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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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신학자, 철학자, 성인, 교부, 주교 + 카테고리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 기독교의 위대한 교부이자 신학자로 그의 사상은 서양 철학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탄생시켰습니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과 하느님의 은총을 강조한 그는 사도 바울로에 버금가는 평가를 받으며 중세 스콜라 학풍과 종교 개혁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고백록을 통해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이 상세히 전해지며 말년에는 피난민을 돌보다 생을 마감한 이웃 사랑의 상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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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354

[아우구스티누스 탄생]

로마 제국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에서 이교도 아버지와 그리스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354년 11월 13일 오늘날의 알제리에 해당하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인 북아프리카의 소도시 타가스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였으나, 어머니 모니카는 그리스도인이었다. 어머니 모니카는 그를 교육했으나 어렸을 때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370

[카르타고 유학과 철학 심취]

집안 형편이 나아지자 16세에 카르타고로 유학하여 수사학을 배웠고, 키케로의 글을 읽고 철학에 깊이 심취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향과 인근 마다우로스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카르타고에서 공부하려 했으나 집안 형편으로 잠시 중단했다. 370년 집안 사정이 나아지자 아버지는 16살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수사학을 배우게 하기 위해 카르타고로 유학을 보냈다. 카르타고에서 그는 키케로의 글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철학에 심취하게 된다.

371

[마니교 활동과 동거 및 아들 출산]

어머니의 바람과 달리 마니교의 이성적 교리에 매력을 느껴 약 10년간 마니교도로 지냈으며, 17세에 한 여성과 14년간 동거하며 아들 아데오다투스를 낳았다.

어머니 모니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과 같은 그리스도교인이 되기를 원했지만, 당시 철학에 심취해 있던 그는 마니교의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교리에 매력을 느껴 마니교도로서 10여년을 머무르기도 하는 등, 마니교를 지지하여 실질적으로 기독교 보편교회의 신앙을 거부했다. 또, 이 시기 열입곱 살에 그는 한 젊은 여성과 동거생활을 시작하여, 그가 정혼하기전까지 14년 동안 같이 살면서 '아데오다투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어머니 모니카는 이러한 아들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어 아들과 절교를 선언한다.

380

[『아름다움과 조화에 대하여』 저술]

밀라노에 있을 때 『아름다움과 조화에 대하여』를 저술하며 신학적, 철학적 사색의 깊이를 더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380년에 저술한 『아름다움과 조화에 대하여』(De Pulchra et Apto)는 그의 초기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저서 중 하나이다.

383

[마니교와의 결별 및 신플라톤주의 수용]

마니교 지도자들의 지적 수준에 회의를 느끼고 마니교를 떠나 잠시 신플라톤주의자(386년경)가 되었으며, 이후 타가스테, 카르타고, 로마, 밀라노 등에서 수사학과 철학을 가르쳤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곧 마니교 지도자들의 지적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을 알고 회의를 느껴 잠시 신플라톤주의자가 되었다가, 마니교도 동료의 추천으로 타가스테, 카르타고, 로마, 밀라노 등에서 수사학과 철학을 가르쳤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와 결별하고 신플라톤주의를 수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그가 밀라노에 머물던 때입니다.


그의 지적 여정의 전환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니교와의 결별:

383년, 그가 로마로 여행했을 때 마니교에 대한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384년, 밀라노에서 마니교 지도자인 파우스투스(Faustus)를 만났으나 그에게서 지적인 만족을 얻지 못하면서 마니교에 대한 신뢰를 잃고 마니교 '청자(hearer)' 신분을 포기했습니다.

신플라톤주의의 수용:

386년경, 밀라노에서 플로티노스(Plotinus)를 비롯한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저서를 읽고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신플라톤주의 철학은 그가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악의 문제를 이원론(선/악의 두 원리)이 아닌 '선(善)의 결핍'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도록 도왔으며, 하느님의 비물질적인 본성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종합적으로, 384년에 마니교와 결별하고, 386년에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기독교로 개종하는 데 결정적인 지적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384

[밀라노 암브로시우스 주교와의 만남]

밀라노에서 뛰어난 언변의 주교 암브로시우스를 만나 그의 강론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결심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의 주교인 성 암브로시우스를 만났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이, 수사학이나 철학에도 능한 언변의 달인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강론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아 그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에서 수사학 교사 자리를 얻지 못하고 밀라노로 옮겨와 384년에 암브로시우스 주교를 만났습니다.


