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푸시킨
연표
1799
[위대한 시인의 탄생]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이자 소설가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모계로 아프리카 출신 귀족의 혈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은 1799년 6월 6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외조부는 표트르 대제를 섬긴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 흑인 출신 귀족이었습니다.
1800
[어린 시절의 특별한 교육]
어린 시절, 푸시킨은 프랑스인 가정교사에게 교육받으며 프랑스어에 능통해졌고, 유모에게 러시아 민담과 민요를 들으며 러시아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키웠습니다.
곱슬머리와 검은 피부를 가진 푸시킨은 자신의 몸속에 에티오피아 지중해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프랑스인 가정교사로부터 프랑스어를 배웠고, 10세경 이미 프랑스어로 시를 쓸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유모 아리나 로지오노브나에게는 러시아어와 러시아 민담, 민요를 배우며 러시아 민중의 삶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마음을 키웠습니다.
1811
1811년, 12세의 푸시킨은 차르스코예 셀로에 있던 학습원에 들어가 자유주의적 교육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816
[문학적 재능의 발현]
17세 때 공개 진급시험에서 자작시 <차르스코예 셀로의 추억>을 낭독하여 노시인 가브릴라 데르자빈을 감격시켰습니다.
1816년, 17세의 푸시킨은 공개 진급시험에서 자작시 <차르스코예 셀로의 추억>을 낭독하여 당시 시험에 참석했던 노시인 가브릴라 데르자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1817
[관료 생활과 정부 비판 시]
학습원을 졸업하고 외무성에 들어가 관료 생활을 시작했지만, 자유주의적 사상으로 농노 제도와 전제정치를 공격하는 시를 발표하며 정부의 눈총을 받았습니다.
1817년, 18세의 푸시킨은 학습원을 졸업하고 외무성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약 3년간 사교계에 출입하면서도 명석한 판단력을 잃지 않고 자유주의적 정신으로 농노 제도 및 전제정치를 공격하는 시 《자유》(1817), 《마을》(1819) 등을 발표했습니다.
1820
[추방과 문학적 도약]
정부 비판 시로 인해 남러시아로 추방당했으나, 설화를 주제로 한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발표하며 러시아 시의 새 경지를 개척하고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굳혔습니다.
1820년, 푸시킨은 《자유》, 《마을》 등의 시로 인해 남러시아로 추방당했습니다. 그해 그는 설화를 주제로 하고 구어를 대담하게 채용한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발표하며 러시아 시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동시에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습니다.
1822
[낭만주의 시기의 시작]
추방 생활 중 조지 고든 바이런의 강한 영향을 받아 낭만주의적 서사시 《카프카스의 포로》를 발표했습니다.
1822년, 푸시킨은 추방 생활 중에 조지 고든 바이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낭만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서사시 《카프카스의 포로》를 썼습니다.
1823
1823년, 푸시킨은 바이런의 영향을 받아 낭만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서사시 《집시》를 발표했습니다.
1824
[칩거와 리얼리즘으로의 전환]
오데사 총독과의 충돌로 모친 영지인 미하일로프스코 촌에 칩거하게 되었으며, 낭만주의 서사시 《바흐치사라이의 샘》을 발표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점차 리얼리즘으로 전환되는 작품 경향을 보였습니다.
1824년, 푸시킨은 오데사 총독과 충돌하여 프스코프 현에 있는 모친 영지 미하일로프스코 촌에 칩거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그는 낭만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서사시 《바흐치사라이의 샘》을 발표했으며, 이때부터 점차 바이런의 영향에서 벗어나 시형식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의 후속 장이나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리얼리즘으로의 이행이 엿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825
[황제 검열의 시작]
데카브리스트 반란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거주가 허용되었으나, 위험인물로 취급되어 황제의 직접 검열을 받아야 하는 중압감을 겪었습니다.
1825년 데카브리스트 반란 후 푸시킨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거주는 허용되었으나, 위험인물로 취급되어 황제의 직접 검열을 받아야 하는 중압감 속에서 우울한 기분을 나타내는 서정시나 연애생활을 하며 기분 전환을 꾀했습니다.
1830
[걸작 탄생의 시기]
새로운 창작생활 시기에 돌입하여 시형식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완성하고 단편집 《벨킨 이야기》를 발표하는 등 허무현한 걸작들을 썼습니다.
1830년부터 푸시킨은 새로운 창작생활 시기에 들어갑니다. 그는 우선 시형식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완성하고 이어 《인색한 기사》(1833) 등 시작품을 내는 한편, 신문에도 손을 대 단편집 《벨킨 이야기》(1830), 소설 《대위의 딸》(1836) 등 허무현한 걸작을 썼습니다.
1831
1831년, 푸시킨은 그보다 13년 연하의 미모로 소문난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습니다.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집을 마련하여 정착했습니다.
1834
[황제의 시종보 임명과 문학 활동]
황제의 시종보로 임명되었으며, 단편소설 《스페이드 여왕》을 발표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궁정 행사에 참석하길 바란 황제의 의중도 작용했습니다.
1834년 푸시킨은 황제의 시종보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그의 실력보다는 나탈리야가 궁정행사에 참석하기를 바란 황제의 속셈이 작용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이 기간 중 그의 아내와 황제 사이의 불륜 소문이 돌았지만, 푸시킨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 시기 그는 단편소설 《스페이드 여왕》을 발표했습니다.
1836
1836년 푸시킨은 잡지 SOVREMENNIK를 간행하는 데 참여했습니다.
1837
[비극적인 죽음]
반역정신을 적대시하는 귀족들이 퍼뜨린 아내에 대한 날조된 소문으로 프랑스인 귀족 조르주 당테스와 결투를 벌이다 총상을 입고 37세의 젊은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1837년 2월 10일, 푸시킨은 그의 반역정신을 적대시하는 귀족들이 나탈리야가 부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날조된 소문을 퍼뜨림으로써 나탈리야가 바람을 피웠다고 지목한 프랑스인 귀족 조르주 당테스와 결투를 벌이다가 총상으로 인해 비운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의 나이는 37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