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비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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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는 17세기 후반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의 거장입니다.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사제였던 그는 붉은 머리칼 덕분에 '붉은 사제(Il Prete Rosso)'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선천적인 천식으로 인해 미사 집전보다는 음악 활동에 전념하였고, 베네치아의 피에타 고아원에서 30년 넘게 음악 교사 및 지휘자로 봉직하며 수많은 걸작을 남겼습니다. 그는 협주곡 형식의 기틀을 다지고 독주 악기의 기교를 극대화하여 바로크 음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특히 '사계'를 포함한 방대한 협주곡과 오페라, 종교 음악은 당대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바흐 등 후대 작곡가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말년에는 빈으로 이주했으나 빈곤 속에 생을 마감했고, 사후 잊혀졌다가 20세기에 들어서야 그의 악보들이 재발견되며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연표
1678
태어날 당시 베네치아에 지진이 발생했고 아기가 위독했기 때문에 즉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후 5월 6일에 산 조반니 인 브라고라 교회에서 정식 세례 의식을 치렀습니다.
1685
이발사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는 안토니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쳤으며, 어린 안토니오가 베네치아의 음악적 환경을 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693
음악 활동을 병행하며 산 제미니아노 교회 등에서 하위 성직 과정을 밟았고, 크리스마스에는 산 마르코 대성당에서 보조 바이올리니스트로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1703
그는 사제가 되었으나 붉은 머리카락 때문에 '붉은 사제'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건강 문제로 인해 사목 활동보다는 음악에 집중하게 됩니다.
[피에타 고아원 바이올린 교사 취임]
베네치아의 피에타 고아원(Pio Ospedale della Pietà)에 바이올린 교사로 채용되었습니다.이곳은 고아 소녀들에게 음악 교육을 시키는 기관으로, 비발디는 이곳에서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자신이 작곡한 곡들을 연주하게 하며 명성을 쌓았습니다.
1704
건강상의 이유로 제단에 오래 서 있을 수 없게 되자 미사 의무를 면제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오직 음악 작곡과 교육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705
안니발레 감바라에게 헌정된 이 작품은 아르칸젤로 코렐리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비발디의 초기 작곡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오페라 데뷔 가능성]
최근 연구에 따르면 산탄젤로 극장에서 오페라 '불 속의 크로이소스'를 완성하며 오페라계에 데뷔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과거에는 1713년이 데뷔로 알려졌으나, 이 시기부터 이미 극장 경영과 작곡에 관여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709
반대 7표, 찬성 6표로 해고되었으나, 그의 음악적 역량이 절실했던 고아원 측에 의해 나중에 다시 복직하게 됩니다.
1711
[작품 번호 3번 '화성의 영감' 출판]
암스테르담에서 12개의 협주곡으로 구성된 '화성의 영감(L'estro armonico)'을 출판했습니다.이 작품집은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이 곡들을 건반 악기용으로 편곡할 만큼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후 1716년에는 '마에스트로 데 콘체르티(Maestro de' concerti)'로 승진하여 학교의 음악 활동을 총괄하게 됩니다.
1713
[오페라 '군대 내의 오토' 초연]
비첸차에서 그의 첫 공식 오페라인 '군대 내의 오토(Ottone in villa)'가 초연되었습니다.이 성공을 발판으로 비발디는 베네치아의 극장 경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1714
[산탄젤로 극장 임프레사리오 활동]
베네치아 산탄젤로 극장의 흥행주(임프레사리오)가 되어 오페라 '미친 척하는 오를란도'를 무대에 올렸습니다.작곡뿐만 아니라 오페라 제작과 극장 운영까지 도맡으며 베네치아 오페라계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습니다.
기존 형식을 뛰어넘는 파격적이고 자유분방한 양식을 선보이며 비발디 특유의 독창성을 과시했습니다.
1716
[오라토리오 '승리한 유디트' 초연]
베네치아가 오스만 제국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오라토리오 '승리한 유디트'를 피에타에서 초연했습니다.현존하는 비발디의 유일한 오라토리오로, 피에타 고아원 소녀들의 뛰어난 연주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작곡된 대작입니다.
1718
[만토바 궁정 악장 부임]
만토바의 필립 공작에게 고용되어 3년간 궁정 악장(Maestro di Cappella da Camera)으로 일했습니다.이 시기에 만토바의 전원 풍경을 접하며 훗날 '사계'를 작곡하는 데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723
비발디가 여행 중일 때도 우편으로 곡을 보내는 조건이었으며, 이 계약 덕분에 방대한 양의 협주곡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1724
로마 체류 기간 동안 여러 오페라를 성공시키며 종교 도시에서도 명성을 떨쳤습니다.
1725
[작품 번호 8번 '화성과 창의의 시도' 출판]
그 유명한 '사계'가 포함된 협주곡집 '화성과 창의의 시도(Il cimento dell'armonia e dell'invenzione)'를 출판했습니다.계절의 변화를 음악으로 묘사한 '사계'는 표제 음악의 효시로 평가받으며, 비발디를 상징하는 대표작이 되었습니다.
1726
안나 지로는 비발디의 수제자이자 프리마 돈나로, 비발디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오페라 여행에 동행하며 수많은 루머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습니다.
1727
[작품 번호 9번 '라 체트라' 출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에게 헌정한 협주곡집 '라 체트라(La cetra)'를 출판했습니다.황제와의 친분을 과시하고 빈 궁정과의 연결 고리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1728
황제는 비발디에게 많은 상금을 하사하고 빈으로 초청했습니다. 이는 훗날 비발디가 빈으로 이주를 결심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1730
이탈리아 내에서의 인기가 시들해지자 해외에서 새로운 기회를 모색했던 시기입니다.
1735
하지만 잦은 여행과 오페라 활동으로 인해 고아원 측과의 관계가 예전만큼 원만하지는 않았습니다.
1737
사제임에도 미사를 집전하지 않고 안나 지로와 동행한다는 이유였습니다. 이로 인해 기획했던 오페라 공연이 무산되면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었습니다.
1738
[암스테르담 극장 100주년 기념 연주]
암스테르담 스하우뷔르흐 극장 개관 10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에 초청되어 연주했습니다.그의 명성이 북유럽에서는 여전히 높았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나, 고향 베네치아에서는 이미 한물간 작곡가 취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1740
재정적 어려움을 타개하고 황제의 후원을 기대하며 떠났으나, 도착 직후 황제가 사망하면서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1741
그는 빈민 묘지에 초라하게 묻혔으며, 당시 그의 죽음은 유럽 음악계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잊혀졌습니다.
1926
수도원 등에 흩어져 있던 악보들이 발견되면서 20세기 비발디 부활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939
잊혀졌던 비발디의 음악이 현대에 정식으로 복원되어 연주된 상징적인 행사로, 이후 비발디는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클래식 작곡가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