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관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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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
조선 왕조, 외교사, 정치사, 국난 + 카테고리
명성황후 시해라는 전대미문의 참극 이후, 신변의 극심한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며 시작된 비극적인 생존 투쟁입니다. 일제의 마수를 일시적으로 피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대가로 서구 열강들에게 국가의 핵심 이권을 대거 내어주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1년 남짓한 도피 생활을 끝내고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기까지, 망국의 위기 속에서 자주독립을 향해 몸부림쳤던 조선 왕조의 뼈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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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95

[왕비 암살과 신변의 위협]

일본 낭인들이 궁궐에 난입하여 조선의 왕비를 무참히 시해하는 전대미문의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국왕은 궁궐 내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는 훗날 국왕이 궁궐을 버리고 도피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발생한 을미사변입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고종은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렸으며, 일제와 친일 내각에 의해 사실상 궁궐에 연금된 것과 다름없는 상태로 지내야 했습니다. 독살의 두려움 때문에 외국인 선교사가 가져다주는 자물쇠 달린 철가방 속 음식만 먹었을 정도였습니다.

[실패로 끝난 첫 번째 탈출]

일본의 감시가 심해지자 국왕을 미국이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는 비밀스러운 계획이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친위세력의 밀고로 인해 이 시도는 실행 직전 발각되어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로 인해 궁궐 내 국왕의 고립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일명 '춘생문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이범진, 이완용 등의 친러파와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 등이 합세하여 고종을 경복궁 밖으로 구출하려 한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계획에 가담했던 친위대 대대장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되었고, 관련자들은 체포되거나 해외로 망명해야 했습니다.

[전국을 휩쓴 분노의 의병]

일본의 강압 아래 전통을 훼손하는 급진적인 개혁이 단행되자 백성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무장한 백성들이 들고일어나며 사회적 혼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이 혼란은 국왕이 탈출을 결행할 수 있는 시선 분산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김홍집 내각이 음력 11월 15일을 기해 태양력을 도입하고, '단발령'을 전국에 강제 시행했습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굳게 믿던 조선 사회에서 이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을미사변의 분노와 겹쳐 전국적인 을미의병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한양의 친위대 병력까지 의병 진압을 위해 지방으로 파견되어 궁궐 수비가 헐거워졌습니다.

1896

[수도에 진입한 외세의 군대]

공사관 보호를 명목으로 무장한 외국 군대가 인천을 거쳐 수도 한복판으로 진입했습니다. 이들의 엄호 아래 치밀하게 준비된 국왕의 탈출 작전이 본격적인 막을 올릴 준비를 마쳤습니다. 일본의 삼엄한 경계망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순간이었습니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공사관 보호를 구실로 제물포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군함에서 100여 명의 수병과 포를 한성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이는 일본군에 맞서 고종의 신변을 확보하기 위한 군사적 대비태세를 갖춘 것이었으며, 탈출 하루 전날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의 도피]

국왕과 왕세자가 궁녀의 가마에 숨어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 외국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한 나라의 군주가 남의 나라 외교 공관으로 망명하듯 도피한 초유의 사태였습니다. 이로써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세력은 하루아침에 통제력을 상실했습니다.
고종과 순종(당시 왕세자)이 궁녀들의 교자에 옮겨타 건춘문을 빠져나와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아관)으로 피신한, 이른바 '아관파천'의 당일입니다. 한 나라의 국왕이 외세의 무력에 기대어 제 발로 외교 공관에 들어간 역사상 전례 없는 굴욕적인 탈출이었습니다.

[친일 내각의 몰락과 처단]

국왕의 도피 직후, 그동안 국정을 쥐고 흔들던 고위 관료들을 처단하라는 엄명이 떨어졌습니다. 분노한 군중들까지 합세하면서 총리대신을 비롯한 핵심 인물들이 길거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습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하자마자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등 친일 성향의 을미개혁 주도 관료들을 반역죄로 체포하여 처형하라는 조칙을 내렸습니다. 김홍집과 정병하는 광화문 앞에서 순검들에게 체포된 후 성난 군중들에게 돌에 맞아 비참하게 살해당했고, 그 시신마저 훼손되었습니다.

