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 뭉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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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 뭉크
화가, 판화가, 표현주의 예술가 + 카테고리

표현주의의 선구자 에드바르 뭉크는 죽음, 질병, 공포라는 개인적 비극을 인류 보편의 실존적 서사로 승화시킨 위대한 예술가입니다. 노르웨이의 우울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그는 파리와 베를린을 무대로 현대 미술의 지형을 뒤흔드는 파격적인 작품들을 쏟아냈습니다. 세기의 걸작 '절규'를 포함한 그의 작품들은 인간 영혼의 심연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현대인의 내면을 대변하는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80년의 생애 동안 겪은 사랑의 상처와 정신적 위기를 예술로 치유하며 그가 남긴 방대한 유산은 오늘날 현대 미술의 영원한 영감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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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63

[예술적 영혼의 탄생]

노르웨이의 아달스브루크에 위치한 작은 농가에서 에드바르 뭉크가 태어납니다. 화가 야코브 뭉크와 역사학자 페테르 안드레아스 뭉크를 친척으로 둔 예술적이고 지적인 가문이었습니다.

뭉크는 의사였던 아버지 크리스티안 뭉크와 어머니 라우라 카트린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노르웨이 지성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경제적으로는 그리 풍족하지 못한 환경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허약했던 뭉크는 집안의 종교적이고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며 내면의 세계를 키워나갔습니다.

1868

[어머니의 비극적 죽음]

뭉크가 고작 5세이던 해에 어머니 라우라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 상실은 어린 뭉크에게 죽음이라는 근원적인 공포를 심어주는 첫 번째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는 극도로 종교적인 광신에 빠져들었으며, 이는 어린 자녀들에게 정신적인 압박으로 작용했습니다.
이모 카렌이 집안 살림을 맡아 뭉크의 예술적 재능을 격려해주었으나, 어머니의 빈자리는 영원한 슬픔으로 남았습니다.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뭉크가 죽음과 가족의 상실을 주제로 한 많은 작품을 남기는 직접적인 배경이 됩니다.

1877

[누나 소피에의 상실]

가장 아꼈던 누나 요한네 소피에마저 15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합니다. 연이은 가족의 죽음은 뭉크에게 질병과 죽음이 삶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임을 각인시켰습니다.

소피에의 죽음은 뭉크에게 어머니의 죽음보다 더 직접적이고 생생한 고통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누나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며 깊은 절망을 느꼈고, 이는 훗날 그의 출세작인 '아픈 아이'의 모티프가 됩니다.
뭉크는 평생 죽음의 천사가 자신의 집을 맴돌고 있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예술을 통해 그 고통을 표출하게 됩니다.

1879

[공학도의 길을 포기하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기술 대학에 입학하여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잦은 질병으로 학업을 지속하기 어려웠고 마음은 늘 예술을 향해 있었습니다.

뭉크는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추었으나 공학이라는 실용적인 학문에는 열정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대학 생활 중에도 그는 일기장에 그림을 그리고 스케치를 하며 예술에 대한 갈망을 키워나갔습니다.
결국 1년 만에 그는 공학도의 길을 접고 예술가로서의 삶을 선택하겠다는 결심을 내리게 됩니다.

1880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다]

일기장에 '이제 나의 결정은 화가가 되는 것이다'라고 기록하며 공식적인 선언을 합니다. 아버지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만의 길을 걷기로 확신했습니다.

화가가 되겠다는 뭉크의 결정은 독실한 신자였던 아버지에게 세속적인 타락으로 받아들여져 갈등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뭉크는 예술이야말로 자신의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임을 믿었습니다.
이 시점부터 그는 체계적인 미술 교육을 받기 위해 준비하며 본격적인 습작 활동에 돌입합니다.

