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밀리아 에어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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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사, 작가, 탐험가 + 카테고리

어밀리아 에어하트는 미국의 전설적인 여성 비행사이자 작가입니다. 그녀는 여성 최초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했으며, 특히 단독 비행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과감한 도전과 기록적인 비행으로 여성 비행사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나, 세계 일주 비행 도중 태평양 상공에서 실종되며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았습니다. 그녀의 생애는 용기와 탐험 정신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897

[어밀리아 에어하트 출생]

미국 캔자스주 앳친슨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모험가적 기질을 보였습니다.

어밀리아 에어하트는 미국 캔자스주 앳친슨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나무를 오르거나 소총으로 쥐를 잡는 등 어렸을 적부터 모험가적 기질을 보였습니다.

1917

[1차 세계대전 간호사 활동 및 학업 중단]

제1차 세계 대전 중 토론토의 스패디나 육군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습니다.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컬럼비아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중퇴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에는 토론토의 스패디나 육군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습니다.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컬럼비아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중퇴했습니다. 그녀는 눈의 동공에 통증을 자주 느껴 수술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성공적이지는 못했습니다.

1921

[첫 비행 훈련 시작]

여성 파일럿 네타 스누크로부터 첫 비행 훈련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여성 파일럿이었던 네타 스누크로부터 첫 비행 훈련을 받았습니다.

1922

[첫 비행기 구매]

'카나리아(The Canary)'라는 별명을 붙인 황색 중고 복엽기 키너 에어스터를 구매했습니다.

25번째 생일이 된 그녀는 발키너라는 항공사에서 '카나리아(The Canary)'라고 별명을 붙인 황색 중고 복엽기 키너 에어스터를 구매했습니다.

[여성 비행 고도 기록 달성]

키너 에어스터로 고도 4,300m를 날아 여성 파일럿으로서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에어스터로 고도 4,300m를 날아 여성 파일럿으로서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1923

[파일럿 면허 취득]

국제항공연맹에 의해 여성으로는 16번째로 파일럿 면허증을 취득했습니다.

국제항공연맹에 의해 여성으로는 16번째로 파일럿 면허증을 땄습니다.

1924

[비행기 매각 및 학업 중단]

부모가 이혼하면서 비행기를 팔고 모친과 함께 대륙 횡단 여행을 떠났고, 보스턴에 정착 후 컬럼비아 대학교와 MIT에 등록하려 했으나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부모가 이혼했을 때, 그녀는 모친과 함께 대륙 횡단 여행을 떠났고, 다시 앨버타주 캘거리로 여행을 갔습니다. 이 여행은 마침내 보스턴에 도착했고, 그녀는 다시 공동에 통증을 느꼈으나 이번 수술은 전보다 더 성공적이었습니다. 회복된 후에, 그녀는 컬럼비아 대학교에 몇 개월 동안 다녔고, MIT에 등록하려 했으나 수업료를 충당할 수 없어 다시 학업을 그만두었습니다.

1925

[교사 및 사회 사업가 활동]

교사로서 일하기 시작했고, 데니슨 하우스에서 사회 사업가로서 활동하며 비행에 대한 관심을 유지했습니다.

그녀는 곧 교사로서 일하기 시작했고, 매사추세츠주 메드포드에 살며 데니슨 하우스에서 사회 사업가로서 일했습니다. 그녀가 메드포드에 살 때, 매사추세츠주 퀸시에 있는 데니슨 공항에서 공항의 첫 공식적인 비행을 기록했습니다. 에어하트는 비행에 관한 그녀의 관심을 유지했고, 미국 항공 협회 보스턴 지부의 일원으로서 활약했으며, 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1928

[북아메리카 대륙 횡단 첫 여성 파일럿]

북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한 첫 여성 파일럿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비행 능력과 전문가 근성은 점차적으로 성장했습니다.

대륙 횡단 비행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그녀 자신의 흐린 데 없는 기록을 세우려고 노력했습니다. 8월에 그녀는 북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한 첫 여성 파일럿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비행 능력과 전문가 근성은 점차적으로 성장했고, 그녀와 함께 비행했던 경험 많은 전문 파일럿들은 그녀를 인정했습니다.

