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스터리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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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 전투
전투, 나폴레옹 전쟁, 제3차 대프랑스 동맹, 프랑스 제1제국 + 카테고리
1805년 12월 2일, 현재의 체코 모라비아 남부 아우스터리츠 인근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 대육군이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의 연합군을 상대로 거둔 역사적인 대승입니다. 이른바 '세 황제의 전투'로 불리는 이 격전에서 나폴레옹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치밀한 기만전술과 우익의 유인, 그리고 프라첸 고지를 장악하는 중앙 돌파를 통해 적군을 완벽히 포위하고 궤멸시켰습니다. 9시간의 피열한 사투 끝에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은 와해되었고, 프레스부르크 평화 조약 체결,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 및 라인 동맹 창설로 이어지며 나폴레옹이 유럽의 패권을 확고히 쥐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 사관학교에서 필수적으로 가르칠 만큼 위대한 군사 전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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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04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

아우스터리츠 전투가 벌어지기 정확히 1년 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 제국의 황제로 즉위합니다. 이 대관식은 훗날 그가 거둘 역사적인 승리의 상징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 됩니다.
이 날은 우연히도 훗날 아우스터리츠에서 '세 황제'가 격돌하고 대승을 거두는 날과 일치하게 되어, 나폴레옹의 대관식 1주년을 기념하는 가장 영광스러운 승전일로 역사에 남게 됩니다.

1805

[트라팔가 해전 발발]

영국 해군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이로 인해 영국은 바다에서의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해상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지상전 참여는 이탈리아와 북독일에서의 소규모 파병에 그쳤습니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나폴레옹 제국에 홀로 맞서며 동맹국들의 육상 전투를 자금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지속하게 됩니다.

[대육군의 오스트리아 국경 진입]

울름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항복을 받아낸 나폴레옹은 약 20만 명의 대육군을 이끌고 신속하게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진격합니다. 이들은 도나우강을 따라 이동하며 전략적 요충지들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프랑스군의 거침없는 진격에 오스트리아군은 병력을 재정비하고 미하일 쿠투조프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 원군과 합류하기 위해 끝없이 후퇴해야만 했습니다.

[뒤렌슈타인 전투]

오스트리아 동맹군의 후퇴와 맞물려, 모라비아 방면으로 이동하던 러시아군과 추격하는 프랑스군 간에 뒤렌슈타인 지역에서 전투가 발생합니다.
러시아군의 사령관 쿠투조프는 후속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나폴레옹과의 전면전을 피하고자 지연 전술을 쓰며 계속해서 후퇴를 감행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의 빈 무혈 입성]

오스트리아군의 철수로 무방비 상태가 된 제국의 수도 빈에 프랑스군이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고 당당히 입성합니다.
나폴레옹은 빈을 점령함으로써 막대한 무기고와 예비 물자를 손에 넣었으며, 이를 통해 다가올 대규모 회전을 위한 군대의 보급과 전력을 크게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쇤그라베른 전투]

빈 점령 직후, 지연전을 펼치던 쿠투조프의 러시아군 예하 부대와 프랑스군이 쇤그라베른에서 다시 한 번 교전을 벌입니다.
러시아군은 동맹군 주력 부대와의 합류를 달성하기 위해 프랑스군의 추격을 따돌리며 소규모 전투로 출혈을 강요하는 전략을 계속해서 이어나갔습니다.

[연합군의 비샤우 집결]

끊임없이 후퇴하던 쿠투조프의 부대가 마침내 비샤우에 도착하여 북스회프덴의 병력 및 요한 폰 리히텐슈타인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과 성공적으로 합류합니다.
이 합류로 인해 연합군은 8만 5천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형성하게 되었고, 프랑스군에 맞설 실질적인 수적 우위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결전을 앞둔 궂은 날씨]

아우스터리츠 주변 전장의 기온이 1.1°C로 떨어지고 약한 바람과 함께 비와 안개가 내리며 기상 조건이 악화됩니다.
추운 날씨와 축축한 안개는 전장으로 모여드는 양측 군대 모두의 행군과 시야 확보를 방해하며 음산한 전운을 드리웠습니다.