1881

[왕립 미술 학교 입학]

오슬로에 있는 왕립 미술 디자인 학교에 입학하여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습니다. 조각가 율리우스 미델툰과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그로부터 가르침을 얻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아카데미즘 교육을 받았으나 동시에 당대의 새로운 미술 경향인 사실주의에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선생이었던 크리스티안 크로그는 뭉크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그가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하도록 도왔습니다.
이곳에서의 교육은 뭉크가 기초적인 묘사력을 완성하고 개성 있는 화풍으로 나아가는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883

[공식적인 첫 전시회 참여]

산업 및 미술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며 예술가로서 대중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직은 프랑스 사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초기 화풍을 보여주는 시기였습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기술적으로는 훌륭했으나 아직 뭉크 특유의 주관적인 감성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단은 젊은 예술가의 세밀한 관찰력과 표현력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전시는 뭉크가 오슬로 예술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1885

[파리 여행과 예술적 충격]

장학금을 받아 예술의 중심지인 프랑스 파리를 처음 방문합니다. 그곳에서 인상주의와 마네의 작품들을 접하며 빛과 색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됩니다.

파리에서의 짧은 체류는 뭉크에게 보수적인 노르웨이 예술계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주었습니다.
그는 루브르 박물관과 현대 미술 갤러리들을 돌아다니며 당대 최신 미술 사조를 스펀지처럼 흡수했습니다.
이 여행 이후 뭉크의 화풍은 대상의 외면을 묘사하는 것에서 내면의 인상을 담아내는 쪽으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아픈 아이 제작 시작]

누나 소피에의 죽음을 추모하는 걸작 '아픈 아이'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전통적인 묘사 기법을 파괴한 이 작품은 훗날 표현주의의 효시로 평가받습니다.

뭉크는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1년 동안 수없이 덧칠하고 긁어내며 누나에 대한 기억과 슬픔을 캔버스에 박제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죽어가는 아이를 그린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고통스러운 '감정' 자체를 묘사하고자 했습니다.
이 작품은 뭉크 스스로 자신의 예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1886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안과 조우]

급진적인 예술가 집단인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안'에 합류하여 한스 예게르를 만납니다. 기성 도덕을 부정하는 이들의 사상은 뭉크가 내면의 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내게 만들었습니다.

지도자 격이었던 한스 예게르는 뭉크에게 '자신의 삶을 기록하라'고 조언하며 예술적 독립심을 일깨웠습니다.
이들의 자유분방하고 냉소적인 사상은 뭉크가 보수적인 가족적 가치관에서 탈피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이 집단과의 교류는 한편으로 뭉크에게 알코올 의존과 정신적 불안이라는 부작용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평단의 비난과 논란의 중심]

전시된 '아픈 아이'가 거친 붓질과 미완성 같은 기법으로 인해 평단의 혹독한 비난을 받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뭉크의 혁신적인 스타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두고 '지저분하다', '미친 사람의 그림이다'라며 조롱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란은 역설적으로 뭉크를 노르웨이 예술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문제적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대중의 야유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적인 표현 방식을 더욱 강화해 나갔습니다.

1889

[생클루 선언 발표]

일기장에 '더 이상 사람들은 책을 읽거나 뜨개질하는 여성을 그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적으며 예술적 결단을 선언합니다. 숨 쉬고, 느끼고, 고통받는 실제적인 인간을 그리겠다는 의지였습니다.

이는 예술이 표면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인간 영혼의 진실을 담아야 한다는 뭉크의 핵심 철학이 담긴 선언입니다.
그는 성스럽고 위엄 있는 감정을 그림에 담아 사람들이 그 앞에서 경건함을 느끼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선언은 훗날 뭉크의 상징주의와 표현주의가 결합된 독창적인 세계관의 헌법이 되었습니다.

[최초의 대규모 개인전 개최]

오슬로에서 화가 인생 처음으로 110점에 달하는 방대한 작품을 선보이는 개인전을 엽니다. 이 전시를 통해 그는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젊은 거장으로서의 입지를 다집니다.

당시 26세였던 뭉크는 이 전시를 통해 자신의 초기 화풍을 정리하고 새로운 도약을 꿈꿨습니다.
전시의 성공으로 그는 국가 장학금을 획득하여 다시 한번 프랑스로 유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 전시는 뭉크가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대중과 깊이 소통한 첫 번째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임종과 깊은 후회]

파리 체류 중에 아버지 크리스티안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됩니다. 생전 화해하지 못한 채 떠나보낸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은 그를 심각한 우울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뭉크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그 공허함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생의 프리즈'에 대한 영감을 얻었습니다.
아버지가 남긴 종교적 유산과 그에 대한 반항심은 뭉크의 예술 속에서 기묘한 긴장감을 형성해 왔습니다.
이후 그의 작품에서는 권위적인 남성상이나 허무함을 다룬 주제들이 더욱 빈번하게 등장하게 됩니다.

