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실레
연표
1890
[기차에 매료된 유년기]
오스트리아 툴른에서 태어난 에곤 실레는 어린 시절부터 기차에 깊이 매료되어 스케치북에 기차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습니다.아버지마저 스케치북을 부수려 했을 정도로 그림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습니다.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림에 대한 재능은 일찍이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에곤 실레(본명: 에곤 레오 아돌프 루트비히 실레, Egon Leo Adolf Ludwig Schiele)는 1890년 6월 12일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1901
[크렘스로 이사]
11살이 되던 해, 실레는 인근 크렘스라는 도시로 이사했습니다.주변 사람들은 그를 '이상한 아이'로 여겼는데, 특히 여동생 거트루드에게 근친적 성향을 보였습니다.이러한 행동은 아버지의 걱정을 샀고, 한번은 잠긴 방에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문을 부수기도 했습니다.16세 때는 허락 없이 12세 여동생과 함께 기차를 타고 트리에스테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필름을 현상하는 중이었으나, 그의 행동은 가족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1905
[아버지 사망]
실레가 15세 되던 해, 아버지가 매독으로 사망했습니다.이후 그는 어머니 쪽 삼촌인 레오폴트 지아첵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삼촌은 실레가 자신처럼 철도회사 직원이 되기를 바랐으나, 실레의 그림에 대한 재능을 알아보고 결국 칼 스트라우흐라는 화가를 선생으로 붙여주었습니다.
1906
[아카데미 입학]
1906년, 실레는 구스타프 클림트도 한때 다녔던 비엔나의 쿤스트게베르베슐레(미술 공예 학교)에 입학했습니다.같은 해, 그는 몇몇 교수들의 추천으로 비엔나의 아카데미 데어 빌덴덴 쿤스트(미술 아카데미)라는 더 전통적인 학교로 옮겨갔습니다.그러나 매우 보수적인 교육 방식에 실망하게 됩니다.
1907
[클림트의 멘토링]
1907년, 실레는 오스트리아 화가 연맹의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나게 됩니다.클림트는 젊은 실레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림을 사주거나 교환하고, 모델을 주선하며 후원자들에게 소개하는 등 적극적인 멘토 역할을 했습니다.클림트의 영향 아래 실레는 빈 워크샵에 참여하는 등 예술적 기반을 다지게 됩니다.
1909
[새로운 예술가 그룹 결성]
아카데미의 보수적인 교육 방식에 반발한 실레는 3년 만에 학교를 중퇴하고,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새로운 예술가 그룹(Neukunstgruppe)'을 결성했습니다.같은 해 클림트의 초청으로 비엔나 쿤스트샤우(Kunstschau) 전시회에 참여하며 에드바르드 뭉크, 얀 투롭, 빈센트 반 고흐 등 거장들의 작품과 교류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1910
[누드화와 독자 스타일]
1910년부터 실레는 인간의 모습뿐만 아니라 인간의 성(性)을 탐구하는 누드화를 그리기 시작하며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했습니다.메마르고 병적인 색감, 강한 성적 의미를 지닌 그의 그림은 기존의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이후 그의 작품 세계의 주요한 특징이 되었습니다.
1911
[발리와의 논란적 동거]
1911년, 실레는 17세의 발리 노이질을 만나 빈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발리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두 사람은 폐쇄적인 빈의 환경을 벗어나 실레 어머니의 고향인 크루마우로 이주했으나, 십대 소녀들을 억지로 모델로 고용한 실레의 생활 방식 때문에 마을 사람들의 반감을 사 쫓겨나게 됩니다.
1912
[외설적 그림 혐의 투옥]
영감을 얻고 저렴한 스튜디오를 찾아 노이렝바흐로 옮겨갔지만, 실레의 스튜디오는 비행 청소년들의 아지트가 되었습니다.결국 그는 미성년 소녀 유혹 혐의로 체포되었고, 경찰은 그의 그림 수백 점을 '포르노'로 간주하며 압수했습니다.유혹 혐의는 기각되었으나, 어린이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외설적인 그림을 전시한 죄로 유죄가 인정되어 3일간 투옥되었습니다.그는 감옥에서 갇힌 어려움을 묘사한 그림 12점을 남겼습니다.