[여성 최초 대서양 횡단 비행]

파일럿 윌머 스털츠와 보조 파일럿 루이스 고든과 함께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 여성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비행가가 되었습니다. 비행의 대부분은 계기 비행이었으며, 그녀는 비행기를 직접 조종하지 않았습니다.

찰스 린드버그의 단독 대서양 횡단 비행 후, 에이미 핍스 게스트의 요청으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참여하게 됩니다. 힐튼 H. 레일리 대령의 요청을 받아 파일럿 윌머 스털츠와 보조 파일럿이자 정비사 루이스 고든과 함께 뉴펀들랜드 트레퍼시 만을 출발해 정확히 20시간 40분 후에 웨일스 버리포트에 착륙했습니다. 비행의 대부분이 계기 비행이었고, 그녀는 이런 종류의 비행에 대한 연습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비행기를 조종하지 않았습니다. 착륙 후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스털츠가 모든 비행을 해야만 했으며, 자신은 짐에 불과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언젠가 혼자 다시 시도해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잉글랜드 사우샘프턴 울스턴에 착륙했을 때 그녀는 환대받았습니다. 스털츠 및 고든과 에어하트가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뉴욕에서 색종이 테이프 퍼레이드와 함께 환영받았고 백악관에서 대통령 캘빈 쿨리지에게 환영받았습니다.

[새뮤얼 채프먼과의 결별]

보스턴 출신의 화학 공학 기술자 새뮤얼 채프먼과 열애했으나 헤어졌습니다.

에어하트는 잠시 동안 보스턴 출신의 화학 공학 기술자 새뮤얼 채프먼과 열애했으나, 헤어졌습니다.

1929

[《코스모폴리탄》지 부편집장 활동]

《코스모폴리탄》지의 부편집장 직책을 수락하여 비행에 대한 대중 인식 확립과 여성들의 항공 분야 참여에 집중적으로 기고했습니다. 또한 상업 항공 여행을 촉진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에어하트는 《코스모폴리탄》지(誌)의 부편집장 직책을 수락했습니다. 그녀는 이 포럼 란을 비행에 대한 더 나은 대중 인식 확립의 기회로 여기고, 여성들의 항공분야 부문 참여에 대해 집중적으로 기고했습니다. 그녀는 찰스 린드버그와 함께 항공 수송의 발달을 통해 상업 항공 여행을 촉진시킨 최초의 비행가중 하나였습니다. 그녀는 트랜스 콘티넨털 에어트랜스포트의 대표였으며, 뉴욕과 워싱턴 DC 간의 첫 지역간 왕복 항공편을 개설하는 데 시간과 돈을 투자했습니다. 그녀는 또한 보스턴-메인 항공과 다른 북동부 항공사의 항공로를 제어하던 내셔널항공의 부회장이었습니다.

[여성 비행 더비 참가 및 친구 구조]

산타모니카-클리블랜드 여성 비행 더비 도중, 사고를 당한 친구 루스 니콜스를 구조하고 3등으로 도착하여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에어하트는 1929년 열린 산타모니카-클리블랜드 여성 비행 더비 도중에 첫 경주 비행 시도를 했습니다. 경주의 마지막 중간착륙장까지, 에어하트와 그녀의 친구인 루스 니콜스는 공동 1등이었습니다. 니콜스는 에어하트보다 먼저 출발했으나, 활주로의 끝에서 트랙터와 부딪혔고 비행기는 뒤집혔습니다. 에어하트는 출발하지 않고 니콜스의 비행기로 달려가 니콜스를 비행기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시간을 지체했고, 3등으로 도착했습니다. 그녀의 그 용기있는 행동은 그녀의 욕심 없는 모습의 상징이었습니다.