1892

[베를린 전시와 뭉크 스캔들]

베를린 미술가 협회의 초청으로 전시를 열었으나, 작품의 파격성 때문에 일주일 만에 전시가 강제 폐쇄됩니다. 이 사건은 독일 현대 미술사에 기록된 유명한 스캔들이 되었습니다.

보수적인 베를린 예술가들은 뭉크의 그림을 '무질서한 낙서'로 치부하며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하지만 이 폐쇄 조치는 엄청난 홍보 효과를 가져와 뭉크를 유럽 전역의 스타로 급부상시켰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독일 내 진보적인 예술가들이 결집하여 '베를린 분리파'를 결성하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1893

[세기의 명작 절규의 탄생]

불타는 듯한 노을 아래 자연을 관통하는 거대한 비명을 형상화한 '절규'를 제작합니다. 현대인의 불안과 실존적 고통을 상징하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미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뭉크는 친구들과 산책하던 중 하늘이 핏빛으로 변하는 환각을 경험하고 자연의 비명을 느꼈다고 일기에 기록했습니다.
해골을 닮은 주인공의 표정과 구불구불한 선들은 내면의 동요를 시각적으로 극대화한 천재적인 연출이었습니다.
'절규'는 단순히 개인의 공포를 넘어 문명화된 인간이 느끼는 근원적인 고독을 완벽하게 포착해 냈습니다.

1894

[성스러움과 세속의 조화 마돈나]

에로티시즘과 죽음, 종교적 숭고함이 결합된 연작 '마돈나'를 제작합니다. 전통적인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파괴하고 욕망과 고통을 가진 여성으로 재해석했습니다.

뭉크의 마돈나는 황홀경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프레임에는 태아와 정자 모양의 문양을 그려 넣어 생명의 탄생과 소멸을 암시했습니다.
이 작품은 공개 당시 보수적인 종교 단체들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예술적 독창성은 높게 평가받았습니다.
여성에 대한 뭉크의 복합적인 감정(숭배와 공포)이 가장 잘 드러난 수작으로 꼽힙니다.

[판화 기술의 습득과 확장]

동판화와 석판화를 배우며 자신의 작품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새로운 도구를 얻습니다. 판화는 뭉크의 예술적 성취를 유럽 전역에 알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복제를 위해 판화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판재를 깎고 부식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질감을 예술적 표현의 수단으로 활용했습니다.
판화를 통해 그는 '절규'나 '마돈나' 같은 주요 이미지들을 다양한 버전으로 변주하며 예술적 실험을 지속했습니다.
뭉크는 렘브란트나 뒤러에 비견되는 현대 판화의 거장으로 기록되는 영예를 누리게 됩니다.

1895

[동생 안드레아스의 죽음]

가족 중 유일하게 가정을 꾸렸던 남동생 안드레아스가 폐렴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끊임없는 죽음의 행렬은 뭉크에게 가족의 멸절이라는 깊은 허무함을 안겼습니다.

동생의 죽음은 뭉크에게 다시 한번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며 그를 정신적 고립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누나 라우라 역시 정신질환으로 입원 중인 상황에서 뭉크는 자신이 가문의 마지막 불꽃이라는 압박을 느꼈습니다.
이 슬픔은 그의 '생의 프리즈' 프로젝트에 죽음과 이별의 색채를 더욱 짙게 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96

[파리에서의 상징주의 교류]

다시 파리로 돌아와 극작가 스트린드베리, 시인 말라르메 등과 교류하며 상징주의 예술의 정점을 경험합니다. 인간의 무의식과 원초적 본능에 대한 탐구가 더욱 심화된 시기였습니다.

