을 바꿀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1518년, 벨라스케스가 오늘날 멕시코 방면으로 두 차례 보낸 원정대(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후안 데 그리할바 지휘)를 코르테스는 모두 놓쳤습니다. 그러나 제2차 원정대가 금은 발견 소식을 전하자, 벨라스케스는 코르테스를 원정 총대장으로 임명하며 본토 식민 개척을 돕도록 했습니다.

1519

[도독 명령 불복종 및 멕시코 원정 강행]

쿠바 도독 벨라스케스가 마지막 순간 원정대장 지휘권을 박탈하려 하자, 코르테스는 이를 명백히 무시하고 멕시코를 향해 출항합니다.이 과감한 항명은 그의 역사적인 정복을 시작하는 대담한 첫걸음이었습니다.

코르테스는 행정 경험, 이전 원정의 지식, 그리고 뛰어난 설득력으로 한 달 만에 배 6척과 병력 300명을 모았습니다. 벨라스케스의 시기심으로 인한 지휘권 박탈 시도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는 트리니다드에 기항하여 병사와 군마를 추가 모집, 총 배 11척, 병력 500명(노예 포함), 말 13필, 캐넌포 몇 문을 이끌고 유카탄반도로 향했습니다.

[스페인 왕령 식민지 수립 선포 및 첸틀라 전투 승리]

유카탄 반도에 상륙한 코르테스는 합스부르크 스페인 왕령 식민지 수립을 선포하고, 포톤찬 원주민과의 첸틀라 전투에서 승리하며 멕시코 정복의 불씨를 당겼습니다.승리 후 원주민에게서 선물 받은 여성 중 '라 말린체'는 그의 통역사이자 현지처가 되어 정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상륙 직후 난파되어 마야인들에게 잡혀 있다 탈출한 수도승 게로니모 데 아길라르를 만나 통역 도움을 받았습니다. 첸틀라 전투 승리 후, 코르테스에게 바쳐진 20명의 여성 중 촌탈 마야어와 나우아틀어에 능통한 라 말린체가 포함되어, 아길라르와 함께 이중 통역 시스템을 구축하여 아스텍인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아스텍 지방관과 접선]

부활절 날, 코르테스는 산후안데울루아에서 아스텍 제국의 황제 모테크소마 2세의 지방관들과 첫 대면을 가졌습니다.이는 아스텍 문명과의 본격적인 대결을 예고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모테크소마 2세의 지방관들과의 접선은 멕시코 본토 진입의 중요 발판이 되었습니다.

[베라크루스 점령 및 함대 자침]

코르테스는 베라크루스를 점령하며 쿠바 도독의 권위를 완전히 부정하고, 국왕 카를로스 1세의 직접 명령 계통에 속한다고 주장합니다.더 이상 후퇴할 수 없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해 자신이 타고 온 배 11척을 모두 자침시키는 충격적인 결단을 내립니다.

베라크루스 점령은 코르테스가 쿠바 도독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권한을 행사하려는 명백한 행동이었습니다. 함대 자침은 병사들에게 오직 전진만이 살길이라는 메시지를 주어 배수의 진을 치게 만들었습니다.

[아스텍 수도 테노치티틀란으로 행군 시작]

100명의 병력만 베라크루스에 남겨둔 채, 코르테스는 600명의 보병, 15기의 기병, 15문의 캐넌포, 그리고 수백 명의 원주민 동맹군을 이끌고 아스텍 제국의 심장부, 테노치티틀란을 향한 대담한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모테크소마 2세가 여러 차례 면담 요청을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으로의 진격을 강행했습니다. 그는 도중에 만나는 토토낙, 틀락스칼텍 등 다양한 원주민 부족들과 동맹을 맺으며 군세를 키웠습니다.

[촐롤란 학살 감행]

코르테스는 1,000여 명의 틀락스칼란 동맹군을 이끌고 촐롤란으로 진군, 비무장 상태의 수천 명 귀족을 학살하고 도시 일부를 불태웠습니다.이는 아스텍인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심어주고, 동맹 부족들의 배신을 막기 위한 잔혹한 경고였습니다.

중앙멕시코 제2의 도시 촐롤란에서 벌어진 이 학살은 코르테스의 무자비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으로, 그의 정복 과정에서 논란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틀락스칼란과의 세 차례 전투]

테노치티틀란으로 향하던 중, 코르테스군은 오토미와 틀락스칼란 부족과 세 차례 격렬한 전투를 벌였습니다.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는 포로를 풀어주며 평화의 뜻을 전했고, 결국 이들을 아스텍의 적으로 인식시켜 강력한 동맹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합니다.