만남 시기: 384년


배경: 아우구스티누스가 384년경 밀라노의 수사학 교수로 임명되면서 밀라노에 도착했고, 밀라노의 주교였던 성 암브로시우스를 찾아가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처음에는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그의 웅변술 때문에 듣기 시작했지만, 점차 그의 설교 내용을 통해 기독교 교리에 대한 오해를 풀고 신앙으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됩니다.


386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세례 받음]

심한 내적 갈등 끝에 사도 바울로의 로마서 말씀을 통해 회심을 결심하고, 부활주일에 아들 아데오다투스, 알리피우스와 함께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한동안 심한 내적 갈등을 겪은 끝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결국 387년 부활주일 날에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알리피우스(훗날 다가스테의 주교)와 함께 성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실제 암브로시우스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은 그 후인 387년 부활절 전야 (4월 24일 밤~25일 새벽)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게 된 사건이 회심의 계기라는 설도 있다. 그것은 그가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집어들고 읽으라! 집어들고 읽으라!”라는 어린 아이의 노랫소리를 듣고,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3장 13절~14절을 읽으며,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카데미아 학파 반박』 저술]

철학적 회의주의를 극복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을 담은 『아카데미아 학파 반박』을 저술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86년에 『아카데미아 학파 반박』(Contra Academicos)을 저술하여 당시 지배적이던 아카데미아 학파의 회의주의에 반론을 제기하며 그의 철학적 입장을 정립했다.

387

[『영혼불멸론』 저술]

아우구스티누스가 『영혼 불멸론』(De immortalitate animae)을 저술한 시기는 386년 말에서 387년 초 사이입니다. 

387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불멸론』(De immortalitate animae)을 저술하여 영혼의 본질과 불멸성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담아냈다.


배경: 이 책은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기 위해 카시키아쿰(Cassiciacum)의 별장에서 머무는 동안 집필한 초기 철학적 대화편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특징: 이 저서는 『고독(Soliloquia)』의 제3권을 구상하던 중에 작성된 것으로, 영혼의 불멸성을 이성적인 논증을 통해 증명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으며,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줍니다.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세례 받음]

심한 내적 갈등 끝에 사도 바울로의 로마서 말씀을 통해 회심을 결심하고, 부활주일에 아들 아데오다투스, 알리피우스와 함께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한동안 심한 내적 갈등을 겪은 끝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결국 387년 부활주일 날에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알리피우스(훗날 다가스테의 주교)와 함께 성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실제 암브로시우스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은 그 후인 387년 부활절 전야 (4월 24일 밤~25일 새벽)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게 된 사건이 회심의 계기라는 설도 있다. 그것은 그가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집어들고 읽으라! 집어들고 읽으라!”라는 어린 아이의 노랫소리를 듣고,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3장 13절~14절을 읽으며,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머니 모니카 사망]

세례 후 북아프리카로 낙향하던 중 오스티아에서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세상을 떠났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인 성녀 모니카는 아들의 세례를 받은 후 아프리카로 돌아가던 중 387년에 사망했습니다.


사망한 정확한 날짜는 자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387년 8월 또는 11월로 추정됩니다.


사망 연도: 387년

사망 장소: 로마의 항구 도시인 오스티아(Ostia)


세례와의 관계: 아우구스티누스가 387년 부활절에 세례를 받은 후, 모니카는 아들의 회심이라는 평생의 기도를 이룬 것에 만족하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저서 『고백록』에 어머니의 마지막 대화와 임종에 대해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388

[아들 아데오다투스 사망과 수도 생활 전념]

고향으로 돌아온 후 아들 아데오다투스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동료들과 수도회를 설립하며 수도자 생활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388년 고향에 돌아온 후, 아들 아데오다투스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지만, 고향에 돌아온 아우구스티누스는 동료들과 스스로 수도회를 설립하는 등 수도자 생활에 전념한다.