그는 파리의 인쇄소에서 고도의 판화 기술을 연마하는 한편, 보들레르의 '악의 꽃' 삽화 작업을 제안받기도 했습니다.
스트린드베리와의 지적 교류는 뭉크가 남녀 사이의 갈등과 질투라는 주제를 더욱 날카롭게 해부하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시기의 뭉크는 유럽 아방가르드 예술의 핵심 인물로 완벽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1898

[툴라 라르센과의 위험한 사랑]

부유한 여성 툴라 라르센과 격정적이고 파괴적인 연애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결혼을 극도로 두려워했던 뭉크의 강박은 두 사람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갔습니다.

툴라는 뭉크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결혼을 요구했으나, 뭉크는 자신의 예술적 자유와 유전적 질병에 대한 우려로 이를 거절했습니다.
4년 동안 이어진 이들의 관계는 서로를 향한 집착과 증오로 얼룩진 채 뭉크의 정신적 에너지를 소진시켰습니다.
이 사랑의 상처는 훗날 '살인자', '마라의 죽음' 같은 공격적인 작품들의 영감이 되었습니다.

1902

[권총 발사 사건과 신체적 부상]

툴라 라르센과의 심한 다툼 도중 권총이 발사되어 뭉크의 왼쪽 중지 끝부분이 잘려 나가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이 사건은 뭉크에게 씻을 수 없는 정신적 충격과 인간 불신을 남겼습니다.

사고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툴라가 거짓 자살 소동으로 뭉크를 유인하려다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손가락 부상보다 더 컸던 것은 툴라에 대한 배신감이었으며, 그녀가 곧 다른 화가와 결혼하자 뭉크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뭉크는 여성에 대해 더욱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고 정신적 불안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생의 프리즈 완전한 전시]

베를린 분리파 전시회에서 평생의 역작들을 모은 '생의 프리즈' 연작을 성공적으로 전시합니다. 사랑, 고통, 불안, 죽음이라는 인간의 생애 주기를 완벽한 서사로 엮어낸 무대였습니다.

전시실을 가득 채운 뭉크의 그림들은 하나의 유기적인 이야기처럼 배치되어 관람객들에게 거대한 압박감을 선사했습니다.
독일의 젊은 예술가들과 평단은 뭉크를 '심리의 화가'라고 칭송하며 뜨거운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 전시는 뭉크가 유럽 최고의 예술가 중 한 명임을 공고히 하는 역사적인 승리의 순간이었습니다.

1905

[독일에서의 명성 확산]

독일의 후원자들과 수집가들로부터 수많은 초상화 의뢰를 받으며 경제적 안정과 명성을 동시에 얻습니다. 노르웨이보다 독일에서 먼저 진정한 예술가로 인정받은 셈이었습니다.

뭉크는 독일 귀족들과 지식인들의 초상화를 통해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아닌 내면의 고독과 성격을 포착해 냈습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독일 미술 시장에서 뭉크의 작품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하지만 성공과 비례하여 그의 음주벽과 신경쇠약은 점차 통제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1908

[정신적 붕괴와 입원]

알코올 의존과 환각, 피해망상 증세가 심해지면서 덴마크 코펜하겐의 다니엘 야콥손 박사 클리닉에 자발적으로 입원합니다. 자신의 무너진 정신을 재건하기 위한 처절한 사투의 시작이었습니다.

뭉크는 병원에서도 치료를 받으며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자신의 간호사나 의사를 모델로 작품을 남겼습니다.
약 8개월 동안 이어진 치료는 그에게 심리적 평온함과 함께 절제된 생활 방식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시점 이후 뭉크의 화풍은 어두운 심연에서 벗어나 좀 더 밝고 낙천적인 색채를 띠게 되는 변화를 겪습니다.

1909

[노르웨이로의 귀환]

치료를 마친 후 마침내 고국 노르웨이로 돌아와 정착합니다. 과거에 자신을 비난했던 조국은 이제 그를 세계적인 거장으로 환대하며 국왕으로부터 훈장을 수여하기에 이릅니다.

그는 오슬로 피오르드 근처의 조용한 해안 마을 크라게뢰에 머물며 자연의 생명력을 그리는 데 집중했습니다.
건강을 회복한 뭉크는 대형 벽화 작업에 관심을 보이며 공공 예술가로서의 새로운 경력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뭉크의 귀환은 노르웨이 예술계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11

[오슬로 대학 벽화 경연 승리]

오슬로 대학교 강당(Aula)의 대형 벽화 제작 공모에서 최종 승리합니다. '태양', '역사', '알마 마테르'를 주제로 한 이 거대한 연작은 그의 후반기 최고의 성취로 꼽힙니다.