1519년 9월 2일부터 5일 사이에 벌어진 전투에서 코르테스군은 사방에서 포위되어 압도적인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코르테스의 전략과 평화 제스처에 감명받은 티차틀란과 오코텔롤코 틀라토아니는 이방인과 편을 먹는 것이 이득이라 판단, 전투 중단을 설득하여 동맹을 맺었습니다.

[테노치티틀란 평화로운 입성]

아스텍의 황제 모테크소마 2세는 코르테스 일행을 평화롭게 수도 테노치티틀란으로 맞아들였습니다.이는 훗날 제국 멸망의 씨앗이 될 치명적인 환대였습니다.

모테크소마는 스페인인들의 약점을 파악해 훗날 짓밟으려는 심산으로 이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에스파냐인들에게 후하게 황금을 주었으나, 이는 오히려 이들의 탐욕에 불을 붙였습니다. 해안가에서 아스텍인에게 스페인인이 살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코르테스는 모테크소마를 인질로 삼아 궁전에 가두고 간접 통제를 시작했습니다.

1520

[나르바에스 격파 및 군세 흡수]

코르테스 토벌을 위해 쿠바 도독이 파견한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의 1,100명 대군이 멕시코에 상륙하자, 코르테스는 단 200명만 테노치티틀란에 남겨둔 채 해안으로 나아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나르바에스를 격파하고 그의 병력을 자신의 군세로 흡수하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코르테스는 뛰어난 지략으로 자신을 체포하러 온 쿠바군을 오히려 자신의 세력으로 편입시키는 놀라운 역량을 발휘했습니다. 이 승리로 그의 군세는 한층 강력해졌습니다.

[오툼바 전투 승리]

비통한 밤의 패퇴 이후, 코르테스군은 1대 30이라는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극복하고 아스텍 추격군을 격파하는 오툼바 전투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둡니다.이 승리는 코르테스군의 전멸을 막고 전세를 역전시킬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오툼바 전투에서 승리하며 코르테스군은 간신히 동맹 원주민인 틀락스칼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는 그의 군사적 역량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쿠바의 증원군과 동맹 원주민의 도움으로 군세를 회복하여 테노치티틀란에 대한 재정복을 준비할 수 있게 했습니다.

[비통한 밤, 테노치티틀란 탈출]

테노치티틀란에서 부관 페드로 데 알바라도의 학살로 인해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자, 코르테스는 괴뢰였던 모테크소마 2세의 사망(또는 살해)과 함께 적의 압도적인 수에 밀려 수도를 버리고 탈출하는 처절한 '비통한 밤'을 겪습니다.이 과정에서 병사 수백 명과 약탈했던 보물, 대포까지 잃었습니다.

쿠바군과의 전투 후 귀환한 코르테스는 이미 반란이 극에 달한 상황을 마주했습니다. 간접 통제의 수단이었던 모테크소마가 사망하자, 에스파냐군은 틀라코판 방죽길을 따라 필사적으로 탈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후위를 지키던 병사들은 아스텍인에게 살해되었고, 코르테스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1521

[비야파나의 음모 적발 및 처형]

테노치티틀란 공성전이 진행되던 중, 안토니오 데 비야파나가 코르테스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교수형에 처해집니다.이는 코르테스가 내부의 적에게도 얼마나 단호했는지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코르테스 주변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와 그에 대한 위협을 드러냈습니다.

[아스텍 제국 멸망 및 테노치티틀란 함락]

맹렬한 공성전 끝에 아스텍 제국의 마지막 황제 쿠아우테목이 사로잡히고, 수도 테노치티틀란은 파괴됩니다.이로써 아스텍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스페인 제국의 거대한 식민지 '누에바에스파냐'의 시대가 열립니다.이는 세계사적 전환점이 되는 사건입니다.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으로 향하는 보급선을 끊고 아스텍의 동맹시들을 하나씩 제압하는 소모전을 펼쳤습니다. 스페인인과 동맹 원주민의 힘으로 테노치티틀란 공성전은 스페인인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코르테스는 아스텍 영토를 스페인 왕령으로 선포하고 테노치티틀란을 멕시코시티로 개칭했습니다. 그는 1521년부터 1524년까지 자칭 도독으로서 멕시코를 다스렸습니다.