[분노를 달랜 단발령 철회]

백성들의 거센 분노를 샀던 강압적인 단발령이 국왕의 특별 지시로 즉각 철회되었습니다. 외국 공사관으로 도피한 직후 가장 먼저 민심을 달래기 위해 꺼내든 정치적 카드였습니다. 이를 통해 의병들의 해산을 유도하고 국정의 혼란을 빠르게 수습하고자 했습니다.
고종은 백성들의 가장 큰 불만이었던 단발령을 공식적으로 철회하고, 개인의 자유에 맡긴다는 조칙을 발표했습니다. 이 조치는 전국적으로 맹위를 떨치던 의병 활동의 명분을 약화시켜 지방의 혼란을 가라앉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새롭게 수립된 친러 내각]

기존 세력이 일소된 빈자리는 러시아와 미국에 우호적인 인물들로 빠르게 채워졌습니다. 국왕은 안전한 외교 공관 안에서 새 내각을 구성하여 무너진 왕권을 임시로 수습하려 했습니다. 이는 조선의 정국 주도권이 외교적으로 새롭게 재편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고종은 이범진, 이완용(당시는 친러파 및 친미파로 활동), 박정양 등을 중심으로 하는 친러·친미 연립 내각을 새롭게 구성했습니다. 이로써 갑오개혁 이후 정국을 주도하던 일본의 영향력은 급속히 축소되었고, 조선 조정의 외교적 무게추가 러시아로 완전히 기울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민간 신문 창간]

국가의 자주독립을 고취하고 백성들을 계몽하기 위해 한글로 쓰인 민간 신문이 처음으로 발행되었습니다. 외세에 의존하는 국왕의 도피 행각에 대한 백성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근대적 국가로 나아가려는 시도였습니다. 이 신문은 훗날 대중의 여론을 형성하는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서재필이 중심이 되어 순한글과 영문으로 발행한 조선 최초의 근대적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이 창간되었습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동안 내탕금(왕실 자금)을 지원하여 신문 창간을 간접적으로 도왔으며, 이를 통해 대외적으로는 독립국의 위상을 알리고 대내적으로는 민중을 계몽하고자 했습니다.

[미국에 넘어간 황금의 땅]

국왕을 보호해 준 대가로 서구 열강들의 본격적인 이권 침탈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첫 신호탄으로 막대한 금이 매장된 핵심 광산의 채굴권이 통째로 특정 자본에 넘어갔습니다. 이는 피난 생활 동안 국가의 부가 헐값에 유출되는 뼈아픈 역사의 서막이었습니다.
아관파천의 그늘 아래 열강들의 이권 탈취가 본격화되었고, 그 일환으로 평안북도 운산 금광의 채굴권이 미국인 모스(J. R. Morse)에게 헐값에 넘어갔습니다. 운산 금광은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황금맥을 자랑하던 곳으로, 훗날 '노다지(No touch)'라는 신조어가 생겨난 가슴 아픈 배경이 된 장소입니다.

[조선을 둔 열강의 비밀 합의]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충돌 위기에 놓인 두 외세가 조선 정부를 철저히 배제한 채 비밀스러운 타협을 맺었습니다. 국왕의 안전 보장과 양국의 군대 주둔 규모 등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결정했습니다. 조선의 운명이 강대국들의 체스판 위 말로 전락했음을 보여주는 치욕적인 외교 문서였습니다.
한성에 주재하던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일본 공사 고무라 주타로 사이에서 맺어진 '베베르-고무라 각서'입니다. 고종의 환궁을 러시아 공사관이 강요하지 않겠다는 점을 명시하고, 양국이 조선에 유사시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 한도를 합의하는 등 철저히 외세의 이익만을 대변한 야합이었습니다.

[굳어지는 열강의 세력 균형]

앞선 지역 대표들의 합의를 바탕으로 두 제국주의 국가의 최고위층이 만나 한반도 분할 통치에 대한 논의를 구체화했습니다. 조선의 재정과 군대를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겉으로는 조선의 안정을 내세웠으나 실상은 침략을 위한 유예 기간을 두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외상 로바노프와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만나 체결한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입니다. 조선의 재정과 군대를 양국이 지원(간섭)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필요에 따라 한반도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하자는 논의까지 비밀리에 오갔습니다.

[자주독립을 향한 민중 결집]

외세에 휘둘리는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뜻있는 지식인들과 관료들이 모여 근대적인 정치 단체를 결성했습니다. 이들은 국왕의 조속한 환궁을 촉구하고 백성들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며 거센 여론을 주도했습니다. 군주가 외세의 보호를 받는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민중의 권리 의식이 크게 성장했습니다.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의 개화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를 정식으로 창립했습니다. 초기에는 고위 관료들도 대거 참여한 관민 합작 단체의 성격을 띄었으나, 점차 만민공동회 등을 개최하며 고종의 환궁을 강력히 압박하고 열강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는 대중적 정치 단체로 발전했습니다.