그는 개인적인 불안에서 벗어나 인류의 지성과 문명, 자연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거대한 서사를 캔버스에 담았습니다.
특히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벽화는 노르웨이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벽화 작업은 무려 5년 동안 이어졌으며 뭉크는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예술이 사회와 연결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1916

[에켈리 사유지 구입]

오슬로 외곽의 에켈리 지역에 있는 넓은 사유지를 구입하여 정착합니다. 이곳에서 뭉크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외부와의 교류를 최소화한 채 예술 작업에만 몰두하는 은둔의 삶을 시작합니다.

뭉크는 에켈리에 여러 개의 야외 스튜디오를 짓고 날씨와 빛의 변화를 관찰하며 대작들을 쏟아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나의 아이들'이라고 부르며 판매하기를 꺼렸고, 스튜디오에 수천 점의 그림을 쌓아두었습니다.
이곳에서의 고요한 삶은 뭉크가 장수하며 마지막 예술적 불꽃을 태울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1926

[누나 라우라의 죽음]

오랫동안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던 누나 라우라가 세상을 떠납니다. 뭉크는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로서 깊은 고독과 허무함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라우라의 죽음은 뭉크에게 가문의 비극적인 운명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누나의 죽음을 겪으며 자신 역시 언제 죽음의 부름을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겼으나, 그 에너지를 다시 창작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이후 뭉크의 자화상에서는 죽음을 초연하게 바라보는 노년의 깊은 시선이 담기기 시작합니다.

1937

[나치에 의한 퇴폐 예술 낙인]

독일 나치 정권이 뭉크의 작품들을 '퇴폐 예술'로 규정하고 독일 내 박물관에서 82점의 작품을 압수합니다. 한때 자신을 열광시켰던 독일에서의 수난은 그에게 큰 슬픔이었습니다.

나치는 뭉크의 그림이 독일 정신을 오염시킨다고 비난했으나, 역설적으로 일부 나치 고위직들은 뭉크의 천재성을 비밀리에 흠모하기도 했습니다.
압수된 작품들은 나중에 수집가들에 의해 경매를 통해 매각되거나 보존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술의 자율성이 정치적 권력에 의해 위협받는 시대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1940

[나치의 노르웨이 점령]

독일군이 노르웨이를 침공하여 점령하자 뭉크는 에켈리에서 극심한 불안 속에 지냅니다. 그는 자신의 방대한 작품들이 나치에 의해 파괴되거나 몰수될까 봐 전전긍긍했습니다.

뭉크는 나치 협력자들과의 접촉을 일체 거부하고 침묵으로 저항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집안의 어두운 다락방에 주요 작품들을 숨겨두고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습니다.
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예술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힘을 다해 창작을 이어갔습니다.

1944

[고독한 거장의 작별]

오슬로의 에켈리 사유지에서 80세를 일기로 평온하게 숨을 거둡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유산을 오슬로 시에 기부한다는 유언을 남겨 예술적 사회 환원의 위대한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의 사망 소식은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예술계에 큰 슬픔을 안겼습니다.
뭉크가 기부한 수천 점의 그림, 판화, 드로잉 등은 훗날 뭉크 미술관의 건립 토대가 되었습니다.
인간 영혼의 심연을 그렸던 거장은 자신이 평생 두려워했던 죽음을 마침내 품고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았습니다.

1963

[뭉크 미술관 개관]

뭉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오슬로에 뭉크 미술관이 공식 개관합니다. 그가 평생 '아이들'처럼 아꼈던 방대한 작품들이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와 대중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미술관은 뭉크가 기부한 1,100여 점의 유화와 18,000점의 판화 등 세계 최대의 뭉크 컬렉션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뭉크 연구의 중심지로서 기능하며 그의 예술적 가치를 전 세계에 전파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현재까지도 뭉크 미술관은 전 세계 예술 애호가들이 반드시 방문해야 할 성지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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