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타가와 류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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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설가 문학가(시인/소설가)

일본 근대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고전 설화에서 영감을 얻어 시대를 초월한 단편 소설들을 주로 저술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문하에서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라쇼몬', '코', '지옥변' 등 수많은 걸작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말년에는 신경쇠약과 불면증에 시달리다 35세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이름을 기리는 아쿠타가와 상은 현재 일본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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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92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탄생]

도쿄에서 우유 판매업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머니의 정신질환으로 인해 생후 7개월 만에 외가에 맡겨져 백모의 양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1892년 3월 1일 도쿄에서 우유 판매업자 니하라 도시조와 후쿠 사이에서 니하라 류노스케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출생 당시 어머니 후쿠는 큰누나 하쓰의 요절 충격으로 정신장애를 겪고 있어 류노스케를 양육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생후 7개월 된 류노스케는 도쿄시 혼죠구 고이즈미쵸에 있던 외가 아쿠타가와 집안에 맡겨져 백모 후키의 손에 양육되었습니다.

1902

[어머니 사망]

11살이 되던 해, 정신 질환을 앓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11살이 되던 1902년에 어머니가 끝내 사망하였습니다.

1903

[외가에 입양, 아쿠타가와 성 사용]

어머니 사망 이듬해, 외삼촌 아쿠타가와 미치아키의 양자가 되어 '아쿠타가와' 성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에도 시대부터 예술을 사랑하던 문인적 가풍의 집안에서 성장할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902년 어머니의 사망 이듬해, 그는 외삼촌이자 도쿄시의 토목과장을 지냈던 아쿠타가와 미치아키의 양자가 되어 아쿠타가와 성을 쓰게 됩니다. 아쿠타가와 집안은 에도 시대 사족으로서 도쿠가와 집안을 섬기며 다도 관련 업무를 담당했고, 예술과 연예를 애호하는 에도의 문인적 취미가 남아있던 집안이었습니다.

1910

[제1고등학교 입학]

도쿄부립 제3중학교를 성적 우수자로 졸업하고, 시험 없이 제1고등학교 제1부 을류에 입학했습니다.

도쿄부립 제3중학교를 성적우수자 상장을 받고 졸업한 후, 당시 중학교 성적 우수자에게 고등학교 시험 면제를 허용하는 제도 덕분에 1910년 제1고등학교 제1부 을류에 시험 없이 입학했습니다. 이때 기쿠치 간이 동기였습니다.

1913

[동경제국대학 입학]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합격자가 몇 명밖에 나오지 않는 어려운 곳으로 유명했습니다.

1913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습니다. 이 당시 도쿄제국대학의 영문학과는 1학년 가운데 합격자가 불과 몇 사람밖에 나오지 않는 어려운 곳으로 유명했습니다.

1914

[동인지 『신사조』 통해 작가 데뷔]

대학 재학 중 고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동인지 『신사조』(제3차)를 간행하고, 필명으로 번역문을 기고한 뒤 초기작 「노년」을 발표하며 작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14년 2월에 고등학교 동창이던 기쿠치 간, 구메 마사오 등과 함께 동인지 『신사조』(제3차)을 간행하였습니다. 우선 '야나가와 다카노스케'라는 필명으로 아나톨 프랑스의 「바르타자알」, 이에이트의 「봄의 심장」의 일역을 기고한 뒤, 10월에 『신사조』가 폐간될 때까지 그의 초기작 「노년」을 동잡지에 발표하며 작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15

[「라쇼몬」 발표와 나쓰메 소세키 문하 입문]

『데이코쿠 분가쿠』에 본명으로 대표작 「라쇼몬」을 발표했으며, 급우의 소개로 당대 최고의 작가 나쓰메 소세키 문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1915년 10월, 『데이코쿠 분가쿠』(帝國文學)에 그의 대표작 「라쇼몬」(羅生門)을 본명으로 발표했습니다. 또한 급우였던 스즈키 미에키치의 소개로 당대 일본 문단의 거장 나쓰메 소세키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916

[「코」로 문단 주목, 첫 단편집 『라쇼몽』 출간]

제4차 『신사조』 창간호에 「코」를 발표, 나쓰메 소세키로부터 "문단에 유례없는 작가가 될 것"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문단 진출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해군기관학교 영어 교관으로 임용되었으며, 이듬해 5월 첫 단편집 『라쇼몽』을 간행했습니다.

1916년 제4차 『신사조』를 발간하고 그 창간호에 실었던 「코(원제: 鼻)」는 "문단에 유례없는 작가가 될 것"이라는 나쓰메 소세키의 격찬을 받아 문단 진출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 해에 대학을 20인 중 2등의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졸업 논문은 「윌리엄 모리스 연구」였습니다. 12월, 해군기관학교 영어 교관을 맡아왔던 아사노 가사부로의 후임으로 촉탁 교관(담당은 영어)으로서 근무하였습니다. 그 틈틈이 창작에 힘써 이듬해 5월에는 첫 단편집 『라쇼몽』을 간행했고, 11월에는 두 번째 단편집 『담배와 악마』를 발간했습니다.

1917

[해군기관학교 퇴직 및 마이니치 신문 입사]

해군기관학교 교직을 물러나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에 입사하며 본격적인 창작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습니다. 출근 의무 없이 신문에 기고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1917년 3월에 해군 기관 학교의 교직을 물러나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에 입사하였습니다. 이는 신문에 기고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고 출근 의무는 없어 본격적인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습니다. 그의 스승인 나쓰메 소세키도 10년 전인 1907년에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한 바 있습니다.