[프랑스에 빼앗긴 철도 이권]

한반도의 동맥을 잇는 핵심 철도 노선의 부설권이 또 다른 서구 열강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국왕의 도피처를 제공한 세력들의 잇따른 청구서에 조선 정부는 속수무책으로 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써 국토를 관통하는 핵심 교통망이 외세의 입맛에 따라 개발되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한성과 의주를 잇는 군사적, 경제적 핵심 노선인 경의선 철도의 부설권이 프랑스의 피브 릴(Fives Lille) 회사에 넘어갔습니다. 이는 아관파천 기간 동안 러시아의 동맹국이었던 프랑스가 조선의 외교적 취약성을 파고들어 얻어낸 막대한 경제적 이권 중 하나였습니다.

[행정 구역의 전면 개편]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도 국가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한 내부적인 행정 개혁이 단행되었습니다. 기존의 제도를 대폭 수정하여 전국을 새롭게 구획하고 지방관의 권한을 재조정했습니다. 이는 국왕이 피난처에서도 내치를 다지며 정상적인 국정 운영을 시도했음을 보여줍니다.
갑오개혁 당시 실시되었던 23부제를 폐지하고, 오늘날 대한민국 행정구역의 근간이 되는 '전국 13도제'를 전격 시행했습니다. 이를 통해 지방 관제의 혼란을 수습하고 도관찰사에게 행정 권한을 집중시켜 중앙 집권력을 다시 강화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노골적인 자원 수탈]

국왕을 직접 보호하고 있던 국가가 마침내 북방의 광활한 산림 자원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앗아갔습니다. 이권 침탈의 규모와 가치 면에서 앞선 사례들을 압도하는 치명적인 손실이었습니다. 보호의 대가로 국가의 핵심 자원을 무기력하게 내어준 가장 큰 부작용이었습니다.
러시아의 율리 브리네르(Y. I. Bryner)가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그리고 울릉도의 막대한 산림에 대한 채벌권을 획득했습니다. 이는 목재 자원의 수탈을 넘어 훗날 러시아가 압록강 유역에 군사 기지를 건설하려는 야욕의 발판이 되었으며, 러일전쟁을 촉발하는 외교적 분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독립 의지를 새긴 건축물]

과거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완전한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서양식 문을 세우는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국왕이 외국 공사관에 머무는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도 국가의 체면을 세우려는 백성들의 염원이 담겼습니다. 이는 국왕의 환궁을 압박하는 거대한 상징물로 기능했습니다.
조선 시대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파리의 개선문을 본뜬 '독립문' 정초식을 거행했습니다.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났음을 상징하는 동시에, 서구 열강과 러시아의 내정 간섭 역시 배격하겠다는 민중의 굳은 의지가 담긴 프로젝트였습니다.

[돌아갈 궁궐의 은밀한 정비]

러시아 공사관 생활이 길어지면서 국왕이 다시 돌아갈 새로운 거처를 은밀하게 단장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기존에 머물던 거대한 궁궐 대신 외국 공사관들이 밀집한 지역의 작은 궁궐을 선택하여 외세의 견제를 유도하려 했습니다. 이는 머지않아 환궁이 이루어질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명성황후의 비극이 서린 경복궁으로 돌아가기를 꺼린 고종은, 미국, 영국, 러시아 등 각국 공사관이 밀집해 있어 신변 보호가 유리한 정동의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을 새로운 법궁으로 삼기 위해 수리 및 증축 공사를 지시했습니다. 비좁았던 경운궁은 이때부터 황궁으로서의 위용을 갖춰나가기 시작했습니다.

1897

[1년 만의 외로운 환궁]

나라 안팎의 거센 비판과 환궁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떠밀려 마침내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 새롭게 단장한 궁궐로 돌아왔습니다. 무려 1년이 넘는 긴 피난 생활이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나라의 곳간은 텅 비어있었고 열강의 간섭은 더욱 심해져 있었습니다.
아관파천이 발생한 지 374일 만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 수리가 끝난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했습니다. 독립협회의 빗발치는 상소와 군중 집회, 그리고 열강들의 세력 균형이 어느 정도 맞춰진 상황에서 더 이상 명분 없는 망명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국으로의 화려한 부활]

추락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자주독립 국가임을 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국호를 새롭게 바꾸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망국의 위기 속에서 시도된 조선 왕조의 마지막 발버둥이자 가장 화려한 외교적 이벤트였습니다. 이로써 길고 참담했던 외교 공간에서의 피난 생활이 남긴 상흔을 덮고 새로운 출발을 알렸습니다.
고종은 환구단(원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로 즉위하며,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연호를 '광무'로 고쳐 반포했습니다. 아관파천이라는 극도의 수치심을 딛고 일어나 열강들과 대등한 주권 국가임을 천명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절박한 자주독립 선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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