1930

[나인티나인스 첫 회장 선출]

국가항공협회(National Aeronautic Association)의 일원이 되었으며, 여성 파일럿 후원 단체인 '나인티나인스'의 첫 회장이 되어 여성 파일럿들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에어하트는 그녀가 적극적으로 독립된 여성 기록을 세우는 것을 증진시켰던 국가항공협회(National Aeronautic Association)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녀는 여성 파일럿들을 후원하던 단체인 나인티나인스에 참여했습니다. 1929년 그녀는 여성 파일럿들과 만났고, 특권을 가진 일원의 숫제에 기초한 이름을 제안했습니다. 이후에, 그녀는 1930년에 조직의 첫 회장이 되었습니다.

1931

[오토자이로 세계 신기록 달성]

피트케언 PCA-2 오토자이로로 고도 18,415피트(5,613미터)를 날아 세계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피트케언 PCA-2 오토자이로(Pitcairn PCA-2 Autogyro)로 고도 18,415피트(5,613미터)를 날아 세계신기록을 세웠습니다.

[조지 P. 푸트남과 결혼]

오랫동안 교제했던 조지 P. 푸트남과 결혼했습니다. 에어하트는 결혼 후에도 'Mrs. Putnam' 대신 자신의 이름을 고수하며 자유주의적인 면모를 보였습니다.

'GP'로 잘 알려진 조지 P. 푸트남은 1929년 이혼 후 에어하트와 교제했고, 6번의 구애 끝에 코네티컷주 노엉크의 푸트남의 모친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에어하트의 결혼에 대한 생각은 당대엔 자유주의적이라서 가족 부양의 책임은 양쪽 모두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Mrs. Putnam'으로 언급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언급하길 고수했습니다. 에어하트와 푸트남 사이에서는 아이가 없었지만, 푸트남의 전 아내인 도로시 비니 사이에서 얻은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1932

[여성 최초 대서양 단독 횡단]

록히드 베가 5b를 타고 뉴펀들랜드에서 출발하여 아일랜드 컬모어에 착륙, 대서양을 무착륙으로 단독 횡단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습니다.

34살의 나이로, 그녀는 출발 날짜 확인을 위한 지역 신문의 복사본과 함께 뉴펀들랜드 하버그레이스를 출발했습니다. 그녀는 찰스 린드버그의 단독 비행에 필적하기 위해 단발기인 록히드 베가 5b를 타고 파리에 도착하려 했습니다. 14시간 56분 동안 비행한 후 강한 북풍과 추운 날씨, 기계적 문제 때문에 데리 북쪽의 컬모어에 있는 한 목초지에 착륙했습니다. 이 지역은 현재 작은 박물관인 ‘어밀리아 에어하트 센터’입니다. 그녀가 대서양을 무착륙으로 횡단한 첫 여성이었기에, 미국 국회로부터 공군 수훈 십자 훈장,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 허버트 후버 대통령으로부터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상 금메달을 수여받았습니다.

1933

[엘리너 루스벨트와의 친교]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와 친교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여성의 주장에 대해 많은 것을 공유하며 빈번하게 연락했습니다.

그녀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그녀는 고위 관직의 인사들과 친분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영부인이었던 엘리너 루스벨트와 친교를 맺었는데, 엘리너는 에어하트의 관심과 열정, 그리고 특히 여성의 주장에 대해 많은 것을 나누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빈번하게 연락했습니다. 가른 유명한 비행가이자 대중들이 에어하트의 강력한 라이벌이라 간주했던 재클린 코크란 역시 이 시기에 절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1934

[벤딕스 트로피 레이스 여성 참여 금지 반대]

벤딕스 트로피 레이스가 여성 참여를 금지시키자, 여배우 매리 픽포드를 비행기로 나르는 것을 공개적으로 거절하며 여성 비행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그녀는 여성 파일럿들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벤딕스 트로피 레이스가 여성 참여를 금지시켰을 때, 그녀는 경주를 열기 위해 여배우 매리 픽포드를 비행기로 나르는 것을 공개적으로 거절했습니다.

1935

[퍼듀 대학교 교수 임용]

퍼듀 대학교 항공학부의 지도 교수와 상담 교수가 되었습니다.

에어하트는 퍼듀 대학교 항공학부의 지도 교수와 상담 교수가 됐습니다.