재판장은 촛불에 그림 한 점을 태우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21일간 구속되어 있었음을 감안하여 3일의 추가 투옥이 선고되었습니다.
1913
[뮌헨 첫 단독전]
논란 속에서도 실레의 작품 활동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1913년, 그는 뮌헨에 있는 한스 골츠 갤러리에서 첫 단독 전시회를 개최하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선보였습니다.
1914
[파리 단독전]
1914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도 단독 전시회를 열며 국제적인 명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같은 시기, 그는 빈 교외에 살던 에디트와 아델 하름스 자매에게 관심을 갖게 됩니다.
1915
[발리와의 이별]
1915년 2월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하기 위해 오랜 연인 발리와 결별하였습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이별의 내용을 담은 〈죽음과 소녀〉를 그렸습니다.
실레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유리하게 결혼을 할 예정이다. 발리가 아니라"라고 직접 밝히기도 했습니다.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
에디트 집안의 약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실레는 자신의 부모님 결혼 기념일인 1915년 6월 17일,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참전]
결혼 3일 후인 1915년 6월 20일, 실레는 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어 프라하에서 군 복무를 시작했습니다.군 복무 중에도 베를린, 취리히, 프라하, 드레스덴 등에서 성공적인 전시회를 개최하며 예술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습니다.처음에는 러시아 포로 호송 임무를 맡았으나, 이후 전쟁포로수용소에서 서기로 일하며 그림을 그릴 시간적 여유를 얻었습니다.
1917
[비엔나 귀환]
1917년, 실레는 비엔나로 돌아와 다시 작품 활동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한층 더 원숙해진 재능을 보여주며 질과 양적인 면에서 모두 풍부해졌습니다.
1918
[분리주의 전시회 대성공]
1918년 비엔나에서 열린 분리주의 49회 전시회에 초대된 실레는 50개의 작품을 중앙 홀에 전시했습니다.그는 최후의 만찬을 모방하여 자신의 초상을 예수의 자리에 넣은 전시회 포스터를 직접 디자인하기도 했습니다.이 전시회는 대성공을 거두며 실레의 그림 가격이 급등하고 초상화 주문이 쇄도하는 등 그의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아내 에디트 사망]
유럽 전역을 휩쓴 스페인 독감이 비엔나에 도달했습니다.임신 6개월이었던 아내 에디트가 10월 28일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습니다.
[스페인 독감으로 요절]
아내 에디트가 사망한 지 불과 3일 후인 10월 31일, 에곤 실레 역시 스페인 독감으로 28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그는 사망하기 사흘 동안 아내 에디트의 스케치 몇 점을 그렸는데, 이것들이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남아있습니다.
2010
[발리의 초상' 분쟁 해결]
1997년 뉴욕 현대미술관 전시 후, 나치 약탈품이라는 논란에 휩싸여 압류되었던 실레의 '발리의 초상 (1912)' 그림 분쟁이 2010년 7월 20일 해결되었습니다.이후 레오폴트 미술관이 1,900만 달러에 그림을 구입하여 소장하게 되었습니다.
2013
[종이 작품 세계 최고가]
2013년, 레오폴트 미술관은 소더비 경매에서 실레의 작품 3개를 1,400만 파운드에 판매했습니다.이 중 '두 연인 (Wally와의 자화상)'은 무려 788만 파운드에 낙찰되며 종이에 그린 작품 중 세계 경매 기록을 새롭게 경신했습니다.또한, 같은 해 'Reclining Woman'은 온라인 경매에서 당시까지 온라인 경매 최고액수인 240만 달러에 판매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