그는 어머니 모니카가 사망(387년)한 후 북아프리카의 고향인 타가스테(Tagaste)로 돌아와, 그의 부모님 집을 공동 주택으로 사용하여 동료들과 함께 평신도 수도 공동체(Lay Monastery)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 공동체는 기도, 학습(특히 성경 연구), 그리고 검소한 공동생활에 전념했습니다.

이후 391년에 사제로 서품된 후에는 히포에 사제들을 위한 수도원(Clerical Monastery)을 세웠고, 이것이 훗날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391

[사제 서품 및 이단 교리 비판]

북아프리카 히포 레기우스에서 발레리우스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고, 과거 몸담았던 마니교와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주의를 단호히 비판하는 설교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391년 북아프리카의 도시 히포 레기우스에서 발레리우스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받은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 자기가 몸 담았던 마니교를 비판하는 등 많은 설교 활동도 했으며,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해서도 단호히 반대하였다. 그는 인간의 공로보다 하느님의 은총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은총론, 신학적 인식론, 교회론, 영성신학 등의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중세 초기부터 은총론을 둘러싼 신학 논쟁에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심지어 종교 개혁 시기의 개신교 선구자인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 등도 그의 은총론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근대에 들어와 얀센주의자들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을 지지하였다.

395

[히포 교구 공동 주교로 선출]

발레리우스 주교의 노쇠함에 따라 히포 교구의 공동 주교로 선출되어 4년간 보좌했다.

395년 발레리우스 주교가 노쇠하자 그의 공동 주교로 선출되어 4년 동안 주교를 보좌하였다.

[『자유의지론』 저술]

인간의 자유의지와 악의 기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룬 『자유의지론』을 집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95년에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을 저술하여 인간의 자유의지와 악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신학적 문제를 탐구하며 그의 중요한 사상을 제시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은 388년부터 395년 사이에 걸쳐 집필되었습니다.

집필 시작: 388년 (밀라노에서 북아프리카로 돌아온 직후)

집필 완료: 395년 (히포의 주교가 되기 직전 또는 직후)

이 책은 그가 기독교로 회심한(386년) 직후에, 악의 문제에 대한 마니교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집필을 시작한 초기 철학적 대화편입니다.

396

[히포 교구 주교로 취임]

전임 발레리우스 주교가 사망하자 히포 교구의 주교가 되어 평생 동안 히포 교회와 북아프리카 교회를 사목하며 이끌었다.

396년 전임 발레리우스 주교가 죽자 히포 교구의 주교가 되어 평생동안 히포 교회와 북아프리카 교회를 위해 사목하였다.

398

[『고백록』 저술]

그의 삶과 회심 과정을 담은 자서전적 고백이자 기독교 문학의 걸작인 『고백록』을 집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98년에 『고백록』(Confessiones)을 저술했다. 이 책은 그의 젊은 시절 방황, 마니교와 신플라톤주의를 거쳐 기독교로 회심하는 과정을 진솔하게 고백한 자서전으로, 서양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400

[『복음의 조화에 관하여』 저술]

네 복음서의 내용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설명하며 복음서 간의 차이에 대한 이해를 돕는 『복음의 조화에 관하여』를 집필했다.

400년 경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복음의 조화에 관하여』(De consensu evangeliorum)를 저술하여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가 겉으로는 다르게 보일 수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서로 조화를 이루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증언하고 있음을 논증했다.

412

[『인내론』 저술]

기독교적 미덕인 인내에 대한 중요성과 가치를 논한 『인내론』을 저술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412년에 『인내론』(De patientia)을 저술하며, 신앙인으로서 인내의 덕목이 갖는 의미와 그 실천적 중요성을 강조했다.

414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 저술]

창세기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그 신학적 의미를 탐구한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저술했다.

414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De Genesi ad litteram)를 집필하여 창세기 본문에 대한 심도 있는 문자적 해석을 시도하고, 이를 통해 신학적 통찰을 제공했다.

416

[『자연과 은총에 관하여』 저술]

펠라기우스주의에 반대하여 인간의 구원에 있어 자연적 능력보다 하나님의 은총의 중요성을 강조한 『자연과 은총에 관하여』를 저술했다.