[벤딕스 트로피 레이스 참가 및 새 비행기 고려]

벤딕스 트로피 레이스에서 5등을 했고, 장거리 대양 횡단 비행에서의 록히드 베가 한계를 깨달아 새로운 비행기 탑승을 고려했습니다.

에어하트는 다시 장거리 경주 비행에 참가했고, 벤딕스 트로피 레이스에서 5등을 했습니다. 이 대회는 특히 거친 대회였는데, 짙은 안개와 격렬한 폭우가 경주를 방해하며 대회 참가자였던 세실 앨런이 이륙 도중에 화염에 휩싸여 사망했고, 라이벌 재클린 코크란은 기계적 문제 때문에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1930년부터 1935년까지, 에어하트는 키너 에어스터, 록히드 베가와 피트케언 오토자이로를 포함한 다양한 기종으로 속도와 비행거리에서 7개의 여성 비행 기록을 세웠습니다. 1935년에 그녀는 장거리 대양 횡단 비행에서의 록히드 베가의 한계를 깨닫고 깊은 생각 끝에 새 비행기에 탑승하기로 했습니다.

[하와이-오클랜드 단독 비행 첫 성공]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까지 단독으로 비행한 첫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비행은 장거리 대양 횡단 비행의 성공적인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까지 단독으로 비행한 첫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시간 동안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방송을 들을 만큼 편안하게 있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멕시코시티 단독 비행]

로스앤젤레스에서 멕시코시티까지 단독으로 비행했고, 이어서 뉴욕까지 무착륙으로 비행을 성공시켰습니다.

로스앤젤레스부터 멕시코시티까지 단독으로 비행했고, 멕시코시티에서 뉴욕까지 무착륙으로 비행하려 했습니다. 뉴저지주 뉴어크에 그녀를 환영하기 위해 모인 관중들은 그녀가 군중들 사이로 활주하지 않게끔 하려고 조심할 만큼 많아 문제였으나 비행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1936

[세계 일주 비행 계획]

퍼듀 대학교로부터 록히드 L-10 엘렉트라를 인수받고, 적도를 따라서 29,000마일(47,000km)을 비행하는 세계 일주 비행을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퍼듀 대학교로부터 록히드 L-10 엘렉트라를 인수받았고, 적도를 따라서 29,000마일(47,000km)를 비행하는 세계 일주 비행을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록히드 엘렉트라가 '나는 실험실'이라고 선전됐었으나, 겨우 약간의 실용적 과학만 계획됐고, 그 비행은 그녀의 다음 책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소재를 얻기 위함과 세계 일주를 하기 위한 목적에 맞춰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첫 항법사는 1928년에 그녀를 미국으로 데려온 배의 함장이었던 해리 매닝이었고, 두 번째 항법사로 해상과 비행 항해 모두에 방대한 경험이 있던 프레드 누넌이 선택됐습니다.

1937

[첫 세계 일주 비행 시도 중단]

오클랜드에서 호놀룰루로 향하며 첫 세계 일주 비행을 시도했으나, 이륙 도중 이상 선회로 비행기가 손상되어 중단되었습니다.

성 파트리치오의 날에, 그들은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를 떠나 하와이 호놀룰루로 향했습니다. 에어하트와 누넌, 매닝 이외에 할리우드 스턴트 파일럿이자 에어하트의 기술 고문이던 폴 만츠가 같이 탑승했습니다. 급유와 프로펠러 축 문제 때문에, 비행기는 하와이에서 정비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진주만의 포드섬에 있는 루크 해군 비행장에 착륙했습니다. 비행은 루크 비행장에서 에어하트가 이륙 도중 이상 선회한 후 3일 뒤에 재개되었습니다. AP 통신사 기자를 토함한 루크 비행장의 목격자들은 타이어 파열을 목격했다고 말했습니다. 에어하트는 엘렉트라의 오른쪽 타이어가 파열됐거나 오른쪽 랜딩기어가 고장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츠를 포함한 몇몇 이들은 파일럿의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비행기가 심각하게 손상되었기 때문에, 비행은 연기되었고 비행기는 캘리포니아주 버뱅크의 록히드로 보내져 수리받았습니다.