[전장에 내린 눈]

기온이 2.0°C를 가리키는 가운데 전장 일대에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양측 병사들을 괴롭혔습니다.
프랑스군과 연합군은 진흙과 눈보라가 섞인 혹독한 환경 속에서 각자의 진영을 구축하고 거대한 충돌을 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투 전야의 비바람]

기온이 2.5°C를 기록하고 중간 세기의 바람과 함께 비가 쏟아지며 전투 하루 전 전장의 긴장감이 극에 달합니다.
비로 인해 진창이 된 땅은 다음 날 기병대와 대포의 이동을 어렵게 만들 수 있었으며, 이는 전술적 변수로 작용할 상황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작전 지시 하달]

저녁 8시 30분경, 나폴레옹이 휘하 장군들에게 다음 날 펼칠 치밀한 전투 계획을 최종적으로 하달합니다.
이 계획에는 술트와 란 원수의 군단으로 프라첸 고지를 점령하는 한편, 다부와 베르나도트 군단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7만 5천 명의 병력으로 적의 허를 찌른다는 전략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연합군 8만 5천 명의 집결 완료]

저녁 무렵, 총 85,000명의 병력과 278문의 포를 앞세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동맹군의 배치가 전장에 모두 완료됩니다.
연합군 지휘부는 압도적인 대포의 화력과 수적 우위를 맹신하며 다가올 전투에서 수월한 승리를 거둘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크레노비츠에서의 연합군 작전 회의]

연합군 본부가 차려진 크레노비츠 마을에서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가 참석한 가운데 전술 회의가 열립니다.
프란츠 1세는 신중한 접근을 제안했지만, 젊은 참모들의 부추김을 받은 알렉산드르 1세가 즉각적인 전면 공격을 강력히 주장하여 오스트리아 참모장 베이로테르의 7개 종대 분할 공격안이 채택되었습니다.

[안개와 비 속의 개전]

결전의 아침, 기온은 5.2°C로 다소 풀렸으나 약한 바람과 함께 짙은 안개와 비가 전장을 뒤덮은 채 세 황제의 전투가 막을 올립니다.
이 짙은 아침 안개는 프랑스군의 위치와 이동을 절묘하게 가려주었으며, 나폴레옹이 준비한 중앙 돌파의 기습적인 효과를 극대화하는 자연의 장막 역할을 했습니다.

[텔니츠 마을의 방어전 시작]

오전 7시, 남쪽 전선에서 연합군의 킨마이어 선봉대가 프랑스군이 지키고 있는 텔니츠 마을을 향해 선제공격을 가합니다.
프랑스 제3 전열보병 연대와 코르시카 경보병 대대는 자신들의 모습을 숨겨주는 지형지물을 교묘히 활용해 연합군의 거듭된 초기 돌격을 끈질기게 막아냈습니다.

[도흐투로프 종대의 도착과 프랑스군의 후퇴]

오전 8시, 도흐투로프 중장이 이끄는 1만 3천 명의 제1종대가 텔니츠에 당도하여 파상 공세를 펼치자 프랑스군 방어선이 밀리며 철수하게 됩니다.
골트바흐 개울을 넘어선 연합군 기병대 14개 대대가 평야로 쏟아져 들어오며 마르가롱 장군의 프랑스 경기병대를 거세게 몰아붙여 우익을 위협했습니다.

[프리앙 장군 부대의 극적인 합류와 반격]

다부 원수 예하의 프리앙 장군이 그로스라이게른에서 강행군으로 전장에 도착하여 붕괴 위기에 처한 우익을 구하고 소콜니츠 마을로 반격을 가합니다.
보병 5개 연대와 용기병 6개 연대로 구성된 이들의 적시 도착으로 전열이 정비되었으며, 소콜니츠 일대에서 연합군 대부대를 상대로 지독한 소모전이 이어졌습니다.

[술트 원수의 중앙 돌파 개시]

오전 9시, 프랑스군의 우익이 연합군 주력을 묶어두는 틈을 타 나폴레옹의 명령을 받은 술트 원수가 텅 빈 적의 중앙 고지를 향해 진격을 개시합니다.
방담 사단과 생틸레르 사단은 짙은 안개 속에서 밀집 대형을 유지한 채 험준한 계곡과 골트바흐 개울을 지나 전략적 요충지인 프라첸 고지로 치고 올라갔습니다.

[프라첸 고지에서의 기습 조우전]

오전 10시경, 멀리서 교전 소음을 들은 러시아의 세르게이 카멘스키가 독자적 판단으로 예하 여단을 프라첸 고지로 이끌어 모랑 장군의 대대와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갑작스러운 적의 출현에 프랑스의 생틸레르 장군은 재빨리 예하 대대를 남동쪽으로 재배치하고 포병 화력을 모랑에게 집중시켜 이 위협을 방어해야 했습니다.