1522

[첫 부인 카탈리나 수아레스 의문사]

코르테스의 첫 부인 카탈리나 수아레스가 수상한 정황 속에 사망합니다.이 사건은 코르테스의 악명을 더하고, 당대에도 그가 아내를 살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광범위한 수사가 진행되었던 추문입니다.

코르테스와 카탈리나의 결혼 관계는 코르테스가 벨라스케스 도독에게 항명하면서 매우 어색해진 상태였습니다. 카탈리나는 코르테스의 신분 상승에 더 이상 매력이 없었고, 부부 사이에 아이도 없었습니다. 여러 원주민 현지처 사이에서 자녀를 둔 코르테스는 불임이 아니었음이 확실했기에, 카탈리나의 죽음은 더욱 의혹을 키웠습니다. 수사 결과가 명확히 발표되지 않은 채 침묵 속에 사건이 묻히면서, 코르테스의 영향력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음을 시사했습니다.

1524

[온두라스 원정]

코르테스는 쿠바 도독 벨라스케스의 부하로 온두라스에서 할거하는 크리스토발 데 올리드를 정리하기 위해 직접 원정을 떠납니다.이 원정 중 그는 반란을 염려하여 함께 데려간 아스텍의 마지막 황제 쿠아우테목을 처형합니다.

코르테스는 올리드를 격파하고 벨라스케스의 체포령까지 발부했으나, 이는 카스티야 본국과 서인도 참사회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그는 국왕에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다섯 번째 보고서를 보내 '폐하의 눈을 막고 있는 다양한 강력한 경쟁자와 적들'을 비난했습니다.

1525

[스페인 왕실로부터 문장 하사]

스페인 왕실은 벨라스케스의 항명 주장이 아닌 코르테스의 손을 들어주며, 그의 위대한 멕시코 정복 업적을 기리는 문장을 하사합니다.이 문장은 그의 공로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왕실은 문장 하사증을 통해 코르테스가 겪은 노고와 위험, 모험에 경의를 표하며 그의 무훈이 영구히 기념될 것임을 밝혔습니다. 문장은 쌍두 흑수리(신성로마제국), 금사자(멕시코 정복), 세 개의 금관(세 명의 원주민 황제), 물 위의 도시(테노치티틀란)를 담고 있으며, 방패 둘레의 일곱 얼굴은 정복된 도시국가와 사슬에 묶인 그 군주들을 의미합니다.

1526

[제1대 누에바에스파냐 도독 공식 취임]

아스텍 정복 이후 자칭 도독으로 멕시코를 다스리던 코르테스는 왕실로부터 제1대 누에바에스파냐 도독으로 공식 임명되었습니다.그러나 그의 권한은 왕실이 파견한 사찰단에 의해 제한됩니다.

카를로스 1세는 코르테스를 도독, 총대장, 수석법관으로 임명했으나, 동시에 네 명의 왕실 관리를 파견하여 그의 업무를 '보좌'하게 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코르테스의 권력 남용을 감시하기 위한 사찰단으로, 코르테스는 이 처사에 낭패감을 느꼈습니다. 이 짧은 재임 기간은 그의 공식 직위가 얼마나 불안정했는지 보여줍니다.

1527

[도독직 정직 및 정무 배제]

온두라스에서 귀환한 코르테스는 왕실 판무관에게 도독직을 정직당합니다.이후 후임 도독 두 명이 연달아 의문사하자, 코르테스는 독살 혐의를 받고 모든 정무에서 배제되는 위기에 처합니다.

코르테스는 '아스텍인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내 조국의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 더 힘들다'고 토로할 정도로 왕실과 정적들의 견제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에스트라다 도독이 코르테스에게 추방령을 내리면서 그는 본국으로 향하게 됩니다.

1528

[제1차 본국 소환 및 탄원]

온갖 비난과 소송에 직면한 코르테스는 스페인 본국으로 돌아가 주군 카를로스 1세에게 직접 자신의 억울함을 탄원합니다.그는 왕에게 바쳐야 할 황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를 벗고, 오히려 더 많은 황금을 바쳤음을 증명했습니다.

코르테스는 정적들의 고발에 조목조목 반박하며, 멕시코 정복이 오로지 자신 혼자 이룬 업적임을 강조하고 무너진 테노치티틀란을 멕시코시티로 재건하느라 노력하고 있음을 부각시켰습니다.

1529

[오아하카계곡 후작 작위 수여 및 재혼]

카를로스 1세는 코르테스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에게 '돈' 칭호와 함께 누에바에스파냐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인 오아하카계곡 후작 작위를 수여합니다.그는 23개 영구 엔코미엔다에 봉신 23,000명을 거느리게 됩니다.이와 함께 에스파냐 상급 귀족 도냐 후아나 데 수니가와 재혼하여 명문가와의 연결을 꾀합니다.