[두 번째 세계 일주 비행 시작]

마이애미를 출발하여 프레드 누넌과 함께 두 번째 세계 일주 비행을 시작했습니다. 남미,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를 거쳐 뉴기니섬 라에에 도착하며 22,000마일(35,000km)을 이동했습니다.

엘렉트라가 수리되고 있는 동안, 에어하트는 푸트남과 같이 자금을 모았고 두 번째 시도를 준비했습니다. 두 번째 시도는 종전과는 반대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갔습니다. 오클랜드부터 마이애미까지 다른 이들에게 공표하지 않은 채 비행하면서 시작됐고, 그곳에 도착한 후 그녀의 세계 일주 계획을 알렸습니다. 프레드 누넌이 두 번째 비행의 유일한 승무원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이애미를 출발한 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중간 착륙지를 거친 후 1937년 6월 29일 뉴기니섬의 라에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22,000마일(35,000km)을 이동했고, 7,000마일(11,000km)를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세계 일주 비행 중 실종]

뉴기니섬 라에를 출발해 하울랜드섬으로 향하던 중 남태평양 부근에서 항법사 프레드 누넌과 함께 실종되었습니다. 마지막 무선 교신 후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에어하트와 누넌은 라에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지는 하울랜드섬이었습니다. 미국 해안경비대의 연안 감시선 이타스카 호가 하울랜드섬에서 에어하트와 교신하며 섬 주변에 도착할 때까지 안내하도록 배치됐습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일련의 오류와 착오들 때문에, 무선 항법을 이용한 하울랜드섬으로의 마지막 접근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오전 7시 42분에, 에어하트는 이타스카 호를 볼 수 없고, 연료는 바닥나고 있고, 무선으로 연락할 수 없으며, 고도 1,000피트에서 비행 중이라고 발신했습니다. 오전 7시 58분에, 그녀는 이타스카 호로부터 들을 수가 없으며, 음성 신호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그녀가 요청한 주파수로 음성을 보낼 수가 없어서 모스 부호를 대신 보냈습니다. 에어하트는 이것을 수신했으나, 그들의 방향을 결정할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오전 8시 43분의 교신에서, 에어하트는 북위 157도 남위 337도에 있으며, 6210 킬로헤르츠로 다시 반복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몇 분 뒤에, 그녀는 같은 주파수로 아직까지 의문으로 기록된 통신을 보내왔습니다. 에어하트와 누넌은 하울랜드섬에 도착했다고 믿었으나, 실제로는 5해리(10k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공식 수색 종료]

미국 해군과 해안경비대가 실시한 공식 수색이 400만 달러를 쏟아부으며 미국 역사상 가장 비싸고 철저한 수색이 되었으나,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한 채 종료되었습니다.

이타스카 호는 에어하트의 마지막 교신을 수신한 지 한 시간 후에 하울랜드섬의 북쪽과 서쪽에서 수색을 실시했습니다. 곧 미국 해군이 수색에 참여했고, 하울랜드섬 부근을 수색했습니다. 에어하트로부터의 마지막 교신이 있은 지 나흘 후인 7월 6일에, USS 콜로라도의 함장은 사령관으로부터 해군과 미국 해안경비대의 모든 배를 인계받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후에, 수색 범위는 하울랜드섬 남쪽의 피닉스섬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실종 일주일 후, USS 콜로라도의 해군 비행기가 40여 년 동안 무인도로 남아 있던 니쿠마로로섬을 포함한 몇몇 섬을 탐색했습니다. 공식 수색은 7월 19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미국 해군과 미국 해안경비대가 실시한 이 수색은 400만 달러를 쏟아부으며 미국 역사상 가장 비싸고 철저한 수색이 되었으나, 그 당시의 수색과 구조 기술은 기초적이었고, 몇몇 수색은 잘못된 가정과 결함있는 정보들을 기반으로 실시되었습니다.

1939

1939.1.5 사후 2년

[공식 사망 선고]

로스앤젤레스 검인 재판소에서 어밀리아 에어하트가 실종 당시 사망한 것으로 공식 발표되었습니다.