416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과 은총에 관하여』(De natura et gratia)를 저술했다. 이 책은 펠라기우스주의의 선행구원론에 반대하며, 인간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 있음을 강력히 변호하는 그의 핵심 은총론을 담고 있다.

[『삼위일체론』 저술]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심오한 신학적 이해를 담은 역작 『삼위일체론』을 저술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416년에 기독교 신학의 가장 중요한 저서 중 하나인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을 저술했다. 이 책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심도 깊은 철학적, 신학적 탐구를 담고 있으며, 서방 기독교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420

[『라우렌티움에게 보내는 안내서』 저술]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리들을 간결하게 설명하여 평신도들을 위한 신앙 안내서 역할을 한 『라우렌티움에게 보내는 안내서』를 저술했다.

420년 이후 (420년 ~ 426/427년 사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라우렌티움에게 보내는 안내서』(Enchiridion ad Laurentium)를 저술했다. 이 책은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세 가지 핵심 덕목을 중심으로 기독교 교리를 요약하고 설명한 것으로, 평신도들이 신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여졌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년의 사상이 담겨 있다.

426

[『기독교 교양』 저술]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기독교적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을 제시한, 기독교 최초의 해석학적 저서인 『기독교 교양』을 저술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426년에 『기독교 교양』(De doctrina Christiana)을 저술했다. 이 책은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며, 기독교 지식과 교육에 대한 그의 사상을 담고 있어 서방 교회의 학문적 전통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나님의 도성』 저술]

로마 제국의 멸망 원인을 기독교에서 찾는 비난에 맞서, 인간의 역사와 하나님의 섭리를 대조하며 지상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을 구분한 『하나님의 도성』을 저술했다.  총 2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426년에 『하나님의 도성』(De civitate Dei)을 저술했다. 이 책은 서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기독교가 비난받던 시기에 쓰여졌으며, 지상 도성의 한계와 하나님의 영원한 도성을 대비시키며 역사의 의미와 기독교적 세계관을 정립한 서양 철학과 신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413년에 시작하여 426년에 완료되었다. (총 13년 소요)  집필 동기는 410년 서고트족이 로마를 약탈하는 대사건이 발생하자, 이교도들이 로마 제국의 쇠퇴와 재앙이 기독교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비난에 대한 변증과 함께 인류 역사를 '지상의 도성(City of Man)'과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이라는 두 도성의 관점에서 조명하고자 이 책을 저술했다.

427

[반달족 침공 중 피난민 봉사]

반달족이 북아프리카를 침공하여 피난민들이 히포로 몰려들자, 주교로서 안전한 곳에 은둔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피난민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427년 반달족(게르만족의 한 민족)이 북아프리카를 쳐들어왔을때, 피난민들이 전쟁을 피해 아우구스티누스 주교가 살고 있던 히포에 쏟아져 들어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교였으므로 안전한 곳으로 찾아가거나, 교회에 은둔할 수도 있었지만, 기꺼이 피난민들을 위해 봉사했다.

428

[『재고록』 저술]

자신의 저작들을 다시 검토하고 수정 및 보충 설명을 추가한 『재고록』을 저술하며 평생의 학문적 여정을 마무리했다.

428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재고록』(Retractiones)을 저술했다. 이 책은 그의 이전 저작들을 재검토하고 오류를 수정하거나 추가 설명을 제공하는 자전적인 성격을 띠며, 그의 지적 정직성과 학문적 발전을 보여준다.

430

[피난민 봉사 중 사망]

피난민들을 돌보다 걸린 열병으로 76세의 일기로 히포 레기우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는 반달족이 히포를 점령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는 430년 8월 28일, 반달족이 히포를 점령하기 얼마 전(반달족의 히포 점령은 431년의 일) 피난민들을 돌보다가 걸린 열병으로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이 땅의 삶을 끝내는 순간까지도 전쟁으로 두려움에 빠진 난민들을 돌보며 피난처를 제공하였는데, 이는 "우리의 이웃이 하느님께 관심을 가질때,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는 행동은 우리를 불행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행복에 이르게 한다."는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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