[리히텐슈타인 흉갑기병대의 역습]

오전 10시 30분, 오스트리아의 리히텐슈타인 장군이 이끄는 기병대가 베르나도트 군단의 보병대를 향해 거센 돌격을 감행합니다.
제7 로렌 흉갑기병 연대가 치열한 사격망을 뚫고 돌진했으나 큰 손실을 입었고, 이어진 공격 역시 프랑스군의 진격을 고작 30분 정도 지연시키는 데 그쳤습니다.

[바그라티온 장군의 보제니츠 견제 공격]

오전 11시, 북쪽 전선에서 연합군의 바그라티온 장군이 프랑스군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보제니츠 마을을 향한 견제 공격을 지시합니다.
러시아의 제5 엽병 연대가 산톤 고지로 접근했으나, 참호에 단단히 자리 잡은 프랑스 제17 경보병 연대의 정밀한 일제 사격에 가로막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했습니다.

[블라지오비츠 점령과 연합군의 분단]

오전 11시 30분, 프랑스군의 리보 사단이 블라지오비츠 마을을 장악하며 콘스탄틴 대공의 방어선과 연합군 본대 사이에 커다란 간격을 만들어냅니다.
전선 분단을 막기 위해 콘스탄틴 대공은 즉각 러시아 근위대를 투입해 총검 돌격을 지시했으나, 지친 상태로 도달한 이들은 프랑스군의 두터운 두 번째 방어선을 뚫지 못했습니다.

[러시아 제국 근위 보병대의 철수]

낮 12시 30분, 전투의 흐름이 기울자 쿠투조프의 철수 명령을 받은 콘스탄틴 대공이 부대를 재정비하여 크레노비츠 방면으로 퇴각하기 시작합니다.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철수 통로를 필사적으로 엄호하는 가운데, 가장 정예화된 러시아 근위대마저 등을 돌림으로써 연합군의 중앙은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전장을 비추는 아우스터리츠의 태양]

한낮이 되자 아침 내내 전장을 무겁게 짓누르던 짙은 안개와 비가 완전히 걷히고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후일 나폴레옹이 1812년 모스크바 원정 직전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외쳤던 유명한 명언인 '저것이 아우스터리츠의 태양이다!'라는 상징적인 구절이 탄생한 순간입니다.

[9시간의 혈투와 궤멸적인 대승]

오전부터 시작된 약 9시간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 끝에, 수적 열세를 안고 싸운 프랑스 대육군이 연합군을 완벽히 쪼개고 포위하여 결정적인 대승을 거둡니다.
연합군은 무려 13,000명의 사상자와 11,500명의 포로, 대포 180문과 45개의 군기를 상실하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으며,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다 익사한 사상자도 다수 발생했습니다.

[전투 다음 날의 눈]

참혹한 전투가 끝난 바로 다음 날, 기온이 2.5°C를 기록하는 가운데 시체와 잔해로 뒤덮인 전장 위로 다시 하얀 눈이 흩날립니다.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프랑스군과 달리,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 패잔병들은 이 춥고 험난한 날씨 속에서 뿔뿔이 흩어져 도주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제국 야영지 승전 연설]

승리를 거둔 나폴레옹이 아우스터리츠 야영지에서 병사들의 경이로운 노고를 치하하는 역사적인 연설문을 발표합니다.
'병사들이여, 나는 너희들이 자랑스럽다'로 시작하는 이 연설에서 그는 단 4시간 만에 적군을 해체시킨 그들의 용맹을 극찬하며, 고국에 돌아가면 엄청난 환대를 받을 것이라고 칭송했습니다.

[프레스부르크 평화 조약 체결]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치명적인 참패로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능력을 상실한 오스트리아 제국이 결국 프랑스와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맺습니다.
이 조약의 결과로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은 완전히 해체되었으며, 유럽의 지정학적 권력 구도가 나폴레옹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재편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806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적 해체]

전투의 여파와 조약의 압박 속에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가 마침내 제위를 포기함으로써, 천 년 가까이 존속해 오던 신성 로마 제국이 붕괴합니다.
유럽 대륙을 상징하던 중세의 낡은 체제가 사라지고 나폴레옹 제국 중심의 새로운 질서가 완전히 자리 잡게 된 거대한 정치적 지진이었습니다.

[라인 동맹의 창설]

신성 로마 제국이 무너진 자리에 프랑스 제국의 절대적인 보호와 통제를 받는 독일계 소국들의 정치 연합체인 '라인 동맹'이 세워집니다.
이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거둔 압도적 군사적 승리가 낳은 최대의 지정학적 전리품으로, 나폴레옹이 중부 유럽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권을 확립했음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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