공식 수색 후 푸트남이 개인 수색을 해서 피닉스섬, 키리티마티섬, 패닝섬, 길버트 제도와 마셜 제도를 수색했으나, 엘렉트라의 잔해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푸트남은 미국으로 돌아와 에어하트의 재산의 수탁자가 되어 수색과 관련된 대금을 지불하려 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의 검인 재판소에서 푸트남은 에어하트를 실종사 처리하기를 요청했고, 에어하트는 실종 당시 사망한 것으로 공식 발표되었습니다.

1940

[니쿠마로로섬 유골 발견]

키리바시의 니쿠마로로에서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 일부가 발견되어 피지로 보내져 정밀 감식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1941년에는 단신 유럽인 또는 유럽계 혼혈의 남성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검사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키리바시의 니쿠마로로에서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 일부가 발견되어 피지로 보내져 정밀 감식에 들어갔으나, 1941년 4월 4일 단신의 유럽인 또는 유럽계 혼혈의 남성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검사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1988

[TIGHAR 유해 발견 조사 착수]

역사적 항공기 회수를 위한 국제 단체인 TIGHAR에서 에어하트의 유해를 발견하기 위한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TIGHAR에서 에어하트의 유해를 발견하기 위한 조사에 착수했고, 1998년 법의학 인류학자들에게 유골의 재감식을 요청해 해당 유골이 북유럽 혈통의 장신 여성일 것이라는 소견이 나왔으나, 2015년 유럽인 남성의 것이라는 기존의 결론으로 다시 뒤집혔습니다.

2010

[TIGHAR 유해 및 유실물 발견 주장]

TIGHAR 측에서 니쿠마로로 수색 결과 에어하트의 유해 일부로 추정되는 유골 및 각종 유실물을 발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TIGHAR 측에서 니쿠마로로 수색 결과 에어하트의 유해 일부로 추정되는 유골 및 각종 유실물을 발견했으며, 2012년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은 에어하트 발견을 위해 50만 달러를 지원할 계획임을 밝혔습니다.

2012

2012.3.22 사후 75년

[실종기 잔해 발견 주장 및 수색 재개]

TIGHAR 측이 에어하트 실종 당시 이루어진 수색 작업 도중 촬영된 사진을 분석한 결과 비행기 착륙 장치로 보이는 잔해가 발견되었다고 주장하며 수색이 재개되었습니다.

TIGHAR 측에서 에어하트 실종 당시 이루어진 수색 작업 도중 촬영된 사진을 분석한 결과 도중 비행기 착륙 장치로 보이는 잔해가 발견되어 수색이 재개되었으며, 같은 해 7월 탐사대가 파견되었으나 별다른 소득 없이 하와이로 귀환하였고, 이후 수색 작업에서 촬영된 영상을 분석한 결과 비행기 잔해 일부가 발견되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2017

[일본군 포로설 제기]

마셜 제도의 국가 문기록 보관소에 있는 한 장의 사진을 근거로 에어하트가 밀리 환초에 비상착륙한 뒤 일본군에 붙잡혀 일본 제국의 감시하에 살다 사망했을 것이라는 내용의 프로그램이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되었습니다.

마셜 제도에 있는 국가 문기록 보관소에 있는 한 장의 사진을 근거로 에어하트가 밀리 환초에 비상착륙한 뒤 일본군에 붙잡혀 일본 제국의 감시하에 살다 사망했을 것이라는 내용의 프로그램이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되었습니다.

2018

[유해 재분석 결과 일치 주장]

테네시 대학교 측에서 과거 발표된 유해 검사 결과를 재분석하여 해당 유골이 에어하트와 99% 일치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테네시 대학교 측에서 과거 발표된 유해 검사 결과를 재분석해 해당 유골이 에어하트와 99% 일치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2019

[로버트 발라드의 수색 탐사 계획 발표]

RMS 타이타닉의 잔해를 발견한 탐험가 로버트 발라드가 에어하트의 실종 비행기 수색 계획을 발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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