1919

[쓰카모토 후미와 결혼]

친구의 조카인 쓰카모토 후미와 결혼하며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1919년 3월 12일에 친구 야마모토 기요시의 조카(누나의 딸)이었던 쓰카모토 후미와 결혼하였고, 이듬해 3월 30일에 장남 히로시가 태어났습니다.

1921

[중화민국 방문 및 건강 악화 시작]

해외 특파원 자격으로 중화민국을 방문하여 후스와 검열 문제를 토론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으나, 이때부터 신경쇠약과 장카타르 등의 병을 앓기 시작하며 심신이 쇠약해졌습니다.

1921년, 해외 특파원으로서 중화민국을 방문하였고, 베이징에서는 후스를 만나 검열의 문제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습니다. 7월에 귀국한 그는 「상해유기」 등의 기행문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중화민국 방문 이후로 아쿠타가와는 신경쇠약, 장카타르 등의 병을 얻는 등 점차 심신이 쇠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해군 대학교 퇴직 및 오사카 마이니치 객외 사원]

요코스카카이 해군 대학교를 퇴직하고, 친구 기쿠치 간과 함께 오사카 마이니치의 객외 사원이 되었습니다.

1921년 2월에 요코스카카이 해군 대학교를 퇴직하고, 기쿠치 간과 함께 오사카 마이니치의 객외 사원이 되어, 본래 거주하던 가마쿠라에서 도쿄부 기타토시마 군 다키노가와초로 돌아옵니다. 동년 5월에는 기쿠치와 함께 나가사키를 여행했고, 친구인 화가 곤도 고이치로로부터 극작가 나가미 도쿠타로를 소개받기도 했습니다.

1923

[건강 악화와 작품 변화, 간토 대지진 자경단 활동 논란]

신경쇠약 등으로 유가와라마치에서 온천 치료를 받는 등 건강이 악화되어 작품 수가 줄어들고 사소설적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해에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당시 자경단원으로 활동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무자비한 학살 경험 후 활동을 접었다고 전해집니다.

1923년에는 유가와라마치로 온천 치료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작품수도 줄어들기 시작하여 이른바 '호키모노' 등의 사소설적 경향의 작품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러한 흐름은 만년작 「톱니바퀴」, 「갓파」 등으로 이어집니다. 이 해 일본을 강타했던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주동 세력인 자경단의 단원으로 활약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무자비한 학살 첫날 밤 후 그 경험이 너무나도 잔인하고 공포스러워서 자경단 활동을 접었다고 합니다.

1925

[문화학원 문학부 강사 취임]

문화학원 문학부 강사로 취임하여 문학적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25년경에 아쿠타가와는 문화학원 문학부 강사로 취임하였습니다.

1926

[위궤양 등 질병 악화로 요양]

위궤양, 신경쇠약, 불면증이 다시 심해져 유가와라 등지에서 요양하며 건강 문제로 고통받았습니다.

1926년부터 위궤양에 신경쇠약과 불면증이 다시 심해져 유가와라에서 요양해야 했습니다. 아내 후미도 남동생과 함께 요양을 위해 친가 소유의 별장으로 이주했습니다. 2월 22일, 류노스케도 구게누마의 여관에 머무르며 그곳으로 처자를 불러왔습니다.

1927

[의형의 자살로 인한 책임 떠맡음]

의형이 방화 및 보험금 사기 혐의로 자살하면서, 그가 남긴 빚과 가족을 떠맡아야 하는 경제적, 정신적 부담을 겪게 되었습니다.

1927년 1월, 의형 니시카와 유타카가 방화와 보험금 사기 혐의로 철도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바람에 아쿠타가와는 니시카와가 남긴 빚이나 가족을 떠맡아야 했습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문예 논쟁]

「문예적인, 너무 문예적인」이라는 평론에서 '이야기의 재미'를 주장하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에 맞서 '이야기의 재미'가 소설의 질을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반론하며 일본 문학사상 유명한 논쟁을 펼쳤습니다.

1927년 4월부터 「문예적인, 너무 문예적인」이라는 문예평론에서 '이야기의 재미'를 주장하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에 맞서 '이야기의 재미'가 소설의 질을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반론해, 훗날 패전 뒤에 일본에서 벌어질 이야기 비판적인 문단의 메인 스트림을 예견한 일본문학사상 유명한 논쟁을 펼칩니다. 여기서 아쿠타가와는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없다」 순수한 소설의 명수로서 시가 나오야를 칭찬했습니다.

[동반 자살 시도]

비서와 함께 데이코쿠 호텔에서 동반 자살을 약속했으나, 상대방의 변심으로 실패했습니다.

1927년 4월 7일, 부인의 동창생으로 아쿠타가와 자신의 비서로 있던 히라마쓰 마쓰코와 데이코쿠 호텔에서 함께 동반 자살을 약속하였으나 여자가 변심하는 바람에 실패하였습니다.

['막연한 불안' 속에 자살]

「속 서방의 사람」을 완성한 뒤, "막연한 불안"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치사량의 수면제를 복용하여 35세의 나이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1927년 7월 24일 새벽, 「속(續) 서방의 사람」를 모두 쓴 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사이토 모키지로부터 받아온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습니다. 그가 밝힌 자살 이유는 '막연한 불안'이었습니다.

1935

[아쿠타가와 상 제정]

그가 죽은 지 8년 후, 친구 기쿠치 간에 의해 그의 이름을 딴 아쿠타가와 상이 제정되었습니다. 이 상은 현재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신인 작가의 등용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죽은 지 8년 후인 1935년 친구이며 분게이슌주 사주였던 기쿠치 간에 의해 그의 이름을 딴 아쿠타가와 상이 제정되었습니다. 이 상은 현재 일본의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으로 신인 작가의 등용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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