비록 작위와 봉읍을 받았지만, 코르테스는 정작 중요한 도독 자리에는 재임용되지 못했으며, 이후로도 누에바에스파냐 행정의 주요 직위에는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의 재혼은 스페인 본국에서의 신분 상승과 가문 재건을 위한 시도였습니다. 그는 후아나와의 사이에서 1남 3녀의 적자를 두었으며, 특히 적장남의 이름도 서장남과 같은 마르틴으로 지었습니다.

1530

[멕시코 귀환 및 태평양 탐사 주력]

줄어든 권력과 함께 멕시코로 돌아온 코르테스는 반란 의심과 첫 부인 살해 혐의 등 여러 소송에 직면합니다.그는 쿠에르나바카에 궁전을 짓고 은퇴하여 태평양 탐사에 주력하는 등 새로운 활동에 몰두합니다.

코르테스는 여전히 군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1535년 초대 부왕 안토니오 데 멘도사가 민정을 총괄하면서 민군 양정의 알력이 생겨났고, 그의 사업은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그는 첫 부인 살해 혐의 수사가 비밀리에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 식민정부는 그에 대한 유무죄를 명시하지 않고 침묵하여 그의 막강한 영향력을 시사했습니다.

1534

[은광 여러 개 발견]

코르테스는 숨팡고델리오에서 여러 개의 은광을 발견했습니다.1540년대 초에는 술테펙, 탁스코, 사쿠알판 등지에서 총 35개의 은광을 소유하게 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합니다.

은광 소유는 그의 재력을 더욱 증대시켰습니다.

1536

[바하칼리포르니아반도 발견]

코르테스는 멕시코 북서부를 탐사하여 바하칼리포르니아반도를 발견했습니다.이는 그의 마지막 대규모 탐험 원정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멕시코 태평양 연안을 답사하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1539

[캘리포니아만 발견]

코르테스의 명령으로 프란시스코 데 울로아가 캘리포니아만을 발견했으며, 이 만은 한동안 '코르테스만'으로 불렸습니다.이는 그의 탐험가로서의 명성을 드높인 업적입니다.

캘리포니아만의 발견은 스페인의 새로운 영토 확장과 탐험 역사에 중요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1541

[제2차 본국 소환 및 알제리 원정 참여]

캘리포니아반도 탐사가 끝난 후 코르테스는 에스파냐 본국으로 귀환하지만, 채무와 권력 남용 소송으로 인해 냉대 받습니다.그는 카를로스 1세에게 직접 알제리 원정 참여를 간청하여 안드레아 도리아가 지휘하는 함대에 탑승, 그의 마지막 군 경력을 쌓습니다.

본국에서 그는 거의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무시당했습니다. 한때 카를로스 1세의 마차에 뛰어올라 '폐하께서 열성조들께 물려받으신 모든 도시들보다 더 큰 영토를 폐하께 바친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알제리 원정 중 폭풍으로 익사할 뻔하는 등 불운을 겪었습니다.

1544

[왕실에 연금 주청]

사비를 써가며 여러 차례 탐사원정을 했던 코르테스는 말년에 큰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결국 왕실 내탕금으로 자신에게 연금을 달라고 주청하며 마지막까지 자신의 공로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3년 동안 왕실로부터 아무런 대답이 없자 코르테스는 왕실에 넌더리가 나 멕시코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1547

[사망 및 유골 수난사 시작]

말년에 엄청난 빚을 지고 이질과 흉막염에 시달리던 코르테스는 62세의 나이로 세비야에서 사망합니다.그의 유언에 따라 사생아들을 적자로 인정받았으나, 그의 시신은 훗날 8번에 걸쳐 이장되는 기구한 운명을 겪습니다.

그는 교황에게 요청해 라 말린체의 아들 마르틴 코르테스 엘 메스티소를 포함한 네 명의 사생아를 적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사망 후, 그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약 10년간 수도원이 지어지지 않아 유해가 여러 차례 옮겨졌습니다. 1629년에는 마지막 남자 후계자가 사망하자 유골이 부왕궁에 방치되기도 했으며, 멕시코 독립 후에는 훼손 위기에 처해 숨겨지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1946년 재발견되어 원래 있던 자리에 재매장되었으나, 히스패닉 전통 지지자와 원주민 전통 지지자 간의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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